상상나누기

인간조건의 부조리? 현실세계의 부조리!

문화연대 소식지 "상상나누기" 2010년 17호 후일담 3

 

인간조건의 부조리? 현실세계의 부조리!
 - 연극 <심판> 관람평

 

안태호
(문화연대 회원)

 

“좋습니다. 전 체포되겠습니다. 그러나 전 제 자신의 무죄도 입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 제게 걸린 혐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니까요. 전 유죄입니다. 내가 무죄라는 걸 증명할 도리가 없으니까요. 아시겠습니까. 이게 정의란 겁니다.” - 요셉. K

 

“피의자는 혐의 사실을 알아선 안 된다. 적어도 선고가 있기 전 까지는.” - 판사

 

은행의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는 요셉.K는 30세 생일날 느닷없는 수사관들의 방문을 받는다. 이들은 요셉.K를 다짜고짜 체포한다. 죄목도 밝히지 않은 무작정 체포인데다 당사자  역시 영문을 알 수 없는 사건이다. 더 이상한 것은 체포 상태이지만 구속되지는 않고 그의 일상은 그대로 유지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미 재판은 시작되었다. 법정출두 명령을 받은 요셉.K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숱한 사람들을 만나며 갖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그 노력들은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사실은 법정의 존재 역시 안개 속 미로와 같아 접근조차 쉽지 않다. 그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고자 몸부림치지만, 무슨 죄를 지었는지 조차 모르는 상태로 31세 생일을 하루 앞둔 날 처형을 당하고 만다.

 

이상이 연극 <심판>의 줄거리 아닌 줄거리다. 왜냐하면, 실제 공연 과정에서는 스토리 라인보다는 요셉.K가 느끼는 고통과 불안, 좌절과 고독이 전면화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공연을 보는 내게 나타났다. 카프카의 작품이야 너무도 유명짜해서 실제 작품을 읽어보지 않은 이들도 인간의 실존, 원죄의식, 부조리 등등의 말을 입에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실제 공연에서도 주인공이 느끼는 혼돈과 영문을 알 수 없는 공포가 여과 없이 전달됐다. 특히 여러 개의 문으로 연결된 무대 전면은 조명에 따라 장소가 분할되는 탁월한 공간연출력을 보여줬으며, 무대 양옆으로 천장까지 쌓아올려진 서류보관함은 차가운 관료주의의 질식할 듯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상당히 많은 수의 등장인물들 역시 균형감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그런데 나는 어느 새 자꾸 공연을 현실과 연관 짓고 있었다. 물론, 알고 있다. 현실과의 기계적인 대입을 강조하면 할수록 작품의 해석지평은 협소해 진다는 것을. 그렇게 평면적인 시선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것은 뷔페를 앞에 두고 김밥만을 탐하는 것과 매일반이라는 것을. 그러나 어쩌겠는가. 국가가 개인을 상대로 명예훼손과 소송을 일삼는 나라, 웃자고 벌인 일에 죽자고 덤벼드는 정부, 사상표현의 자유의 비약적인 후퇴, 억울한 죽음들을 위한 추모시를 낭송해도 잡혀가는 세상, 비판자들의 입에 재갈물리기에 혈안이 된 검경, 인터넷에 단 댓글 몇 줄이 언제 출두요구서로 바뀌어 날아올지 모르는 이상한 나라. 나는 점차 공연과 현실간의 거리를 상실한 채 여지없이 이 사회의 요지경과 공연 속 이상한 재판을 하나로 겹쳐보고 있었다.

 

요셉.K가 느끼는 혼란과 부조리는 인간의 존재 자체를 묻는 변형된 질문이지만, 내게는 지금 이곳의 모순에 대한 송곳 같은 추궁으로 읽혔다. 어쩌겠는가. 지금 이 사회는 정치적 코드 과잉을 강요하는 곳이다. 공연의 해석지평마저 비좁게 만드는 이 어지러운 세상을 탓해야 하는 걸까. 예술이 사회와 유기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정부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나는 이 공연을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이벤트를 통해서 접했다. 피리 부는 사나이라면 동화 속의 그 신비한 등장인물이 아닌가. 어느 날 쥐가 들끓는 동네에 나타나 피리로 쥐들을 꾀어내 소탕하지만, 정당한 대가가 주어지지 않자 이번에는 피리로 아이들을 꼬여내 홀연히 사라져 버린 그 사나이 말이다. 나는 아무래도 피리 부는 사나이가 아이들을 데려간 것은 부모들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정직하지 못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아이들을 구출해 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은 기존의 왜곡된 세계를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 게 아닐까. 참세상과 문화연대가 함께 손잡고 만드는 이 프로그램에 기대가 크다. 일단 피리로 꼬여내는 건 그들의 역할이라 해도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향한 발돋움은 독자들과 회원들의 몫일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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