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칼럼] 성적 억압이 파시즘 부른다

마광수(연세대 교수, 국문학)

사랑과 섹스와 아름다움

서양에 비하면 동양에서는 성(性)을 죄악시하지도 않았고, 그에 대한 논의도 개방되어 있었던 편이다. 특히 전통적 한방이론에서는 음(陰)을 양(陽)보다도 더 중요시한다. 생식을 주관하는 신(腎)의 기(氣)가 생명유지의 원동력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또 경락의 분포를 보아도 신(腎)의 지배를 받는 방광 경락이 전체 경락의 60 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에, 동양에서는 성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보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동양철학의 기반에서 나는 지금까지 억압된 성의 해방을 주장했던 것이지, 단순한 프로이트주의자로서 무조건적 서양숭배 사조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성 개방 풍조는 진정한 의미의 개방이 아니라, ‘은폐된 개방’, 즉 이중구조를 가진 개방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이것은 미국 사회의 이중구조를 뒤쫓는 것으로서, 겉으로는 근엄한 도덕주의를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음성적으로 온갖 매춘과 음란, 퇴폐 문화가 판을 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중구조의 해체가, 내가 진정 바라는 성 해방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 해방 이전에 ‘느낌으로서의 해방’ ‘관능적 상상력의 해방’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상상력마저 비난의 대상이 된다면 우리의 정신은 완전한 질식상태에 빠져, 오래 굶다 못해 도둑질하게 되는 식으로 파행적이고 자포자기적인 성적(性的) 일탈행위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일단 ‘개방’하고 나서 ‘관리’를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본다. 우리나라는 개방도 안 하고 관리도 안 한다. 그러니 모든 것을 ‘숨어서 잘해 봐라’는 식이다. 걸리면 병신이고 재수가 없는 것이다. 정말 눈 가리고 아옹이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사회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인류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모든 종교의 교리와 모든 성인(聖人)이 주장한 게 결국 ‘사랑’인 셈인데, 왜 지금 이 세상이 사랑으로 가득 찬 곳이 되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도 여기에 그 원인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사랑을 정신적인 것만으로 받아들인 게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그러나 이를테면 예수의 사랑은 절대 정신적이기만 한 사랑이 아니었다. 성경을 보더라도 예수는 ‘터치(touch)’를 무척 많이 하는 걸 알 수 있다. 또 하느님이 인간을 빚어 낸 뒤 ‘땅끝까지 충만하라’고 했다는 것은 바로 성을 전제로 한 말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이런 기독교가 바울에 의해 정신편향으로 왜곡되고,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되어 정치와 결탁하게 되면서 ‘사랑’ 자체가 왜곡되기 시작한 것이다. 말하자면 성을 민중을 억압,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랑은 정신과 육체가 하나일 때 실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처럼 육체적 사랑에 대하여 죄의식을 가질 때, 성에 대한 굶주림이 생기고, 그 성적(性的) 기아증의 대리적 보상행위로서 정신적 명분을 핑계로 한 종교전쟁 같은 집단적 사디즘의 형태가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만이 아니라 성이 거기에 당연히 포함된, 불구적 사랑이 아닌 총체적 사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런 사랑에는 반드시 아름다움의 요소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아름다움이란 사실 1차적으로는 이성에게 성적으로 어필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마음도 평화롭게 해줄 수 있다는 데 아름다움의 무궁한 효용이 있다.

아름다움을 나 자신에 대한 ‘건강한’ 나르시시즘으로 느끼면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전 세계에도 평화가 올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를 ‘유미주의자’라고 공격하는 이들은 유미주의의 긍정적 효용가치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요즘의 우리나라처럼 모든 게 핏발 선 투쟁 일변도로만 나갈 때, 유미주의는 거기에 대한 하나의 처방으로 선용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내가 빌헬름 라이히와 오스카 와일드 그리고 화이어스톤 같은 사람들의 생각으로부터 영향받은 것인데, 그들의 주장을 종합하면 관능적 즐거움과 아름다움에의 욕구가 차단되게 되면 성적(性的) 억압에 기인한 성적(性的) 울분이 집단적으로 폭발하여 그 대리적 보상행위로서 파시즘이나 민족중심주의 등의 테러리즘이 탄생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평범한 일상생활에서도 늘 경험하게 되는 일이다. 사랑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공연히 신경질을 부리게 된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부모에게 사랑(말로만의 사랑이 아니라 살갗접촉을 수반하는)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 아이는 문제아가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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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권뉴스는 ‘성해방운동’ 실천의 일환으로, 그동안 선진적인 성담론을 주장하다 보수수구세력은 물론 그를 이해하지 못한 진보진영에게도 외면당한 채 제도 권력으로부터 고초를 겪은 바 있는 마광수 교수(홈페이지)와 '웹2.0' 교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의 철학적 세계관이 유교적 성문화에 침윤된 한국사회에 있어 표현의 자유와 진보적 성담론의 공론화로 변혁의 한 축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기사에 대한 반론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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