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대의 관광버스는 여전히 도로를 가득 채웠다. 토요일이면 하루에 8건, 일요일은 4건의 결혼식이 군인공제회 켄벤션웨딩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걸어 놓은 현수막을 바라본다. “시민 여러분 꼭! 읽어주세요”로 시작하는 계룡대 시설관리 노동자의 불합리한 현실을 차근히 읽어 내려간다. 처음에는 평일과 다름없이 토, 일요일도 현수막 밑에 앉아 있었는데 사람만 구경하고, “왜 저러고 있지” 라는 끼리끼리의 소곤댐이 우리의 현실을 알리는데 방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 후 주말이면 차 안에 앉아 저 멀리서 그 역할을 대신한다. 그러기에 누구하나 집회차량 이라 붙여있는 차 안에 있는 나에게는 관심이 있을리 없고, 그로인해 마치 한 섬에 떨어진 로빈슨처럼 대중 속에 한 점이 된다.
혼자 있을 때 가장 고마운 친구는 고전과의 만남이다.
제목만 보고 선택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낯선 곳에 와 있는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와 같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첫장을 넘겨 카뮈에 생에를 보고, 읽으면서 느낀 것은 나 아닌 나를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이 이방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생활과 만남들이 카뮈가 몇십년전에 상상한 그 모습 그대로 이시대에 방영이 되는 것 같다.
점점 무거워지는 마음으로 읽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자아낸 부분이 있다.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가 죽은 다음날 “해수욕을 하고 여자와 관계를 맺고 희극 영화를 보며 웃고” “태양 때문에” 아랍인을 죽이고, 재판정에 선다. 취재차 온 기자가 자기소개를 주인공인 뫼르소에게 한다. “ 당신 사건 때문에 온 것은 아닙니다. 부모 살해 사건에 관한 취재 임무를 띠고 왔는데, 동시에 당신 사건도 기사로 만들어 보라는 지시를 받았죠” 이 말에 주인공 뫼르소는 “고맙다” 라는 인사를 할뻔 했다는 독백을 한다. 이 얼마나 실소를 자아내는 대목인가! 나의 삶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가듯 사형 이라는 죽음 앞에서 마저 스스로를 주체적 자아가 아닌 3인칭 이방인이라 믿고 있는 것이다. 결국 주인공 뫼르소는 사형 집행 전날 대중의 야유를 기대하며,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의 삶이 이와 같은 이방인의 모습은 아닌지 다시한번 생각한다,
나는 오늘 2년 전 양파 껍질처럼 덮인 자본의 굴레에서 이방인의 삶을 벗어나고자 정의롭게 외친 조합원 동지들을 생각하며 이 자리를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