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 23일부터 성매매특별법(성매매알선등행위의처벌에관한법률, 성매매방지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이 시행되었다. 그러자 주류 여성단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정작 그 법의 적용을 받을 성매매 여성들은 추운 겨울, 국회 앞에서 단식노숙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을 두고 여성단체들과 언론은 '포주의 사주를 받았다'며 애써 그녀들을 외면했지만 지난 6월 29일 '전국성노동자연대(아래 전성노련)'가 출범하자 성매매 여성의 '노동자성'이 화두에 오르면서 여성단체와 진보진영까지도 이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도대체 성매매 여성들을 구원해 준다던 성매매특별법이 무엇이 문제여서 그녀들이 혹독한 겨울을 거리에서 보냈으며, '우리는 노동자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일까?
성매매 여성은 구제의 대상?
정부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성매매를 장려해왔다. 미군 주둔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기지촌 주변의 성매매를 장려해왔고, 70년대에는 외화획득의 일환으로 '기생관광'을 장려해왔다. 이는 이미 61년 '윤락행위방지법' 존재했으나 성매매가 지속적으로 있어왔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성매매특별법 제정운동은 2000년 군산 대명동의 성매매집결지 화재참사의 여파로 여성계가 성매매 문제를 여성운동화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또한 미국 국무부의 인신매매보고서도 성매매특별법을 제정하게된 뒷 배경에 자리하고 있다. 2001년 미국 국무부의 인신매매보고서는 한국을 인신매매 송출지 내지 경유지로 지적하고 인신매매 법규 준수 노력이 불량한 최하위 3등급 국가(미얀마, 수단, 알바니아, 콩고 등이 포함)로 분류했다. 화재사건을 계기로 폭발한 여성단체의 분노와 국제적, 외교적 망신이 성매매특별법 제정의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 가치의 잣대로 성매매를 근절해야 한다는 정부의 입장에서 제출된 성매매특별법은 성매매 여성을 위한 법이라고 하기엔 98% 부족하다. 성매매특별법은 '강제'에 의한 성매매 여성만을 피해자로 본다. 성매매특별법에 따르면 '위계, 위력 등으로 성매매를 강요당한 자, 마약 등에 중독된 자, 장애가 있는 자, 청소년, 그리고 성매매 목적의 인신매매를 당한 자'를 '피해자'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본인이 자발적 성매매 여성이 아닌 '피해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비자발적으로 성매매에 연루되게 된 증거를 제시해야 하며, 따라서 '자발적' 성매매 여성은 범죄자로 규정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성매매 여성을 '피해자화'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화 했다는 것은 그녀들을 '구제', '재활'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들을 피해여성의 위치에 놓고 이들의 일을 사라져야 할 직업으로 보면, 그 행위를 계속하는 여성들은 범법자가 된다. 이러한 여성을 구제하고 구출하려면 법과 공권력으로 접근하게 된다.
그러나 이 사회는 여성들이 성 산업에 발을 들이게 만들 수밖에 없는 구조이고, 그것은 '성매매 방지법'의 제정으로 없어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녀들은 시혜의 대상이 되는걸 원치 않는다. 구제의 의지로 성매매 여성들을 피해자로 놓는 것은 성매매 여성을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녀들은 이미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 여성단체들은 애써 그녀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다.
무늬만 자활대책
그렇다면 여성가족부가 성매매 여성을 구제하겠다며 야심차게 내놓은 자활대책을 살펴보자. 현재 음성적 성매매에 종사하고 있는 여성들까지 포함하면 150만 명의 성매매 여성이 존재한다(2003년 형사정책연구원에서는 성매매 집결지만을 기준으로 잡아서 최소 33만 명의 성매매 여성이 존재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05년 3월 기준으로 존재하고 있는 재활시설은 36개소로 632명만을 수용할 수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여성가족부는 이렇게 말한다. "이들이 모두 재활시설에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자활대책을 세울 의지가 있는가를 의문케 하는 말을 던진 여성가족부의 예상은 적중(?)했다.
한국인권뉴스가 경기도의 한 성매매 집결지의 성매매 여성 10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모두가 정부의 자활대책에 대해 반대했다. 1인당 37만원씩 지원되는 생계비로는 가족을 부양하는데 턱없이 부족하거니와 그곳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탈성매매를 한다는 보장도 없고 그렇게 하고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원시설 입소기간은 1년으로, 유럽의 경우 입소기간이 5∼7년이며 이후에도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에 비하면 자활대책이라는 것이 턱없이 부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실질적인 자활대책을 세우면 되는 문제일까?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의 83%가 가족을 부양해야 하며 몇 천만 원씩의 빚을 지고 있으니, 그들의 빚을 모두 탕감해주고 실질적인 생계비를 지원하면 그녀들이 탈성매매를 할 수 있을까? 실질적인 자활대책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자활대책 자체가 갖고 있는 한계는 성매매 여성을 '구제하여 자활에 성공하도록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기초했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이러한 자활대책을 시행한다고 하더라도 빈곤에 허덕이는 또 다른 여성들은 계속적으로 성매매로 유입될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좀더 깊이 사고되어야 한다. 사회 구조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빈곤, 양극화라는 구조적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금지주의, 합법적 규제, 비범죄화
현재 논의 지점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금지주의, 합법적 규제 그리고 비범죄화에 대한 것이다. 성매매특별법은 금지주의를 바탕에 두고 있다. 금지주의는 성매매 자체를 불법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단순 성매매의 경우,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 처벌의 대상이 되는 범죄자다.
금지정책은 성매매를 필요악으로 보기 때문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과 같이 음성적 성매매가 증가하며 성매매 여성을 주체로 보지 않는다.
전 종암경찰서장 김강자씨가 주장했던 합법적 규제주의, 즉 공창제는 일정한 형태의 성매매를 법적으로 인정하고, 이에 대한 세금을 징수하며 등록증, 의료감시체계를 의무화하거나 유곽지역으로 성거래 지역을 통제하는 정책을 말한다. 합법적 규제주의는 성매매에서 생기는 이윤을 취하기 위해 국가가 성매매를 규제하기 시작하면서 고안된 정책이다.
따라서 성매매 여성에 대한 등록제는 그녀들에게 주홍글씨를 새겨, '너는 죽으나 사나 창녀다!'라고 낙인찍는 것과 같다. 이는 성매매 여성들을 일반여성들과 분리시켰고 전업화시켰다. 이 두 가지는 성매매 여성을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그 무엇으로 낙인을 찍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성매매 여성에 대해 낙인을 찍지 않는 비범죄주의를 고려해야 한다. 비범죄주의는 법적으로 성매매 행위 자체를 규제하거나 금지하지 않는다. 다만 이를 조장, 착취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입장이다. 즉 가족형태의 변혁, 성별분업구조의 폐지, 여성의 노동권실현 등을 제기한다. 비범죄주의는 성매매 여성을 피해자로 보지 않고 성매매를 일종의 '직업'으로 본다. 따라서 성매매여성은 '노동자'로 규정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요즘 논쟁이 되고 있는 '성노동자'의 문제가 나온다.
그러나 '성노동'에 대해 '구매 남성에 대해 규제하지 않으므로, 성적 착취를 인정하는 꼴이고, 이는 곧 합법화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구매남성에 대해 단속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성적 착취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며, 성적착취의 인정이 곧 합법화도 아니다. 역으로 구매남성을 규제하면 성매매 문제가 해결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족제도로부터의 여성 억압
성매매가 남성의 성적 착취를 강화한다는 주장은 가부장적인 가족제도를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가족제도는 부계 혈통 유지를 위해 여성의 성욕은 부정되었고 오로지 재생산을 위한 성적 행위만 허용되었다.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은 남성의 지배, 성적 착취를 공고히 하는 결과를 낳았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가부장제와 성적 착취를 강화해온 것은 성매매가 아니라 가족제도이다."
또한 산업화가 되면서 남녀간 성별분업이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생산영역, 임금노동은 남성이 담당하고, 재생산 영역, 무임금노동은 여성이 담당하게 된다. 자본주의적 산업체계가 발전할수록 여성은 노동시장에서 퇴출 되어 재생산 영역에 고착화된다. 따라서 여성은 화폐화된 시장에서 생계수단을 얻기 위해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됨에 따라 가부장성은 더욱 강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 과정에서 여성들은 이제야 재생산 영역에 대해 명실상부한 '노동'이라며 가부장적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부계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창녀'와 '성녀(남편에게 생계를 유지하는 정조관념을 지키는 여성)' 되었기에, 그리고 여성의 억압과 배제가 가족제도에서 고착화 되었으므로 성매매여성에 대한 연대는 전체 여성 억압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때문에 여성의 재생산 영역에 '노동성'을 부여하는 것과 같이 성매매여성에게 '노동성'을 부여하는 것에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이로부터 여성의 해방은 성별분업화된 가족제도의 변혁, 혹은 해체 전략으로 삼을 수 있다.
노동의 위계화
성노동에 대한 논쟁은 '노동가치설'이라는 철학적 문제부터 인권적 접근의 문제까지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신성한 노동'에 어찌 비천한 '창녀'를 포함 시키냐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전혀 신성하지가 않다. 자본의 감시와 통제 속에 죽음의 노역과 같은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노동자이다. 성매매 여성은 비천한 노동으로 비하하면서 오히려 노동을 위계화 시키는 것은 노동자성을 인정받고 있는 자들의 일종의 권력이다.
노동자는 근본적으로 '노동력 상품'의 폐절을 추구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이 노동력이 상품임을 용인하면서 이러한 억압적 노동에서 해방되려 투쟁을 전개한다. 이것이 성노동자와 무엇이 다른가? 근본적으로 '성 상품'은 없어져야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현재적 조건에서 그녀들은 자신들을 억압하고 있는 착취와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성노동자'라 선언했다!
전성노련의 10대 규약 중 "성노동과 탈성노동에 관한 것은 성노동자 자신이 자율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이 있다. 이는 그녀들 스스로가 성노동자라고 결정하겠다는 것이며, 진정으로 탈성매매를 해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 할 것이니 정부가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6월 29일, 성노동자임을 선포했다. 이미 그녀들은 그렇게 주체로 나서고 있고 성노동자로 규정하고 있는데 옆에서 '아니다, 맞다'라는 논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주체화되고 있는 그녀들과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진보진영은 이들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거나, 적대적인 시각을 갖고 있기도 하다. '노동'이라는 개념이 착취구조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지녔고, 그렇게 투쟁해 왔다. 마찬가지로 성매매에 '노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성매매여성은 피해자가 아니라 저항하는 인격적 주체로서 사회권(생존권, 노동권)으로서의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한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
이제 주체로 서고 있는 성매매여성들에 대한 윤리적·도덕적 잣대를 버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곧 여성억압에 대한 저항이기도 할 것이다.
참고문헌
이성숙, 「매매춘과 페미니즘, 새로운 담론을 위하여」, 책세상
이황현아, <성매매에 대한 성노동권적 접근>, 노동자의 힘 여성활동가모임 토론회 발제문
김정은, <성노동자도 인간이다. 성노동자의 투쟁에 연대하자!>, 「월간 사회운동」55호
고정갑희, <성매매방지법과 여성주의자들의 방향감각>, 「여/성이론」통권12호
Judith Stacey,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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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온 곳] 노동자의 힘 83호 특집 2005년08월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