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록 에세이] 노동자, 자본가 그리고 문화적 돌연변이 2/3

최형록(인문학자)


노동자, 자본가 그리고 문화적 돌연변이


- '리센코주의’, 스탈린주의 그리고 21세기 마르크스주의



3) 리센코주의의 득세와 스탈린주의

이상으로부터 리센코주의는 라마르크의 ‘획득형질 유전론’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리센코주의가 소련의 생물학과 유전학의 발전을 억압하고 있던 기간, 1930년대부터 1950년대 기간에 자본주의세계에서는 생물학과 유전학의 혁명이 진행되고 있었다.

생화학과 유전학이 상호교류하면서 유전자의 화학적 조성, 특히 박테리아 유전학과 담배모자이크 바이러스연구 그리고 어윈 쉬뢰딩거와 같은 양자물리학자들의 개입 등을 경과하면서 분자생물학이 새로운 과학의 한 영역으로 자리 잡았고 마침내 생명체 유전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DNA의 2중 나선구조가 발견되었던 것이다.1)

리센코주의에 대립했던 이른바 바이스만-모건주의의 모건의 제자들 가운데 한사람, 1927년 X선이 유전자에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음을 발견했던 헤르만 뮐러는 ‘사회주의와 유전학의 통일’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소련에 우호적이었다. 그는 1935년의 『밤으로부터 벗어난』에서 계급차별이 폐지된 사회에서만 비로소 우생학이 적절히 이행될 수 있으리라고 진술했고, 마르크스주의의 틀 내에서 리센코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분자유전학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업적을 남김으로써, 196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고 한때 프랑스공산당 당원이었던 자크모노는 리센코주의에는“과학적 특성이 결코 없으며”그것은,“사회주의사상의 치명적인 쇠퇴”라고  비판했다.2)

그러면 비과학적이고 반 마르크스주의적인 리센코주의가 어떻게 소련역사에 있어서 중대한 시기에 득세할 수 있었을까?

리센코주의가 득세할 수 있었던 맥락이란 우선 잠깐 언급했던 농업생산력을 증대시켜야 할 절박성과 이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던 ‘춘화처리’를 들 수 있다. 볼셰비키혁명에 이은 친 짜르적 백색군과의 내전과 제국주의 간섭전으로 농촌이 황폐화된 상황의 간난신고(艱難辛苦)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즉 1929년에 (대공항 역시) 시작된 “대단절”, 즉 스탈린의 농업 집단화 프로그램에 리센코주의는 적실성(適實性)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과 중첩되는 맥락은 “새로운 소비에트 형 인간의 창출”3)과 이에 반대하는 것으로 여겨진 신 멘델주의 즉 바이스만-모건주의의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함의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문화(Proletkult)운동과 그것에 대한 레닌의 비판과 관련된, “새로운 유형”의 과학자 형성과 외국인 혐오라는 맥락이었다.


① “새로운 소비에트 형 인간의 창출”

필자와 같이 적쟎은 사람들은 소련에서 획득형질의 유전성이론이 득세했던 원인이 “새로운 소비에트 형 인간의 창출”이라는 소망의 ‘과학적’ 근거를 라마르크의 학설과 리센코주의가 제공해준다고 생각한 것에 있다고 본다. 그런데 획득형질의 유전성이 과학적으로 사실이라면 그런 희망적인 가능성과 함께 절망적인 가능성 역시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J. 헉슬리는 『동서의 유전』(138면)에서 이렇게 썼다. “획득형질이 유전적 구성에 쉽사리 각인되지 않음은 인류에게는 천만다행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게 되면 수 천 년 간 인류의 다수가 살아온 조건, 더러움・질병・영양부족이 판치는 조건으로부터 인류에게는 재앙이 발생했을 것이다.”4)

그렇다면 수천만의 피와 땀으로 건설한 사회,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잉여가치의 착취의 종식, 이것의 귀결로서 계급의 소멸과 국가의 소멸을 지향하는 사회, 역사상 유례없는 새로운 사회적 조건에서의 ‘새로운 인간형의 창출’이라는 가슴 벅찬 희망에 적대적인 것으로 여겨진 바이스만-모건주의의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함의는 무엇인가?

르원틴에 따르면5) 언명(言明) 되지 않는 이데올로기적 가정들에 의존하고 있는, ‘이론적 최소구조’ 그리고 그 구조 위에 건설되면서도 그것에 의해서 논리적으로 수반되는 것은 아닌,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를 구별해야 한다. 멘델적 유전학에 있어서 최소구조는 멘델의 법칙과 바이스만적 원리이다.

바이스만적 원리는 멘델의 법칙으로 묘사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물질적 실체는 환경으로부터 오는 정보에 의해서 지도되고 적응하는 방식으로 변화할 수 없다는 것, 생물의 표현형은 특정한 일련의 내외부적 조건들 속에서 유전자가 행하는 화학적 물질합성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리고 멘델적 유전학의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는 유전자의 ‘잠재력’에 의해서 표현형에 부과되는 ‘한계’라는 개념이 포함되는데 이것이 유전되는 것은 고정불변이라는 것. 즉, 생물은 유전자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생각이다. 바로 이런 생물학적 유전자결정론으로 인해서 멘델적 유전학은 공격받게 되는 데 이런 것을 예견한 학자가 자바도프스키였다(1931).

그는 유전학자들이 백해무익한 우생학적 엘리트주의를 유전학에 주입하고 있는 한편 최초로 라마르크주의의 반진보성을 지적했다. 즉 그것의 논리대로라면 수백 년에 걸친 짐승 같은 생활에 의해서 노동자와 농민은 유전학적으로 열등한 인간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해야할 것은 “새로운 소비에트 형 인간의 창출”과  관련해서 우세한 관점은 라마르크주의적 리센코주의였던 한편, 1920년대 중반에는 우생학적 유전학적 관점 역시 있었다는 것이다. 콜초프와 필립 쳉코는 혁명의 전위였던 하층계급 출신자들로부터는 물론, 인텔리겐챠 출신들로부터도 우수한 인간형들을 육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논의했다.


          


② “새로운 유형”의 과학자 형성과 레닌의 문화혁명 그리고 외국인 혐오

“새로운 소비에트형의 인간창출”과 관련해서 중대한 것이 “새로운 유형”의 인텔리겐챠, 과학자의 형성이었다. 요컨대, 프롤레타리아국가에 상응하는 인텔리겐챠의 계급성 문제였다. 그리고 이 중대한 과제는 러시아혁명의 전개과정 그리고 레닌의 이론과 상황판단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속류화(俗類化:vulgarization), 스탈린주의의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레닌은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은 보다 중요한 유럽 국가들에서 얼마나 빨리 혁명이 성공할 것이냐에 전적으로 좌우된다. 오로지 그곳에서 혁명이 성공한 후에라야 우리는 진지하게 건설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6)라고 생각했다. 러시아혁명의 프로메테우스적 특이성이자 구속조건으로 작용한 산업화 과정에 있는 농업국가적 후진성을 고려할 때 러시아혁명의 성공의 충분조건을 유럽의 선진산업 국가의 혁명이라고 레닌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1918년 독일혁명이 실패하고 내전을 경과하면서 레닌의 생각에 볼셰비키의 당면과제는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 아니라 문명 그리고 독일식 국가자본주의의 강화였다. 이 주제는 리센코주의의 성쇠와 관련해서 소련의 붕괴원인 규명과 관련해서 그리고 필자가 생각하는 문화적 돌연변이라는 과제, 계급의식과 윤리의 문제와 관련해서 대단히 중요하다.

카르멘은7) 혁명의 의의를 인간 사이의 소외와 노동 산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는 것에 둔다. 그가 보기에 레닌은 혁명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두 가지, 첫째 소련의 발전모델로서 선진자본주의, 둘째 당에 위임된 프롤레타리아 정치권력과 일치하는 생산력의 발전을 거론했다. 카르멘이 보기에 레닌의 실책은 이 두 가지의 실현이 사회주의의 최종 승리를 담보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대중의 자발적인 운동으로부터 성장한 노동조합주의적 정치와 경제주의의 한계 그런 운동이 부르주아이데올로기에 종속되고 만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전위당의 역할, 노동자들의 자발적 의식을 사회민주주의, 즉 마르크스주의적 정치의식의 수준으로 높여야 함을 강조했던 레닌이8) “경제주의적” 결정론으로 기울었다는 것은 지극히 역설적인 것이다.

레닌은 “러시아혁명의 난관이란 서구의 계급에 비해서 러시아의 혁명적 노동계급이 시작하기란 훨씬 더 쉽지만 계속하기란 훨씬 더 어렵다는 점이다. 반면에 서구 여러 나라의 경우 혁명을 시작하는 것이 더 어렵다”9)고 판단했다.

그러나 제국주의 간섭전과 내전에서 승리한 후 레닌은 당내 관료주의의 발호를 심히 우려하는 한편 혁명의 미래에 자신감을 가질 것을 강조한다. “러시아의 생산력발전은 사회주의를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수준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고 수하노프를 비록한 제2 인터내셔날의 모든 영웅들이 이 명제를 두고 북을 두드린다. 그들은 이것이 우리의 혁명에 대한 결정적 기준이라고 생각한다.(중략)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10배나 더 노력하도록 격려함으로써 완전히 절망적인 상황이 우리에게 서구 여러 나라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문명에 필요한 근본을 조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회주의 건설에 일정한 문화수준이 필요하다면 우리가 왜 우선 혁명적 방식으로 일정한 문화수준에 다른 나라들을 따라잡기 위해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인가?”10)

레닌의 판단으로는 “이런 낮은 문화수준의 결과란 소비에트가 강령에서는 노동민중의 정치기구이지만 사실은 노동민중을 위하면서도 노동민중 전체의 정치기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선진부분의 정치기구라는 것”이었다.11)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가 남긴 문화 전체를 취해서 그것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의 과학기술 지식과 예술 전체를 취해야 한다.”12)

이것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한 집단이 프롤레트쿨트 였다. 이 집단의 사고방식은 문화가 마르크스주의로 환원될 수 있다는 식이었다. 이에 대해서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그것의 혁명적 변증법”13)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마르크스주의자가 저지를 수 있는 최대의 그리고 가장 비통한 실수는 수백만의 민중이(특히 농민과 수공업자) 순전히 마르크스주의적 교육만을 받음으로써 까막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레닌은 “ ‘전투적 유물론’이 수행해야 할 작업에 있어서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유물론적 성향이 있는 현대 자연과학자들과의 동맹임”을 강조하였다.14)

레닌의 변증법적 프롤레타리아 문화론은 실제로 미국에서 염가 본(paperbacks)이 수지맞은 사업이 되기 훨씬 전에 이미 소련에서 세계의 고전, 과학저작들, 시집, 정치논문들이 수만 부에서 수십만 부씩 염가로 출판되는 것으로 나타났다.15)

이에 반해서 리센코주의는 비변증법적이었고 “전투적 유물론”의 정신과는 거리가 있었다. 소련정부와 당이 대부분의 유전학자들을 비롯해서 보다 학술적인 순수과학자들을 의심했던 것에는 부분적으로 역사적 근거가 있었다. 소련출신의 자연과학자 Z. 메드베데프에 따르면 “연구와 학계의 고참 인사들 대다수는 반 볼셰비키세력을 지원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과장되었지만 1925년에 부하린에 따르면 “10월 혁명의 초창기에 우리에게 넘어온 인텔리는 최악의 부분이었던 반면에 정직한 인텔리의 다수는 우리를 적대시했다.”16)

신경제정책(NEP)의 시대에는 인텔리겐챠와 볼셰비키당과의 관계는 ‘갈등하면서 협력하는’ 관계였다. 관념론자들과 실증주의자들도 집필의 자유를 누렸으며 심지어는 투옥 중인 상태에서도 각종 잡지와 신문들이 출판되었다.

Z. 메드베데프에 따르면 1922년~1928년 기간은 ‘소비에트과학의 황금기’였다.17)  그러나 1929년은 ‘대단절’의 해였다. “귀족적이고 백합 같은 손가락을 가진” 과학의 “성직자들”은 러시아의 “문맹인 농민들(muzhik)의 아들들”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T. 리센코 역시 우크라이나 농부의 아들이었다.

리센코가 득세하게 되는 계기는 1929년 1월에 개최된 레닌그라드대회에서 행한 그의 발언이었다.

“동지들 대답해보십시오. 춘화처리의 전선에서 그것은 항상 계급투쟁과 관계있는 것이 아닙니까? 농민의 귀에 대고 ‘종자에 습기를 가하지 마시오. 그것들을 썩게 만들고 말 것이오’라고(…) 그것은(…) 집단농장의 농부들을 돕는 대신에 부농(Koulaks)과 사보타지를 일으키는 자들이 퍼뜨리는 거짓말이며 그들은 과학계에서 그리고 과학계 너머에서  파괴공작을 일삼고 있습니다. 계급의 적은 그가 학자이건 아니건 여하튼 항상 적인 것입니다.”18)

이 연설에 스탈린은 기립박수를 치며 “잘 합니다, 리센코 동지, 정말 잘 합니다”라고 전적으로 그를 지지했다. 리센코주의자들에게 절호의 기회로 판단된 것은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부하린주의자들” 그리고 나치의 생물학자들의 인종주의적 오류에 대한 캠페인을 스탈린이 개시한 것이다.

이 재판의 검사장 비신스키는 예전에는 멘셰비키였는데 내전 후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그리고 이 재판의 피고들, ‘나치 비밀경찰의 첩자들’에 대한 언론의 공격에 있어서 선봉은 『프라우다』지의  자슬라프스키였는데 그는 1917년 혁명 당시 멘셰비키로서 레닌과 트로츠키를 독일황제 빌헬름 2세의 돈을 받아 간첩행위를 했다고 중상 모략한 자였다.19) 요컨대 이 재판은 추악하기 비할 데 없는, 비극적 재판이었다. 이런 마녀사냥에서 많은 신 멘델주의적, 바이스만-모건주의자들은 ‘도적’으로서 투옥되어 옥사했다.

이 과정에서 희생당한 대표적인 뛰어난 학자가 N.바빌로프였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국제적 유전학자 W. 베이트슨에게 사사했으며 1920년 이래 연구의 폭과 깊이 덕에 레닌의 개인적인 지지와 공감을 받았다. 그 무렵 그는 전통종자를 개량종으로 점진적으로 대체한다는 대담한 계획을 수립,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는 개방적인 학자로서20) 리센코의 최초 작업에 호의적이어서 그 작업을 격려했다.

바빌로프는 1940년 8월 체포되어 대법원 군사법정에서 적과 음모를 꾸민 죄, 영국을 위해서 간첩활동을 한 죄, 농학을 태만히 한 죄, 망명한 백군과 내통한 죄목으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 후 10년형으로 감형되어 1943년 1월 사라토프에서 복역 중에, 이미 1942년 말 런던의 왕립협회 회원으로 결정된 것도 모른 채 사망했다.21)

1946년 처칠이 소련의 ‘철의 장막’을 선언한 것에 이어 A. 즈다노프는 세계가 양대 진영으로 분열되었다는 명제를 제시했다. 1940년대 말 냉전이 격화되면서 소련문화의 전 영역에서 국수주의적 캠페인이 진행되었다. 소련학자들이 외국의 간행물에 협력하는 것, 소련의 과학잡지에 외국어 논문의 게재, 외국인의 과학적 저작에 대한 언급, 이 모든 것이 금지되었다. 리센코는 1947년 『리테라투르나야 가제타』지에 이렇게 썼다.

“부르주아 생물학이 종내 경쟁(La Concurrence Intraspecifique)론에 그런 가치(‘자연의 영원한 법칙’이라는 식-필자)를 부여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자의 과잉 생산 시기에 대다수 민중이 빈곤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인류 전체는 생물학적으로 단일 종에 속한다. 따라서 부르주아 과학은 종내 투쟁을 날조해 내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48년 7~8월에 개최된 소련 농업과학 레닌 아카데미 특별회의 폐막식에 즈음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회의는 멘델-모건주의에 대한 미추린 경향의 완승을 보여주었다. 전위적 생물학은 인류의 천재이신 레닌과 스탈린에 빚을 지고 있다. 위대한 동지이자 과학의 주역, 우리의 수령이자 스승이신 스탈린에게 영광을!”22)

리센코주의자들은 외국과학, 멘델의 법칙과 바이스만-모건주의의 과학적 내용, 철학, 사회적 맥락,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이질적이고 상호 모순된 것으로 보지 않고 단순히 일대일 대응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스탈린의 사망 직전부터 리센코에 대한 비판은 시작되었으나 그는 흐루시초프의 지지를 받았고 그의 실각 후 1965년 주된 공직에서 해임되었다.
(계속됩니다.)


주(註)

1) M. 모랑주, 『분자생물학사』, (파리, 데쿠베르트 출판사, 1994년), 17~214면.
2) 코텍의 책, 118~122면, 138면.
3) 그라햄의 책, 138면.
4) 앞의 책, 463면.
5) 르원틴의 『변증법적 생물학자』, 179~180면.
6) 카갈리츠키,『생각하는 갈대』, 39면에서 재인용.
7) 카르멘 클라우딘-우론도 『레닌과 문화혁명』, (서섹스, 하베스터 출판사, 1977년판), 116~127면.
8) 레닌, 『3권으로 된 레닌선집』, (모스크바, 프로그레스 출판사), 제1권 “무엇을 할 것인가?” 92~234면.
9) 1918년 6월 27일, “모스크바 노조와 공장위원회 제4차 협의회에서의 연설”,『전집』, 제27권, 464면, 카르멘의 책, 20~21면.
10) 1923년 1월 16일, “우리의 혁명”,『3권으로 된 레닌 선집』, 제3권 706~707면.
11) 1919년 3월 19일 “당 강령에 대한 보고서”『전집』, 제29권, 183면, 카르멘의 책 28면에서 재인용.
12) 1919년 3~4월, “소비에트 정부의 성취와 난관”, 『전집』, 제29권, 76면, 카르멘의 책, 25면에서 재인용.
13) 앞의 “우리의 혁명” 『선집』, 제3권, 705면.
14) 앞의 『3권으로 된 선집』 제3권, “전투적 유물론의 중대성에 관하여”, 601면과 603면.
15) 르원틴의 『변증법적 생물학자』, 183면.
16) 카갈리츠키의 앞의 책, 48~49면.
17) 앞의 책, 52~54면.
18) 메드베데프의 『리센코의 영광과 몰락』, 44~45면, 코텍의 책, 40~41면에서 재인용.
19) I. 도이처, 1936년 9월 1일, “모스크바 재판”, 『마르크스주의, 전쟁 그리고 혁명』, (베르소 출판사, 1984년), 3~17면.
20) 코텍의 책, 35~38면. 그라햄의 책, 117~118면.
21) 코텍의 책, 72~73면.
22) 앞의 책, 77~78면, 『유럽』지, (1948년 10월 특별호, 142면), 앞의 책 10면.



1999.2 『현장에서 미래를』

본지는 재야 인문학자 최형록 선생의 양해 아래 그의 에세이를 매주 토요일 시리즈로 싣는다. 에세이는 최 선생의 책 『이 야만의 세계에서 어린시절의 꿈나무를 키워나간다』(도서출판 다올 정문사)에서 옮긴 것으로 그의 철학, 역사, 과학, 정치에 관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다. 최 선생은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사민청 지도위원, 진보평론 편집위원을 지낸 바 있다. ‘모든 노동자의 건강할 권리를 위하여’를 영역했다. [한국인권뉴스]   
    

[관련기사 바로가기] 노동자, 자본가 그리고 문화적 돌연변이 1/3   

[한국인권뉴스]

태그

인권뉴스 , 최형록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인권뉴스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yoonhappy

    메일좀 봅시다

  • 인권뉴스

    한국인권뉴스: 메일(홈피 하단)이나 토론마당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저자 메일은 아직 양해를 구하지 않은 상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