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해야 할 유령이 하나 더 늘었다.
애도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그 애도의 행위가 어떠한 애도의 행위가 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 윤리적인 애도 행위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물어야 한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말했듯이, 애도는 단순한 슬픔의 배출, 배설일 수 없다. 그러한 애도야말로 자기 안에서 속히 슬픔을 비워내고, 죽은 자를 어서 잊으려는,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 속에서 죽은 자를 다시 죽여 그의 유령을 내쫓으려는 시도일 수밖에 없다. 조급하고 너무 과장된 슬픔을 표현하는 애도가 오히려 의심스러워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죽은 이에 대한 슬픈 감정을 배출하지 않고, 단순히 우리 안에 싸안고 있는 것이 윤리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안의 지하납골당 안에 타자로서의 고인의 시신을 매장하고, 그와의 어떤 소통도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타자에 대한 책임 회피의 결과이며, 이것은 조급한 애도만큼이나 비윤리적인 애도일 뿐이다.
윤리적인 애도를 위해 우리는 고인에게서 무엇을 계승할 것이고 무엇을 비판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선택하고, 결단해야 한다. 햄릿이 자신의 아버지 유령을 마주 대하고 끊임없이 망설이듯이, 아버지 유령의 목소리 안에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듯이 그렇게 우리는 노무현의 유령을 대해야 한다.
고(故) 노무현은 하나가 아니다. 몇 년 전 어떤 분이 내가 종종 다니던 웹사이트에, 고 노무현 씨가 80년대 말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원들 앞에서 행한 연설문을 가져다 놓은 것을 읽어본 적이 있었다. 노무현 씨의 부고를 들은 날, 나는 하루 종일 그 연설문을 찾아 웹을 헤맸지만 결국 찾지 못했는데, 어떤 고마운 분이 이를 알고 연설문을 찾아다 여기 올려 주셨다. 지금 읽어봐도 명연설이고, 매우 급진적이었던 당시 그 분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조금 길지만 함께 읽어보자.
“여러분! 이번 여러분의 파업은 법률상 위법입니다. 그런데 법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저 산동네의 철거민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도 하루 종일 일하고 퇴근해서 따뜻하게 등 눕힐 수 있는 구들장이 필요하고 그 사람 자식들도 밥 먹던 상이나마 행주로 닦아 책 놓고 공부할 수 있는 방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법에 위반되었다고 무허가라고 집을 뜯어버립니다. 노점상들도 그렇습니다. 입에 풀칠을 하려고 나와 있는 노점상들을 도로교통법을 걸어 목판을 차버립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집에 불이 나 다섯 가구가 몽땅 타버렸는데 피해액이 백만 원도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목판 하나는 전 재산입니다. 밥 못 먹게 하는 법, 그것은 법이 아닙니다.
“여러분! 헌법에는 노동3권을 명시해놓고 방위산업체는 안 된다고 합니다. 입만 열면 안보, 전쟁 위협을 하면서 비행기로 3분 거리에 있는 서울에 왜 63빌딩을 짓습니까? 방위산업체 쟁의는 안 된다고 하는 말은 대한민국 노동운동을 콱 밟아버려라 이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법은 정당할 때 지키고 정당하지 않을 때는 지키지 않아야 합니다. 또 말로만 하지 말고 악법은 국민의 손으로 철폐시켜야 합니다.
“노동자가 놀면 온 세상이 멈춥니다. 그 잘났다는 대학교수, 국회의원, 사장님 전부가 뱃놀이 갔다가 물에 풍덩 빠져 죽으면 남은 노동자들이 어떻게든 세상을 꾸려 나갈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날 노동자가 모두 염병을 얻어 자빠져 버리면 우리 사회는 그날로 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률, 경제, 사회관계 등 모든 것을 만들 때 여러분이 만듭니까? 그게 바로 오늘 한국의 노동자가 말하는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입니다. 그런 사회를 위해 우리 다함께 노력합시다.”
그렇다면 우리가 계승해야 할 노무현은 어떤 노무현인가? 나에게 그것은 전(前)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이 아니요, 신자유주의자로서의 노무현이 아니며, 이라크 전에 군대를 보낸 노무현, 국민들에게 한미 FTA를 강요하던 노무현이 아니다. 그것은 반대로 국회 청문회에서 명패를 던지던 노무현, 노동조합원들 앞에서 싸움의 각오를 다지던 노무현, 악법을 국민의 손으로 철폐시키자고 외치던 노무현, 전쟁을 비판하며 노동3권의 실질적인 보장을 요구하던 노무현이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고 노무현 씨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것은 택배 노동자들의 생존권 보장을 주장하며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고 박종태열사의 죽음, 또 용산참사에서 돌아가신 아홉 명의 철거민들의 억울한 죽음, 또 그보다 더 전에 바로 노무현 정권 하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다 돌아가신 고 하중근 열사의 죽음, 고 전용철 열사의 죽음, 고 홍덕표 열사의 죽음, 또 다른 많은 분들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는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프레시안에 실린 박동천 교수의 글("노무현 대통령 각하, 천국에서 평안하십시오")을 보고 내가 경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고인의 죽음을 진보진영에 대한 공격의 무기로 사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보수진영 뿐 아니라 진보진영도 고인을 "물어뜯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심지어 고인을 “각하”라고 부르며 과장된 예의를 표할 때조차, 고인에게 올바른 애도가 될 수 없다. 진정한 애도는 고인을 하나의 위대한 인간으로 기리는 것이 아니요, 고인을 평소 자신의 감정 풀이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노무현을 계승함으로써 그 분을 애도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특히 고인이 젊은 시절 꿈꾸었던 세상에 대한 꿈을 아직도 놓지 않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고 그 꿈을 지금 막 꾸기 시작하는 모든 사람들은, 바로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진보진영의 정당들이 그렇게 했듯이, 갑자기 그 분이 돌아가셨다고 자신들의 비판을 거두고 ‘한국 민주주의 개혁의 초석을 놓은 분’이라고 추켜올리는 것은 가신 분에 대한 예의조차 아니다.
예의를 갖추어, 그 분을 애도하자.
제대로 애도하자.
(블리치님이 고맙게 고 노무현씨의 연설을 찾아 올려주셔서
그것을 포함해서 다시 작성하고 표현들도 손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