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성해방] 여성해방(운동)은 완전히 실패 - Emma Goldman

적대적 이원론 극복해야

*** 더 큰 여성해방, 본성을 해방하라 ***

엠마 골드만 Emma Goldman (혁명가, 여성해방운동가)


먼저 나는 내가 주장하려는 바를 말하고 싶다. 모든 정치·경제 이론, 계급과 인종 간 차이, 여성의 권리와 남성의 권리 간 인위적 경계가 없는, 오히려 이런 차이들이 서로 만나고 또 하나의 완전한 개체 속에서 사라져버리는 지점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남녀 간, 개인 간 평화와 조화가 이루어지기 위해 반드시 인간끼리의 피상적 균등화가 필요한 건 아니다. 남녀 간, 개인 간 평화와 조화가 이루어지기 위해 개인 간 특성을 제거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현재 우리가 고찰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는 어떻게 자기 자신이 되면서 타인과 화합할 수 있느냐, 어떻게 다른 인간들과 심오한 교류를 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유지할 수 있느냐다.

이는 대중과 개인, 진정한 민주주의와 진정한 개인주의,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아무 적대감이나 반대 감정 없이 만날 수 있는 방법인 것으로 보인다. 관건은 서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는 것이다.

마담 스타엘이 자주 인용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은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이라는 말은 내게 감동을 준 적이 없었다. 이 문구는 고해실의 느낌이 난다. 타인을 용서하는 것은 바리사이(Pharisees) 같은 우월성 개념을 연상시킨다.

이웃은 이해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는 여성해방에 대한 내 견해와 모든 여성에 대한 여성해방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구현하는 말이다.


관건은 균등화 아닌 평화와 조화

여성해방은 여성에게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적인 사람이 될 가능성을 부여한다. 자기 확신과 활동을 요구하는 모든 것은 가장 완전한 자기 자신의 표현으로 귀결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좀더 큰 자유로 이끄는 길목에 잔재하는 굴종의 시대와 노예제도의 흔적을 제거해야 한다.

이는 여성해방운동의 원래 목적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획득된 결과는 여성을 고립시키고 여성에게서 행복의 근원을 앗아갔다.

외적 해방으로 현대의 여성은 삼각형, 원추, 입방체 모양 등으로 제멋대로 난 나무, 소관목으로 덮인 프랑스 수목재배물을 연상시키는 인공적 존재로 변해버렸을 뿐이다. 이런 인공적 여성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것은 특히 이른바 ‘지적인 계층’에서다.

’여성에게 자유와 평등을!’ 현대의 가장 고상하고 용감한 몇몇 지성들이 이 말을 처음 사용했을 때 불러일으킨 희망과 열망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여성이 자유롭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가는 새로운 세계에 태양이 찬란한 영광의 빛을 발하며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는 편견과 무지로 부패한 세계에 맞서기 위해 모든 위험을 무릅쓰는 선각자들의 열정, 용기, 인내, 끊임없는 노력에 걸맞은 목적이다. 여성노동자들은 가정의 편협한 시야와 자유의 결핍을 공장의 편협한 시야와 자유의 결핍과 교환하며 어떤 독립을 쟁취했는가?

내 희망은 이 목적을 지향한다. 그러나 현재 시행되고 해석되는 여성해방은 완전히 실패했다. 현재 여성이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해방에서 해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그야말로 정확한 표현이다.

여성해방으로 여성이 얻은 것이 무엇인가? 일부 국가에서의 참정권이다. 이 결과로 수많은 여성투표 주창자들이 예언했듯이 정치권이 정화됐는가?

답은 물론 ‘아니요’다. 지금이야말로 건전하고 명확한 사고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보수적인 말투로 ‘정치계의 부패’를 말하는 걸 중단해야 할 때다. 정치 부패는 다양한 정치권 인사의 윤리 혹은 도덕적 해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 원인은 순전히 물질적인 것이다. 정치는 ‘줄 행복보다는 취할 행복이 더 많다’, ‘헐값으로 사고 비싸게 되팔아라’, ‘더러운 손이 다른 손을 깨끗하게 한다’와 같은 원칙이 통하는 비즈니스적 논리를 반영한다.


행복의 근원을 빼앗아간 해방?

여성해방은 여성을 경제적으로 남성과 동등하게 했다. 여성이 자신의 직업 혹은 생업을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의 교육은 여성에게 남성과 경쟁하는 데 필요한 힘을 부여하지 못했기에, 여성은 시장의 가치에 도달하기 위해 매번 모든 에너지를 소비하고 생명력을 소진하며 과도하게 신경을 써야 하는 경우가 있다.

게다가 소수의 여성이 여기에 도달했을 뿐이다. 여교사, 여의사, 여성 건축사, 여성 엔지니어들이 같은 직종의 남성들과 동일한 신뢰를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동일한 보수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런 거짓 평등에 도달한 여성들은 대부분 육체적·정신적 희생을 담보로 했다.

대다수의 여성노동자들이 가정의 편협한 시야와 자유의 결핍을 공장, 기성복점, 상점, 사무실의 편협한 시야와 자유의 결핍과 교환하며 어떤 독립을 쟁취했는가? 많은 여성들이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친 뒤 춥고 메마르고 무질서하며 아무도 반기지 않는 집에 돌아올 염려를 감안한다면, 진실로 독립이란 영광스럽다고 봐야 하는가?

수백 명의 젊은 여성이 카운터, 재봉틀, 타자기로 ‘독립’을 이어가는 데 진저리가 나고 지쳐서 첫 번째 결혼 요청을 받아들이려 하는 현상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부모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중산층 젊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이 여성들도 열심히 결혼을 추구한다.

얼마 되지 않는 밥벌이에 불과한 독립된 생활은 자신을 희생할 정도로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이상적이지도 않다. 요컨대 그토록 큰소리로 자랑하는 독립된 생활은 단지 사랑과 모성이란 여성의 본능을 잠재우고 억누르려는, 효과가 느리게 나타나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독립과 여성해방에 대한 기존 개념의 편협함, 사회적 차원에서 동등하지 않은 남성을 사랑할 두려움, 사랑이 여성에게서 자유와 독립을 빼앗아갈 수 있다는 두려움, 사랑과 모성의 기쁨이 자신의 직업 수행에 해가 될 수 있다는 공포 등 이런 우려감은 해방된 현대 여성을 강제로 미혼으로 남게 만든다. 이렇게 삶은 지나간다.


사랑을 두려워할 때 해방은 없다

여성해방은 한 남자의 여성, 또 어머니로서의 진정한 여성의 심오한 감정을 마음껏 표출하기에는 너무 좁은 비전을 제시한다. 이는 여성해방을 받아들이고 개진하는 여성들 대부분이 생각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독립한, 즉 스스로 생계를 이어가는 여성은 세상과 인간본성을 아는 지식에서 과거 세대의 여성을 앞서간다. 이 때문에 본질적 삶의 결핍을 심오하게 느낀다. 사랑의 결핍 말이다. 사랑만이 인간의 영혼을 살찌우는데, 이 사랑이 없어 대부분의 여성들은 단순한 직업적 로봇이 되었다.

기존 제도를 파괴하고 좀더 진보적이고 완전한 것으로 대체하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운동에는 이를 찬성하는 지지자들이 있다.

이들은 이론적으로는 근본적인 사상을 옹호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평범한 속물에 지나지 않고, 존경받기 위해 자신의 반대자들의 좋은 견해를 획득하려고 애쓴다. ‘소유는 절도 행위다’라고 자신의 사상을 밝히면서 누가 핀 몇 개를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아도 분개하는 사회주의자, 나아가 무정부주의자들이 그 예이다.


여성 자유와 남성 자유, 깊은 연관성

여성해방운동에도 이런 속물들이 있다. 신출내기 기자와 하찮은 문인들은 해방된 여성의 모습을 일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우울한 아내들이 공포에 질리도록 묘사했다. 조르주 상드 같은 여성해방운동 지지자들은 도덕성을 멸시하는 것처럼 묘사했다.

여성해방운동가들에게 침범할 수 없는 것은 없었다. 여성해방은 반사회적이고 부도덕한 방탕한 삶, 사치스러운 삶과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들은 이처럼 조소 섞인 말에 분개하며, 이런 식으로 묘사될 만큼 자신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임을 증명하기 위해 진지하게 모든 에너지를 쏟는다.

물론 여성이 남성의 속박 아래 신음하며 지내는 오랜 세월 동안 여성은 착할 수도, 순수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자유와 독립을 쟁취한 이상, 여성들이 얼마나 착할 수 있는지 그리고 여성의 영향력이 사회의 모든 기관을 정화하는 효과가 있음을 증명하려 했다.

진정한 해방을 위한 위대한 노정에서 자유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위대한 여성은 발견되지 않았다. 여성들은 청교도적이고 위선적인 관점으로 남성을 방해자, 혹은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자신의 감정생활에서 추방해버렸다. 남성을 아이의 아빠로 용인한 경우는 아이 아빠가 없이는 거의 살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다행히 엄격한 청교도적 시각도 모성이라는 선천적 열망을 없앨 만큼의 힘은 없었다. 그러나 여성의 자유는 남성의 자유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해방된 많은 여성 동지들은 자유 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사랑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남자와 여자, 모든 사람들의 헌신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듯하다.

불행히도 문제의 비극을 낳은 것은 인간관계에 관한 이런 편협한 개념이었다. 현대 여성과 남성의 삶에서 말이다.


향유하는 만큼만 자유롭다

일반적으로 풍부한 지성과 아름다운 영혼은 숭고하고 강인한 인물에게 필요한 속성으로 간주되는 데 반해, 현대 여성들은 이런 속성이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확신하는 데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한다.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고대 성경적 결혼의 문구는 여성에 대한 남자의 주권, 즉 남자의 변덕과 명령에 대한 여성의 절대적 복종, 여성의 완전한 의존을 함축하는 장치라고 알려진 지 이미 한 세기가 훨씬 지났다. 오래된 부부관계가 여성을 남자의 종으로, 그리고 아이를 낳는 사람으로 전락시킨 사실은 수없이 명명백백하게 증명돼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많은 해방된 여성들이 여성의 본성을 훼손하고 구속하는 도덕적·사회적 편견 때문에 고립된 독신 생활을 견뎌내는 것보다는, 결혼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 결혼을 더 선호한 것을 보아왔다.

여성들은 이 교훈을 염두에 두자. 여성의 자유는 여성 스스로 해방되는 능력을 향유할 수 있는 곳까지 확대된다는 사실 말이다.

수많은 진보적 여성들이 이런 모순에 부딪히는 것은 해방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다. 진보적 여성들은 스스로 외부의 압박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윤리·사회적 관습, 개인의 삶과 성장에 훨씬 위험한 내부적 압박은 그대로 방치해두었다. 이런 것들은 과거 여성들의 머리와 마음에 새겨진 것만큼이나, 가장 활동적인 여성해방운동가들의 머리와 마음에도 똑같이 큰 자리를 차지했다.

이런 내부의 압제자들이 여론 형태로 나타나든, 혹은 엄마·숙모·이웃·아빠·고용주 혹은 징계위원회가 말하는 형태로 나타나든 상관없다.

여성이 이 모든 불만과 도덕적 ‘탐정들’, 인간 정신의 감시자에게 대항하는 것을 배우기 전까지, 여성이 자신의 영역에서 굳건히 서는 것을 배우고 아무 제한 없이 본성의 목소리, 즉 삶에서 가장 큰 보물인 한 남성에 대한 사랑, 아니면 가장 영광스러운 특권인 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권리 등 고유한 자유 행사를 주장하는 것을 배우기 전까지는 해방된 여성이라 불릴 수 없다.

한 현대 소설가의 저서에서는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해방 여성에 대한 묘사가 시도된다. 이 이상형은 여의사인 젊은 여성을 통해 구현된다. 그녀는 아이 양육에 대해 숙달되고 지혜롭게 논한다.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여성으로, 가난한 엄마들에게 무료로 약을 제공한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젊은 남성과 미래의 위생환경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돌마루와 돌벽 사용으로, 그리고 양탄자와 커튼을 쓰지 않음으로써 어떻게 전멸할 것인지를 설명한다. 그녀는 자연스러운 옷차림으로, 단순하고 실용성 있는 검정옷을 입고 있다.

젊은 남성은 해방된 여성 친구의 지식에 첫 만남부터 주눅이 들고 차츰 그녀를 이해하는 것을 배운다. 결국 그가 그녀를 좋아하는 아름다운 날을 맞는다. 이들은 젊다. 그녀는 착하고 아름다우며, 딱딱하게 옷을 입지는 않았지만 새하얀 칼라와 커프스가 그녀의 엄격한 면을 완화한다. 남자는 사랑으로 그녀를 대할 것으로 기대되지만, 로맨틱하고 불합리한 일을 저지를 사람은 아니다. 남자는 자신의 본성의 목소리를 막아버리고 단정한 행동을 유지했다.

그녀 또한 정확하고 합리적이며 고결한 모습을 계속 보인다. 그들이 결합할 경우, 남자가 빠르게 차가워질 우려가 있는 점이 염려된다. 솔직히 나는 그 여의사가 꿈꾸는 벽과 마루처럼 차가운 이 ‘새로운 아름다운 관계’에서 전혀 위대한 것을 볼 수 없다.

이런 단정함과 질서정연한 명료함보다는 낭만주의 시대의 로맨틱한 발라드, 돈 주앙, 달밤의 납치극, 줄사다리, 아버지의 저주, 어머니의 탄식과 분개한 이웃의 소란스러움이 더 좋다. 만일 사랑이 어떻게 제한 없이 주고받는 것인지를 모른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익과 손실을 고려하는 거래일 뿐이다.


적대적 이원론 극복해야 완성

미래를 향해 힘차게 걸음을 내디딜 때 구원은 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낡은 전통과 구시대 관행을 던져버리고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여성해방운동은 이런 방향의 첫걸음을 내딛은 것에 불과하다.

여성해방운동은 그 두 번째 걸음을 내딛기 위해 충분한 힘을 비축해야 할 것이다. 동등한 시민 투표권 행사는 바람직한 요구사항일 수 있지만, 진정한 해방은 투표장이나 법정에서는 더 이상 시작될 수 없을 것이다.

진정한 해방은 여성의 영혼에서 시작될 것이다. 역사는 말한다. 모든 시대에 피압제자들이 지배자에게서 진정으로 해방된 것은 그들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여성은 스스로 ‘자유로워질’ 능력이 있을 때 자유가 주어진다는 교훈을 새길 필요가 있다. 여성에게는 내부 개혁, 곧 편견과 전통, 관습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는 것이 백번 중요하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동등한 권리 요구는 정당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하고 사랑받을 권리다.

부분적인 여성해방이 여성의 진정하고 완전한 해방이 되기 위한 조건은 여성으로서 사랑받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것이 노예가 되고 종속된다는 개념과 동일하다는 우스꽝스러운 개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은 남녀 이원론이란 불합리한 개념을 벗어버려야 한다. 남성과 여성이 적대하는 두 개의 세상을 형성한다는 이원론적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편협함은 분리를 낳지만 관대함은 화합으로 이끈다. 좀더 너그럽고 관대해지자. 성적 관계에 대한 진정한 개념은 정복자가 있는 것도 정복당하는 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끝없는 헌신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는 자신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고, 확신 있게 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 이런 태도만이 공허감을 메워주고 여성운동의 비극을 무한한 기쁨으로 승화시킬 것이다.



* 엠마 골드만이 1906년에 쓴 이 글은 2003년 잡지 <아곤>(Agone)에 게재됐고, <마니에르 드부아>(Maniere de voir) 8·9월호에 재수록됐다.

▒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36호 ALL[공개분](번역= 전지연)
바로가기 http://www.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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