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칼럼] 나도 싸우고 있다

마광수(연세대 교수, 국문학)


지난 1990년 8월에는  연세대학교에서 남북통일을 위한 ‘전민족대회’가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만 여명의 학생들이 8월 13일부터 15일까지 통일기원의 축제마당을 한판 벌인 것이다. 이 모습은 겉으로 보기엔 마냥 즐거운 축제로만 보였다. 기념 티셔츠나 빙과류나 김밥 등을 파는 장터가 서고, 백양로에서는 통일을 주제로 하는 미술 전시회가 열렸다. 노천강당에서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 힘찬 노래들이 계속해서 울려퍼졌다.

나는 젊음에 넘쳐 있는 대학생들이 무척 부럽게 생각되었고, 내가 대학을 다닐 때 노천강당의 집회와 데모에 참여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때의 주된 이슈는 ‘3선개헌 반대’ ‘교련교육 반대’ 등이었는데 무슨 이슈든간에 여러 사람이 모여 노래를 하고 구호를 외치게 되면 웬일인지 눈물이 났던 기억이 난다. 학생시절에 갖게 되는 ‘유토피아니즘’은 센티멘털리즘의 정서와 결합되게 마련인 것 같다. 아직 마음이 순진한 탓인지, 요즘도 나는 학생들의 노래를 들으면 공연히 콧날이 찡해지며 눈물을 글썽거리게 된다.

그날  8월 15일에도 나는 원고를 쓰기 위해 학교에 갔는데, 신촌 로터리부터 통제된 바람에 연구실까지 들어가는 데 무진 애를 먹었다. 학교 안은 벌써 최루탄 연기로 자욱했고 여기저기 쌓여 있는 돌무더기들이 보기에 안쓰러웠다. 가까스로 내 연구실에 도착해 보니 편지가 한 장 문틈에 꽂혀 있었다. 이번 집회에 참석한 어느 전남대학교 학생이 보낸 편지였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마광수 교수님, 교수님은 정말 훌륭한 안목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하고 있습니다. 저도 교수님이 이상의 시 「오감도(烏瞰圖)」를 성적(性的) 상징으로 풀이해논 것을 특히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술은 사회의 발전과 인간의 노동, 그리고 미래의 희망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예술가는 이 사회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민중과 함께 가는 민중 예술가입니다. 자본주의 예술의 다양성 이론에 기초한 교수님의 에로티시즘 문학은 지금 소용이 없다고 봅니다. 계급 대립이 치열해져가고 온갖 억압과 착취가 횡행하는 이 사회에서 에로티시즘을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망발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 편지를 읽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보았다. 그리고 몇 자라도 답장을 쓰고 싶어졌다. 그러나 학생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편지를 보낼 수가 없어서, 지면을 통해 몇 자 적어보기로 했다.

“물론 학생의 말은 옳다. 인간사회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부조리와 모순, 그리고 억압으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민주화’든 ‘자유화’든 어떤 형태로든지 개혁이 필요하고, 또 그래서 지금 개혁이 진행돼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진짜 민주화된 사회, 억압과 착취가 없어진 사회를 이룩하려면 다양한 방면에서의 투쟁과 개선이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한 가지 문제를 집중적으로 개혁한 뒤 그 다음에 다른 것을 개혁해 나가야 더 효율적이라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사회가 원체 다원화되고 복잡한 사회이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이라는 동물이 워낙 착잡하고 복합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의 건설을 위해서는 다양성과 융통성에 기초하는 분업(分業) 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에로티시즘을 중심으로 한 인간심리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이유는, 내가 부르주아 예술가로서 안주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나는 ‘고루한 의식’과 ‘비민주적 고정관념’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것이다. 나는 ‘빵의 평등’ 못지않게 ‘사랑의 평등’ 역시 중요한 문제이고, 외형상의 민주화만이 아니라 진짜 ‘의식의 민주화’를 이룩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개혁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특히 ‘개방적 사고’에 기초하는 ‘다양한 개성의 인정’과 ‘표현의 자유 보장’ 없이는, 이 사회의 갈등요인을 근본적으로 척결할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조선조식 봉건윤리야말로 독재 이데올로기를 정당화시키는 원흉이기 때문에,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라도 봉건윤리를 척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게 편지를 보낸 학생 못지않게 여러 가지 형태로 싸워나가고 있다. 어느새 나는 ‘야한 싸움꾼’이 되어 버렸다.”

(1990, 마광수 에세이집 <열려라, 참깨> 중에서)


[쿨까당] 에서 여성부에 대한 마광수의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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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권뉴스는 ‘성해방운동’ 실천의 일환으로, 그동안 선진적인 성담론을 주장하다 보수수구세력은 물론 그를 이해하지 못한 진보진영에게도 외면당한 채 제도 권력으로부터 고초를 겪은 바 있는 마광수 교수(홈페이지)와 '웹2.0' 교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의 철학적 세계관이 유교적 성문화에 침윤된 한국사회에 있어 표현의 자유와 진보적 성담론의 공론화로 변혁의 한 축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기사에 대한 반론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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