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집단학살
안산에서
마피아들에 대한 분노를 재확인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아주 오래된 '비지론'의 부활을 예감한다.
이 사회 자본의 총체적 국가 모순이
여전히 '비지론'으로 환원된다면,
그래서 아이들의 귀한 핏값이
사회화로 나아가지 못한 채 관성에 갇힌다면,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 고개를 들 수 있을까?
'침묵'시위로 '가만 있으라'는 저들은 대체 누구지?
엎어야 한다는 요구 앞에 계산기 두드리는 저들 말이야.
2. 질문
세월호에서 아이들이 집단학살 당했다.
그럼에도, 정치는 어차피 현실이므로
그나마 ‘차악’ 선출이 대안?이라는 발 빠른 이성적인?
선거 얘기들이 나온다.
동시에 추모와 분노의 ‘침묵’ 행진도 등장하고.
실화영화 'BUS44'에서
강도들은 여성 버스운전기사를 강간하고 이어 참사가 일어난다.
버스에 갇힌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승객인 당신은 범인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큰소리로 선동하며 맞서 싸울 것인가,
아니면 ‘침묵’으로 ‘차악’을 선택할 것인가?
여기서 ‘차악’은 대체 어떤 방식으로 표출할 것인가?
3. 힐링
누구나 트라우마를 말하고 힐링을 권한다.
망한민국 절대다수 노동자민중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기에
자본과 자본가권력 마피아들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가해의 결과이며 현재 진행형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적 트라우마’와 ‘사회적 힐링’을 말해야 하며
세월호 집단학살 사건 ‘해법’ 요구에서처럼
‘진상규명’과 함께 모든 관련 ‘책임자 처벌’이
사회적 힐링의 시작으로, 대안사회의 구축으로 이어져야 한다.
무한이윤을 노리는 자본과 관료들의 먹이사슬 앞에서
요즘 일각의 "내 탓이오"식 접근은
사회적 트라우마를 개인적인 문제로 환원시킬 수 있고
‘공동책임 무책임’ 우려와
저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어 바람직하지 않다.
모든 사회적 트라우마는 ‘사회적 힐링’으로 해소되어야 하며
사회적 힐링은 마지못한 '시혜'가 아닌
저들에 맞선 지속적인 ‘투쟁’으로만 가능하다.
자본의 전쟁터에서는 오늘도
생때같은 아이들도 노동자민중들도 스러지는 이들이 끊이질 않는다.
4. 운동
이 혹독한 시대, 운동에도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87체제의 성과로 체제에 안착한 신기득권층
자신들만의 브랜드로 영역 확보를 이룬 부문주의자들
사회과학적 묵시론으로 영원한 내일을 도모하는 현장지배권력들
그리고
정처없이 부유하는 노동자민중들
구호만 난무할 뿐 감동 찾아보기 힘든 적잖은 현장
정파와 기조에 따라 동지?들 사이에 오가는 긴장과 적의
운동이 마치 매트릭스 거미줄에 고착된 형국이다.
(설국)열차 내에서의 투쟁 의미는 여전히 유효한가
아니면
또 다른 세계를 꿈꾸는 건 어떤가?
여기는 분노의 안산.
[한국인권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