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칼럼] 사랑의 물리적 속성

마광수(연세대 교수, 국문학)



노래에서나, 시에서나, 소설에서나, 드라마에서나, 온통 사랑 타령뿐이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극한적인 기아 상태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사랑에 대한 굶주림과 갈망으로 한평생을 보내게 된다. 그것이 정신적 사랑이든 육체적 사랑이든, 별 상관이 없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으로든, 청춘 남녀의 불붙는 듯 뜨거운 열정으로든, 나이 많은 부부들끼리 갖게 되는 끈끈한 정으로든, 또는 신에게 바치는 거룩한 사랑으로든, 어떤 형태의 사랑으로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연소시켜 나가야 한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도 사랑에 따른 갖가지 문제와 고뇌들이 생겨나는 것일까. 수없이 많은 현인, 철학자, 예술가들이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 그토록 많이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울고 사랑 때문에 죽으며, 사랑을 미움으로 바꾸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왜 점점 더 늘어나고만 있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가, 아직도 우리가 사랑의 실체와 사랑을 획득하는 방법에 대해서 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대해 수없이 많은 논의와 분석이 행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회에서 사랑 때문에 빚어지는 갖가지 갈등과 비극이 계속되는 것은, 우선 사랑을 '성애(性愛)'와 무언가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디 때문이다. '사랑' 하면 무언가 숭고하고 정신적인 것이요, '성(性)' 하면 무언가 더럽고 음습한 것으로 생각하도록 우리는 길들여져왔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는 '성 해방'은 고사하고 '성에 대한 논의'의 해방조차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수없이 많이 쏟아져 나오는 소설, 수필, 시들이 연달아 사랑을 외쳐대고 있는데도, 우리는 사랑을 막연하고 비구체적(非具體的)인 '낭만적 환상' 정도로만 생각할 뿐, 그 실제적 응용의 면에 있어서는 전혀 무지한 상태에 있다.

사랑은 절대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음직스러운 것도 아니다. 사랑은 지극히 변덕스럽고, 이기적인 욕심 덩어리이며, 생존경쟁과 양육강식의 장(場)인 이 세상에서 우리를 겨우 지탱해주는 실존(實存) 그 자체일 뿐이다.

도덕이나 연민 같은 이성적 윤리나 당위(當爲)의 문제가 사랑에는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 우리는 한평생 사랑을 찾아 게걸스럽게 헤매다니며 싸워나가야만 한다. 사랑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녀간의 성애(性愛)로서의 사랑'이 갖는 기본적 성격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음(陰)과 양(陽)을 만물의 구성원리와 운행원리로 본 음양오행설의 입장으로 볼 때, 남자는 양이요 여자는 음이다. 양의 대표적 상징물로 하늘, 남성, 밝음을 들 수 있고, 음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땅, 여성, 어둠을 들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남녀간의 사랑은 우주를 지탱해가는 가장 기본적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음양이론을 기본적 세계관으로 삼아 생활해 왔던 동양인들에게 있어서는, 그래서 성의 억압의 역사가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서양의 중세기 암흑시대에는 갖가지 성적(性的) 억압과 편견이 난무했었는데, 그 까닭은 서양인들이 음. 양 상대성의 이론을 아직 체질화시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양이론에 따른다면, 인간의 가장 기본적 욕구인 식욕조차도 성적(性的) 결합에 의하여 충족된다. 소가 암. 수의 결합을 하지 않는다면 송아지를 낳지 않을 것이고, 벼가 자웅교배를 하지 않는다면 쌀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욕이 식욕보다 더 중요하고, 성욕으로 대표되는 음양의 화합력이 만물을 지탱해나간다고 볼 수 있다.

음양이론과 함께 오행설(五行說)도 중요한데, 오행 이론에 따른다면 양의 대표적 상징물이 불(火)이고 음의 대표적인 상징물이 물(水)이다. 남녀의 사랑, 특히 성적 결합을 생각해볼 때, 남자는 불, 여자는 물이므로 남녀의 결합은 '물과 불의 만남'으로 풀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과 불의 성질을 분석해 봄으로써 사랑의 메커니즘을 추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남자가 먼저 불을 당긴다. 꽃이 나비를 따를 수 없듯이, 물이 불을 끌어당길 수는 없다. 불, 즉 남성이 먼저 강력한 저돌성으로 물, 즉 여성을 공략하는 것이다. 여성은 대체로 성감(性感)의 자각 과정이 느리다.

물은 가만히 머물러 있고 싶어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물)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끓어오르려면 불을 필요로 한다. 장작불로 물을 끓여 주어야만 물은 비로소 서서히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남자는 스스로의 에너지를 가지고 불같은 정열로 물을 데운다. 그런데 물이 끓을 때까지는 좋은데 그 뒤가 문제다. 불은 스스로의 에너지를 다 소모해 버려서 완전히 지쳐버리고 만다. 장작을 태우고나니 재만 남아 버리는 식이다.

그러면 물은 어떤가. 물은 끓는 것도 더디지만 식는 것 역시 더디다. 불이 완전히 꺼져버린 뒤에도 물은 계속 뜨거운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한다. 여기에 남녀간의 사랑의 원초적 비극성이 있다. 또한 물과 불은 원래 상극이다[水克火]. 물을 만나면 불은 꺼져버린다. 물로 불을 끌 수는 있지만 불로 물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불은 스스로의 정욕을 못이겨 처음엔 기세 좋게 물을 향해 돌진해 가지만, 그것은 결국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셈이다.

짐승이나 곤충중에는 암놈과 수놈이 정사(情事)를 마치고 나면 수놈이 곧 죽어버리거나, 심지어는 암놈이 수놈을 잡아먹어버리는 경우 (사마귀의 경우) 가 있는데, 이는 바로 '수극화(水克火)의 원리 때문이다. 이 세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여자가 남성을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남성은 처음에 미칠듯이 잘난척하며 불 같은 정열로 여성에게 돌진하지만, 일단 사정(射精)을 해 버리고 나면, 즉 장작을 다 소모해 버리고 나면 그저 축 늘어져 버리고 피곤해질 뿐이다. 그러나 여자는 일단 한번 데워진 물이기 때문에 더욱더 성욕이 불타오른다. 그러고는 지쳐버린 불같은 남성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본다.

또 나이로 보더라도 남성은 20 대에 성욕이 불같이 강하지만 여성은 40 대에 가서야 성욕이 강해지는 것도 같은 이치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갑끼리 결혼을 한다는 것은, 정(情)을 뺀 성애의 면에서만 볼 때는 비극적인 결말을 작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여성은 소위 '늦바람'이 나기 쉽고, 정력이 쇠잔해져 버린 남편을 깔볼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불이 처음엔 잘 타오르지만 한번 꺼져버리면 그만이라는 속성은, 남성이 여성보다 싫증과 권태를 잘 내는 것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남성은 '정복욕'이 강하여 산 꼭대기를 향해 줄기차게 돌진해 올라간다. 그러나 일단 정상을 정복해 버리고 나면 (즉 사정을 하고 나면) 다시 산을 내려오는 수밖에 없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낑낑대고 올라가 봤자 거기서 수십년 사는 등산가가 어디 있나? 그저 깃대나 한대 꽂고 내려올 뿐이지.

여성들은 남자가 산에 올라갈 때, 즉 불을 활활 지피기 시작할 때의 열정에 속아, 그 사람에게 몸을 맡기면 평생을 사랑해 줄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남자는 정복욕을 채우고나면 내가 언제 그랬더냐는 식으로 싹 돌아누워 버린다. 싫증이 나서이기도 하겠지만 그건 핑계고, 사실은 힘이 다 소모되어 기진맥진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사랑의 불을 붙이려면 연료를 재충전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데, 일단 뜨거워진 여성은 그것도 모르고 계속 남자에게 칭얼칭얼 보채대기만 하니, 남성에게는 그 여자가 귀찮고 얄미운 색정(色情) 덩어리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름지기 여성들은 남성의 이러한 '불같은 속성'을 잘 알아서 현명하게 사랑을 요리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옛부터 사랑의 비법을 가르치는 동양의 많은 책들에서는 '접이불루(接而不漏)'의 방법을 남성들에게 권장하였다. 불로 여자를 데우기는 데우되 완전히 100 도까지 되도록 끓이진 말고, 즉 사정(射精)하지는 말고, 그저 40 ~ 50도 정도로만 데워서 서로서로가 즐기라는 것이다.

요샛말로 한다면 '헤비 페팅(heavy petting)'은 자주 하되 '삽입과 사정'에 의한 성교는 되도록이면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일단 100도까지 올라간 여자는 남자가 도저히 컨트롤할 수 없기 때문이다. 40  ~ 50도 정도라면 여자도 빨리 식기 쉽고 남자도 에너지를 과잉으로 소모하지 않게되니, 건강에 좋을 것은 뻔한 이치다.

또 사랑의 행위란 꼭 100도까지 올라가서 빨리 끝내는 것보다는, 서서히 미열을 가지고서 서로를 애무하는, 즉 갖가지 성희(性戱) 위주의 섹스가 훨씬 더 재미있고 운치가 있는 게 사실이다.

흔히 이런 성희들 가운에 좀 비관습적(非貫習的)인 게 있으면 그것을 '변태'라고 하여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변태란 사실 비생식적(非生殖的) 섹스, 즉 삽입과 사정에 의한 섹스 이외의 것을 모두 가리키는 말이므로, 꼭 병적(病的)인 증상을 가리키는 말은 아닌 것이다. '변태적 섹스'를 '개성적 섹스'로 이해하게 될 때, 우리들의 사랑은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다.

물과 불이 상극이면서도 굳이 합쳐지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물론 음양의 결합이 바로 우리의 삶의 궁극적 목표, 즉 '종족 보존'이기 때문이리라. 음양의 결합의 결과는 '자식'이다. 그래서 자식을 돌보라고 여자는 남자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남성이므로 남성 편에 서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음양의 결합은 곧 '죽음'이라고. 그러므로 남성들은 물을 가지고 놀긴 놀되 우리의 생명을 해칠 만큼의 열정을 기울일 필요는 없다.

또 여성 쪽에서 보더라도 남자가 빨리 죽어버린다면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 서서히 남성을 '이용하여' 성애를 즐기기 위해서라도, 여성들은 남자의 정력이나 사정의 횟수로만 남성의 가치를 평가하지 말고, 남성이 갖고 있는 '서서히 불 땔 줄 아는 기술' 즉, 성적 상상력과 애무의 테크닉의 정도에 따라 남성의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

사랑의 욕화(慾火)에 따른 정복욕에 신음하며 안달하는 남성들은 한시바삐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마찬가지로 성적 오르가즘에만 집착하는 여성들 역시 꿈을 깨야 한다.

사랑은 이렇듯 음. 양 두 상극의 만남으로 비롯되는 격렬한 투쟁의 장(場)이다. 따라서 우리가 아름다운 사랑, 아름다운 성애를 이루기 위해서는 여성 정복욕에 의한 소유욕으로서의 사랑이나, 남자에게 완전히 정복당함으로써 얻어지는 이기적 마조히즘으로서의 사랑으로부터 탈피할 필요가 있다.

짝사랑이 더 감미롭고, 이별의 순간이 더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그것이 다 미완(未完)의 사랑이기 때문이고 서서히 데워지는 미열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남녀 간의 투쟁으로서의 사랑이 되어서는 안 된다. 따먹고 따먹히는 사랑이어서는 안 된다. 또 '결혼'을 종착점으로 하는 소유와 결박으로서의 사랑이어서도 안 된다.

사랑은 '서로 즐기는 사랑'이 되어야하고 서로의 관능을 자극하여 각자의 '생명의 약동'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의 뿌리가 정신이 아닌 '육체'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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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권뉴스는 ‘성해방운동’ 실천의 일환으로, 그동안 선진적인 성담론을 주장하다 보수수구세력은 물론 그를 이해하지 못한 진보진영에게도 외면당한 채 제도 권력으로부터 고초를 겪은 바 있는 마광수 교수(홈페이지)와 '웹2.0' 교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의 철학적 세계관이 유교적 성문화에 침윤된 한국사회에 있어 표현의 자유와 진보적 성담론의 공론화로 변혁의 한 축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기사에 대한 반론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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