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스탈린주의에 대한 여러 이론들 (1)

월터 다움(Walter Daum), 최형록 번역

[서문]
소련을 창조한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은 우리 시대에 결정적 사건이었다. 최초로 근대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전 세계 피착취 피억압 민중을 위한 사회주의 혁명의 깃발을 들었다. 인간의 타락을 끝장낼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증명되었다. 사회주의자라면 이 노동계급의 기념비적인 업적을 파괴하려는 온갖 시도에 맞서야 할 책임이 있다.

1917년 이래로 사람들은 “러시아 문제”, 즉 소련의 계급적 성격을 두고 열띤 논쟁을 벌여왔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하자. 혁명 직후 소련은 노동자 국가로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사회였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많은 자본주의적 잔재를 짊어지고 있는 사회였다는 점이다. 갓 태어난 노동자 국가는 이런 장애물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데 특히 다른 나라의 혁명이 모두 실패함으로써 고립되었으며 또한 후진적이던 러시아에 이것은 커다란 부담이었다.

혁명 직후에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는 급속히 퇴화했다. 노동자들은 얻은 것을 빼앗겼고 국제 혁명은 저지당하고 패했다. 1920년대 중엽에 이미 소련은 관료주의적으로 퇴행한 노동자 국가가 되었고 세계 혁명 정당은-공산주의 인터내셔널-반혁명적으로 변했다. 스탈린주의는 국내외에서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을 방해함으로써 소련이 자본주의로 되돌아가는 길을 터주고 말았다.

* 이글은 월터 다움(Walter Daum)의 책『스탈린주의의 삶과 죽음 :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부활』(The Life & Death of Stalinism : A Resurrection of Marxist Theory) 가운데「서문: 스탈린주의에 대한 여러 이론들」(Introduction : Theories of Stalinism)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미국의 혁명당동맹(the League for the Revolutionary Party : LRP)의 견해인 트로츠키주의적 입장에서 쓴 것이다.         - 편집자 주

월터 다움(Walter Daum) : 저자는 1939년을 기점으로 소련이 반혁명으로 돌아섰다고 보는 ‘자칭’ 트로츠키주의자이다. 이 글에는 저자의 이런 관점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본 연구소의 입장과 상관없이, 이 글은 <소련사회 성격을 둘러싼 논쟁>을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기에 싣게 되었다. 앞으로 이와 관련한 논쟁이 벌어졌으면 한다.                                         - 편집자 주



스탈린주의를 사회주의로 치장한 자본주의로 보는 견해

블라디미르 레닌과 함께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던 레온 트로츠키는 1930년대 중엽에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복원하고 사회주의 성과를 보존하기 위한 “정치혁명”을 옹호하였다. 1930년 말 그는 반혁명적 스탈린주의 때문에 소련에서 자본주의가 복원되기 직전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노동자 국가가 아무리 왜곡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노동자 계급이 그러한 국가에 무조건 충성하고 자본주의 열강의 공격에 맞서 국가를 방어해야 할 정도로 노동자 국가는 가치가 있었다.

우리는 1939년까지는 트로츠키의 이러한 전망에 동의한다. 하지만 우리는 반혁명이 제2차 세계대전 전야에 절정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반혁명으로 인해 국가기구가 변형되고 볼셰비키 당이 파괴됨으로써 새로운 지배계급이 형성되었다. 트로츠키가 내다본 것과 달리 자본주의는 완전히 부활하였다. 잘 알려진 스탈린주의의 중앙집권화는 국유재산을 효과적으로 분산하는 작업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러한 국유재산을 분산하는 조치는 오늘날 분명히 볼 수 있는 “시장”과 무정부상태의 선구적 작업이었다.

그때부터 스탈린주의적 사회들은 가장 근본적인 뜻에서 자본주의 사회였다. 그런 사회들의 기초는 프롤레타리아트와는 성질이 다른 지배계급에 의한 임금노동의 착취다. 이런 쇠퇴의 시대에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은 부르주아의 전통적 규범에서 보더라도 어디에서나 왜곡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스탈린주의가 통치하고 있는 사회주의만큼 왜곡된 곳은 없다. 스탈린주의적 사회들에서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은 반혁명이 빼앗아간 노동자 국가의 사회주의 잔재를 통해 더욱 뒤틀어 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스탈린주의 소련은 자본주의의 생존에 몸을 바치는 세계적인 강대국이 되었다. 소련은 수백만 명을 자신의 발밑에 두었다. 더욱이 지배적인 서방 제국주의자들을 위하여 소련은 유럽에서는 노동자 혁명을 분쇄하고 식민지에서는 민족해방투쟁을 배반했다. 이렇게 노동계급이 전 세계에서 패배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부의 노예인 빈곤과 풍요속의 굶주림으로 가득 찬 세계에 살게 되었다. 한때 자본주의의 착취는 거의 사멸해가는 것으로 보였지만, 이제 곳곳에서 도전할 수 없는 삶의 현실로 간주된다. 엄청난 생산력은 인간에게 쓸모 있는 크나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지배 아래 생산력은 줄곧 빈곤화와 생태계의 파멸 그리고 핵전쟁을 불러오는 조짐이었다.

몇 십 년 동안 소련과 그 위성국들은 국제 사회에서 버려진 자식들이었다. 그 나라들이 노동자들을 얼마나 착취하든, 제국주의의 안정을 돕든 상관없이 전 세계 부르주아지는 소련과 그 위성국들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들의 사회주의적 주장과 재산의 국유화, 그리고 소련의 프롤레타리아적 역사 이 모든 것들은 부르주아의 불신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도 1956년 폴란드의 노동자 평의회와 헝가리 혁명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스탈린주의 세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망이 보이면 언제나 서방당국은 증오심을 가라앉히고 개혁과 안정을 요구하였지 위협당하고 있는 스탈린주의 체제의 전복을 요구하지 않았다. 결정적 시기에는 계급이 말한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우리의 분석은 모든 그럴듯한 마르크스주의 이론들과 대조를 이룬다. 이 이론들은 네 가지 범주로 나뉜다. 스탈린주의 국가들은 1)사회주의적이라는 견해, 2)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국가(노동자 국가)라는 견해, 3)국가자본주의라는 견해, 4)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에 적대적인 제3의 체제라는 견해이다. 이런 분류는 단지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범주들 사이의 논쟁만큼이나 중요한 논쟁이 4개의 범주 각기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범주 내에 속하는 이론가들도 종종 견해를 달리한다. 보기를 들면 언제 소련이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전환되었는지, 소련과 같은 성격 규정이 소련형의 모든 국가들에게도 적용되는지 여부를 둘러싸고 의견을 달리한다.

우리는 러시아 문제에 대한 논쟁이 얼핏 보기에는 광범위해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협소한 것임을 보여줄 것이다. 표면적인 차이가 있긴 하지만 네 가지 이론은 공동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그 이론들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인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탈린주의가 자본주의체제라고 주장하지만, 근본적으로 국가자본주의의 관례적인 분석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가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바로 그 이유에서 우리는 러시아를 여전히 타락한 노동자 국가로 보는 “정통 트로츠키주의”의 태도도 거부한다. 우리는 네 가지 범주를 차례로 거론할 것이다.


스탈린주의를 사회주의로 바라보는 이론들

소련 형 국가들이 사회주의라는 생각은 보통 경제가 국유화되었다는 단순한 관찰에 의존하고 있다. 오래 전에 엥겔스는 사회주의를 국가소유와 동일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반박했다.
“하지만 최근 비스마르크가 공업 시설을 국가소유화 하는 것에 찬성한 이래, 일종의 사이비 사회주의가 등장했고, 심지어 여기저기에서 일종의 아부로 전락하여 대놓고 국가소유는 전부 사회주의라고 선언하는 사태가 발생했다.”193)

* 1956년 2월 흐루시초프가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를  비판하자 동유럽 국가 특히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폴란드에서는 1956년 6월 28일 포즈난의 스탈린 주철 공장 노동자들이 정부의 노동정책에 항의하여 시위를 일으켰으나 곧 반정부시위 나아가 반 소련 폭동으로 발전하였다. 폴란드의 반 소련 움직임은 1956년 10월 19일 고물카 전 통일노동자당 제1서기가 당 중앙위원에 복귀하여 친소파인 로코소프스키 원수를 국방장관에서 해임하는 문제로 드러났다. 고물카는 당시 폴란드를 방문한 흐루시초프에게 ‘사회주의의 길은 하나가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소련은 이러한 이탈 움직임이 동유럽 전체에 확산되는 것을 꺼려 고물카의 의견을 들어주면서 신속히 마감한다.

반면 1956년 헝가리 시위는 전혀 다르게 다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헝가리는 정치 경제적으로 완전히 소련에 종속되어 있었다. 헝가리의 정치지도자들은 소련의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헝가리의 경제는 소련의 경제계획에 따라 조정 되었다. 헝가리의 자원은 소련의 생산을 위해 생산되었고, 그나마 불평등한 무역으로 수탈당했다. 이로 인해 헝가리는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한다. 식량도 부족했고, 공장을 가동할 연료도 턱없이 부족했다. 일반 대중들의 불만이 고조되어가자, 소련은 폴란드의 ‘포즈난 항거’와 같은 사태를 우려하여, 헝가리의 오랜 독재자이자 ‘소(小)스탈린’이라 불린 라코시를 제거한다. 하지만 후임자는 라코시의 측근이었던 게뢰였다. 게뢰는 부분적인 양보조치를 강구하였지만 대중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1956년 10월 23일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는 드디어 작가-학생-시민들로 이루어진 대규모 시위가 조직된다.

이들의 첫 번째 요구사항은 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한 독자적인 국가정책을 수립하는 것이다. 특히 이들은 소련과의 관계를 평등의 원리에 기초해서 조절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경제적인 위기 극복을 위한 경제계획의 수정을 원했고, 공장의 운영에 노동자를 참여시킬 것을 요구했다. 또한 임금 수준을 개선하고 생활수준의 향상도 요구했다. 소련은 헝가리 시위를 군대를 투입하여 진압한다.
- 편집자 주


스탈린이 1930년대 중반에 사 기업가들을 제거한 뒤 소련에는 “사회주의”라는 이름이 붙었다. 놀랍게도 소련을 사회주의 국가로 선언한 것은 소련 혁명으로 사회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사회를 지배하는 노동자 국가(또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달성되었다는 초기 볼셰비키의 이해와 모순되었다. 계급 없는 사회로 발전해가는 특정 단계인 사회주의 그 자체는 심지어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일지라도 고립된 나라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후진적이면서 국제적으로 고립된 소련의 경우에 사회주의는 더더욱 있을 수 없었다.

물론 오늘날 소련과 그 동맹국들의 공산당은 그 “사회주의” 명제를 지지하고 있다. 그들의 주된 논지는 재산의 국유화가 자본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생산양식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주의가 지닌 문제가 무엇이든지 두 가지 뜻에서 진보적인 사회로 생각한다. 즉 그 사회는 노동민중의 이해관계를 옹호하고 자본주의가 지닌 것 보다 훨씬 월등한 생산력을 발전시킨다.

소련 형 사회에서는 인간의 의식이 무계획적인 법칙을 지배한다고 한다. 사회적 계획이 자본주의 경제를 지배하는 가치법칙을 통제한다. 자주 거론되는 증거는 이러한 나라들에는 거의 혹은 전혀 실업이 없다는 것, 자본주의의 가난과 비교할만한 대중빈곤이 전혀 없다는 것, 지나친 부의 격차가 전혀 없다는 것, 그리고 경쟁 때문에 노동이 2배로 낭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30년대 사람들은 소련 공업의 확장(소련 노동자들의 권리와 생활수준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을 지적할 수 있고 소련의 공업을 공황에 괴롭힘 당하는 자본주의에 필적할 만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럴 수 없다. 1980년대 초 폴란드 경제의 붕괴는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그 어떤 나라의 경제 붕괴 가운데서도 가장 나쁜 것이었다. 유고슬라비아 경제는 유럽 전체를 실업과 통화팽창 상태에 빠트리고 있다. 소련 지도자들은 그들이 다루어야 하는 경제적 재앙에 대해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스탈린주의 국가들이 기술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서방 자본주의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인류 진보의 새로운 단계를 대표하고 있다는 주장은 전혀 맞지 않다.

1960년대에 몇몇 좌파는 중국의 관료집단이 혁명적 민족주의 투쟁과 동맹하려는 노력을 동정했기 때문에 중국에 사회주의 명제를 적용했다. 하지만 중국을 사회주의라고 부르려면 특히 주의(主意)주의적(volutaristic)이고 반(anti)유물론적인 접근방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혁명 뒤 초창기 소련과 견주어볼 때, 혁명 중국이 제국주의에 의해 훨씬 더 경제적 발전을 저지당했기 때문이다. 지도적인 어떤 이론가는 “현재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결국 생산력 발전의 낮은 수준이 사회적 관계의 사회주의적 전환에 장애물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고 썼다. 사회적 관계의 사회주의적 전환은 통치하는 당의 “올바른 정치노선”으로도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194) 이런 논리대로라면 애초부터 인간의 비참함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아담과 이브가 사과 대신에 붉은 소책자(『모택동 어록』-옮긴이)를 발견하기만 했더라도.

이것과 다른 종류의 “사회주의” 명제는 강단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명제이다. 그들은 유행하는 부르주아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다(혹은 그것에 도전하려는 의지가 없다). 그런 자들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관한 박식한 글들을 쓰면서 사회주의의 “체제”위기를 말한다.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 이론에 대한 이해와 관련해서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조금도 역겨움을 느끼지 않은 채.
스탈린은 처음에 소련이 지닌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부정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선언하면서 소련이 “인민”의 국가라고 선포하였다. 그 용어가 갖는 반 노동계급적인 뜻은 현재 온갖 용도로 확대되고 있다.


스탈린주의를 노동자 국가로 보는 견해

트로츠키가 죽은 뒤 많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소련을 자본주의 부활로 나아가거나 또는 새로운 노동자 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퇴행적인 노동자 국가라는 평가를 형식적으로 유지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뒤 처리가 끝나자, 스탈린주의는 동유럽과 중국, 그 밖의 지역에서 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했다. (내용이 아니라) 껍데기만 트로츠키의 용어를 유지하려는 신 트로츠키주의자들 대부분은 수식 어구를 붙이면서 분명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스탈린주의가 사실은 반혁명적이 아니었다고 에둘러 말했다. 한참 동안 이런 견해의 지도적 이론가는 에른스트 만델 이었다.

산티아고 카리요와 같은 유로코뮤니즘의 지지자들과 모택동주의의 영향을 받은 저자들도 이와 비슷한 태도를 취했다.195) 그들은 스탈린주의 국가들에서 혁명이 일어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다르다. 게다가 그들의 주요 주장도 정교하게 다듬어지지 않았다.

소련을 사회주의로 보는 이론에 반대하면서, 노동자 국가론을 지지한 사람들은 생산수단의 국유화그 자체가 사회주의를 뜻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스탈린주의적 국유화가 그 자체 진보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더 이상 그 경제적 기초를 변모시키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진정한 사회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의 논지를 약화시킨다.

오늘날 그 많은 스탈린주의 체제들이 붕괴하는 것에 비춰 볼 때, 그런 결론은 근거 없는 낙관론임이 드러난다. 더욱이 트로츠키는 결코 그런 결론을 내린 적이 없다. 트로츠키는 후진성과 고립 때문에 소련이 국제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의 법칙에 종속되고 재산을 국유화하였다 하더라도 국내적으로는 가치관계가 적용되었다고 이해했다. 사회화를 이루려면 소련은 자본주의를 능가하는 질적인 경제적 진보를 이루어야만 했다. 오늘날 스탈린주의적 국가들에 전형적인 후진성과 위기는 “사회주의”의 명제만큼이나 “노동자 국가”의 명제를 손상시킨다.

더구나 이 두 이론은 압도적인 모순에 부딪히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스탈린주의의 지배는 군사력의 도움으로 동유럽 전체로 퍼졌다(그리고 중국을 비롯하여 몇몇 나라에서는 무장혁명을 통해서). 이 신생국가들은 대체로 그들 스스로를 “새로운” 민주주의 또는 “인민” 민주주의라고 불렀지만 소비에트 모델을 채택했다. 그들이 주장한 것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로 기운 좀 더 민주적인 자본주의였을 뿐이다.

소련을 노동자 국가로 보는 이론가들 대부분은 이 신생국가들에 “왜곡된” 또는 “관료화한” 노동자 국가로 부르기로 결정했다.196) 그런데 이 국가들은 노동계급의 혁명 없이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스탈린주의자들이 공장을 통제하고 통치하는 평의회를 수립하려는 노동자들의 시도를 분쇄한 뒤 형성되었다.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이든 이런 창조물을 “프롤레타리아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역사를 외면하는 것이다.

스탈린주의 국가들에 프롤레타리아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노동자 국가가 노동자들 자신의 의식적 활동을 통해서만 수립될 수 있다는 마르크스주의의 결론을 냉소적으로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은 오직 프롤레타리아트 그 자신의 과제다.” 또한 신(neo) 트로츠키주의 사상은 노동자의 사회주의 혁명에는 전위당의 지도가 필요하다는 레닌의 가르침을 의문시한다. 권력을 잡자마자 사회주의가 자신들의 목적이었음을 부정한 스탈린주의 정당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으로 충만한 전위라고 결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해방이라는 마르크스의 원리는 결코 추상적인 독단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원리는 자본주의의 분석에서 나온다.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공산주의를 세우려는 투쟁력을 본래부터 지닌 계급을 유기적으로 창출한다. 또 다른 계급에 이런 프롤레타리아적 특징을 부여함으로써 왜곡된 노동자 국가론 자들은 스탈린주의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이해를 거부한다. 우리는 뒤에 그들의 잘못된 사상의 물질적 근거와 실천적 결과를 분석 할 것이다.

(계속됩니다.)




193) 프리드리히 엥겔스(F.Engels), 『공상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Socialism : Utopian and Scientific), 제3부 (1877)

194) 샤를 베텔하임(C. Bettelheim) 『소련에서의 계급투쟁』(Class Struggles in the USSR), 제1권(1974), 42면.

195) 산티아고 카리요(S.Carrillo), 『“유로코뮤니즘”과 국가』(”Eurocommunism" and the State) (1977) ; 필립 코리간(P. Corrigan), 하비 람세이(H. Ramsay) 그리고 데렉 세이여(D. sayer), 『사회주의 건설과 마르크스주의 이론』(Socialist Construction and Marxist Theory) (1978) ; 마이클 골드필드(M. Goldfield)와 멜빈 로텐버그(M. Rothenberg), 『자본주의 재탄생의 신화』(The Myth of Capitalism Reborn) (1980)

196) 예외적인 것이 프랑스의 좌파 가운데 하나인 노동자 투쟁(the French group Lutte Ouvriere : 약칭 LO '트로츠키주의 공산주의 연합‘이라는 정치조직이 기관지)이다. 이들은 러시아가 여전히 노동자 국가인 반면, 다른 스탈린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분류하더라도 왜 비슷한 사회들이 서로 다른 역동성을 지니고 있는가라는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일본의 제4인터내셔널 그룹 역시 소련과 다른 스탈린주의 국가들을 구별한다.



본지는 재야 인문학자 최형록 선생의  철학, 역사, 과학, 정치에 관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는 에세이를 매주 토요일 시리즈로 싣는다. 최 선생은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사민청 지도위원, 진보평론 편집위원을 지낸 바 있다. ‘모든 노동자의 건강할 권리를 위하여’를 영역했다. [한국인권뉴스]

[한국인권뉴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인권뉴스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