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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독자 기고] 습관이 되어버린 차별 / ‘◯◯◯’을 보지 않을 권리?

[독자 기고]

습관이 되어버린 차별


<아요 / 홈리스뉴스 애독자>


서울역 지하철 통로를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 역시 정신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저 앞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남성이 갑자기 벽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노상방뇨를 하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돌리면서 욕을 한다. “저런 XXX...”

“XXX”에 들어갈 말은 짐작하는 데로다. 그 남성은 헝클어진 머리와 남루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흔히 우리가 ‘노숙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만약 그 남성이 술에 취했더라도 말끔한 양복을 입었더라면 사람들은 어떤 욕을 했을까.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술이 문제야! 술에 취해서 저게 뭐 하는 행동이야!”
모든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실수도 하고,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적 소수자, 사회적 약자의 경우 그 실수와 잘못의 원인이 그 사람의 존재 자체로 몰린다. 회사원으로 보이는 남성이 거리에서 노상방뇨를 하면 사람들은 그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욕을 하지만, 그 사람이 늘 그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술에 취해 잠시 정신줄을 놓아서 그랬다거나 회사생활이 힘들어 술을 많이 마셔 저렇게 된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노상방뇨를 한 사람이 노숙인일 경우, ‘노상방뇨’라는 잘못된 행동이 아닌 ‘노숙인’이라는 존재 자체에 비난이 집중된다. 그래서 노숙인들을 ‘일반’ 사람들이 다니는 곳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노숙인들은 ‘항상’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잘못된 행동을 한 여성이 뉴스에 나오면 “이래서 여자들은 안돼!”라는 말부터 나온다. ‘○○녀’라는 낙인을 찍으며 특정 행동을 여성 일반의 특성으로 치부해버린다. 외국인에 의한 범죄가 발생하면 모든 이주노동자들을 추방해야 된다고 부르짖는다. 이주노동자들은 늘 범죄를 저지르며 돌아다니는 위험한 존재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잘못을 한 행위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다. 그런데 그 존재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존재에 대한 차별과 낙인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일상적인 생각 습관으로 굳어진 것 같다. 매일매일 벌어지는 나의 생각과 감정은 어쩌면 차별의 습관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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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지 않을 권리?


<나와그대 / 홈리스행동 회원>


얼마 전, 우연치 않게 기이한 논리의 댓글 하나를 보게 되었다. 지하철 역 거리홈리스에 대한 기사에 달린 그 댓글은 ‘노숙인을 보지 않을 권리’에 대해 말하고 있었는데, 글의 요지인 즉, 역사 내 노숙인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그들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지하철 고객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대로라면, 노숙인은 지하철 고객의 눈에 띄는 순간부터 그 사람의 인권을 유린하는 가해자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사실 무언가가 보기 싫다는 말은 그 무언가가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노숙인을 보지 않을 권리가 지하철 고객들한테 있다는 주장은 곧 이들에게 노숙인을 치워버릴 ‘자격’이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때의 자격이란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아니라 ‘소비자’로서의 자격일 따름인데, 만약 이것이 인간의 권리라면 우리는 인간이기에 앞서 먼저 소비자가 되어야만 한다.

이 얼척없는 논리와 주장에 실소 한 번 짓고 넘어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문제는 이러한 식의 엉터리 권리 주장이 지난 수년 동안 약소자(소수자・약자) 집단의 인권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그에 대한 반론으로 빈번히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앞서 노숙인을 보지 않을 권리가 소비자의 자격으로 주장되었던 것처럼, 외국인 노동자(거주자)에 대해서는 국민(시민)의 자격으로, 성소수자에 대해서는 다수자의 자격으로 ‘보지 않을 권리’를 내세우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목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숱한 ‘○○○을 보지 않을 권리’들은 기실 소비자가 아닌 이들, 국민(시민)이 아닌 이들, 다수자가 아닌 이들을 마음만 먹으면 치워버릴 수 있는 존재, 곧 손쉽게 처분이 가능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에 불과하다. 동시에 이를 ‘인간의 권리’로서 말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오직 소비자인 한에서만, 국민(시민)인 한에서만, 다수자인 한에서만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보지 않을 권리’가 인권의 하나라는 무식한 주장과는 달리, 오히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수많은 보지 않을 권리들은 인간의 존엄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비극적인 결과만을 초래했을 뿐이다. 과거 나치 독일이 ‘독일 민족’의 자격으로 유태인을 말살하려고 했던 것이나 남아공 집권 세력이 ‘백인’의 자격으로 흑인들의 거주지를 분리시켰던 것을 ‘보지 않을 권리’의 정당한 행사라 말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사회의 약소자들로 인해 일상생활에 불편을 겪거나 혹은 가치관에 혼란을 겪게 되는 일은 현실에서 종종 일어난다. 최근 도처에서 난립하고 있는 ‘보지 않을 권리’들은 이에 대한 극단적인 반응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과 혼란은 어디까지나 약소자가 직면하고 있는 조건들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지 결코 존재 자체의 문제가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외려 약소자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이제껏 우리가 알고 있던 인간의 권리라는 것이 실제로는 특수한 자격(국민, 다수자, 소비자 등)을 갖춘 한에서만 유효하다는 것, 따라서 인간의 권리에 대한 새로운 사유와 접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이들에게 철저히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바로 이것이 약소자를 표적 삼는 모든 ‘보지 않을 권리’들을 우리가 거부해야만 하는 이유이며, 동시에 약소자의 ‘인간의 자격’을 향한 투쟁에 우리 역시 함께해야만 하는 당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