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깨우는 사람들. 계룡대 노숙 51일.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

벌써 10년도 넘는 기억이다.
세 자매 막내인 아내와 결혼하고 장모님은 혼자 되셨다.
모진 세월 혼자 몸으로 세 자매를 키우고, 마지막 여의는 막내딸의 결혼식에 홀로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훔치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결혼 후 몇 해 지난 어버이 날 장모님께 이벤트로 출근을 시켜 드렸다. 한사코 버스를 타시겠다는 장모님을 설득하여 간신히 내 차에 모신 뒤 가양 동에서 신촌 까지 가는 동안 청소 노동자인 어머님과 가장 많이 얘기 한것같다.
도착 할 때 쯤 오늘의 이벤트 다음 코스는 어머님과 같이 청소 하는 것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시는 모습이었다. 그 당시 장모님은 두 개 층 사무실 및 계단과 화장실을 맡으신 것으로 기억난다.
장모님의 만류로 끝내 같이 청소는 못 했고, 건물 지하에 있는 탈의실에 앉아 같이 일하시는 분들과 커피 한잔 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후 에 아내를 통해 들은 얘기지만 같이 일하는 동료 분 들이 막내 사위 잘 얻었다고, 남들은 제 자식도 창피해서 안 오는데 사위가 일까지 같이 하겠다며 따라 나선 것이 요즘 젊은이 같지 않다는 칭찬에 사업 하는 사위라 맘에 안 들었지만 처음으로 맘에 들었다는 속의 말씀을 하셨단다.
그러실 만도 한 것이 위로 동서 두 분이 있는데 사업을 하다 부도가 난 상태라 결혼 전부터 사업이나 장사하는 사위는 절대 NO 셨다.
게다가 장남이고 같이 살아갈 부모님과 시동생에……. 어려웠지만 곱게자란 막내 딸 과의 결혼을 허락하기가 쉽지 않으셨을 것이다.

2년 전 장모님은 하늘나라로 가셨다.
가끔 “왜 이리 소화가 안 되지” “요즘은 입 맛이 통 없어” 이것이 급성 위암 말기 일 줄은 몰랐다. 건물 지하 습한 어두운 곳에서 쪼그려 앉아 한 끼 때우던 식사가 병 이었음을 몰랐다. 태어나서 그렇게 서럽게 울어본적이 없다. 채 한달도 병원에 안계시고 홀연히 어머님은 우주에 한 부분이 되신 것이다.
최저 임금에 생활을 하시면서도 남은 자녀들에게 짐을 지울 수 없어 한푼 두푼 모으신 통장을 내 보이시며, 장례비용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남으면 셋이서 똑 같이 나누라는 말씀이 마지막 인사셨다.

오늘로써 해고 된지도 만 2년이고, 군인공제회관 앞 노숙농성이 51일째다.
이곳에도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이 있다. “청소 노동자”
7시 출근 4시 퇴근 이지만 청소 소리는 새벽 6시부터 시작된다.
왜 이리 일찍 나오세요? 라는 물음에 “7시부터 하면 할 수가 없어. 오가는 사람 없을 때 해야지” 그래서 모두들 일찍 나오시는 거예요? “벌써 10년 넘었는데 뭘. 근데 몇 일째야? 이런다고 세상이 바뀌나. 몸 만 상하구” 하신다.
돌아 나오며 나 혼자 소리로 내 안에 나를 깨운다.
“어머니, 이런다고 세상이 쉽게 바뀌진 않을 거 같아요. 내가 바뀌지 않기 위한 투쟁일수 있겠죠. 그러다 보면 세상도 조금씩 바뀌지 않을까요.”

오늘 이 후 오가는 길 청소 노동자를 보면 따뜻한 미소로, 공손한 인사로 그 분들의 명예를 높여주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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