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록 에세이] 카이스트, 아인슈타인의 心心山川을 본받으라!

최형록(인문학자)

“나의 삶은 방정식과 정치로 양분 됩니다”  
- 아인시타인 1)

봄의 휘파람에 옥색치마 휘날리는 바다를 연모하는 절벽의 벚나무.
연모의 정을 전해달라는 듯 연분홍 꽃잎들을 숨 돌릴 겨를 없이 절벽 위 나에게
보내옵니다. 봄바람의 부드러운 연두빛 붓질로 산은 찬란한 눈빛을 띱니다.
태양 빛이 거침없이 그려내는 이 경이로운 “살림”의 계절 속에서 “전몰학생 위령비”를 세워야할 일이 20년 전처럼 일어나고 있습니다.
1991년 학교(虐校)의 일방적 등록금 인상에 항의하는 학생들을 백골단과 전경이 강경 진압하는 과정에서 명지대 1학년생 강경대 씨가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지요.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군복 벗은 파쇼정권(노태우 정권)에 대한 “5월 투쟁”이 화톳불처럼 일어났지요.

카이스트의 “연쇄자살” 사태를 접하면서 나는 경쟁논리에 중독된 이기적 개인주의의 비정한 무관심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징벌적 등록금제”는 전투에서 전진하지 않는 병사를 현장 사살하는 잔인함을 연상시킵니다. 미적분을 영어로 진행한 까닭에 로봇영재가 자살하는 일과 같은 반이성적 사태가 “바나나 공화국” 보다 문화적으로 앞선 “오륀쥐 공화국”의 “국격”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학생들의 “연쇄자살” 사태를 “정신자세” 운운하는 서 총장의 心心山川은 국토해양부 장관 정종환의 心心山川과 동류입니다. 死大江 邪業을 진행하고 있는 154곳 중 152곳에서 법정근로 시간을 위법적으로 무시하면서 죽음을 부르는 중노동을 강행한 탓에 금년에만 벌써 11명이 사망한 사태를 보면서도 ‘사대강 공사에서는 사고다운 사고가 몇 건 없었고 인명피해도 대체로 본인들 실수’라고 말했다지요.2) 이들의 心心山川은 “수수(獸秀:짐승성이 뛰어남)” 합니다.

카이스트 학생들의 心心山川은 어떠했을까요? 어느 카이스트 신입생에 따르면3) ‘자살사태로 휴강한다니 애들은 이 틈에 과제나 해야겠다고 하거나 혹은 이참에 푹 쉬겠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런 心心山川은 함께 일해 온 동료나 선배 혹은 후배 노동자가 비정규직이 되어 같은 생산라인에서 같은 노동을 하면서도 많아야 정규직 월급의 50% 내외를 받아가는 현실에 “묵묵히” 일하는 부모-삼촌 세대의 묵언수행(默言修行)과 얼마나 다를까요?

정규직의 직업세습은 그 근본적 성격이라는 점에서 “자본의 노예다운 상황”을 안정적으로 세습하려는 자세입니다. 헌법 제23조에 규정되어 있는 “재산권 행사의 민주적 제약(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한다)”을 파괴하는, 헌정질서 파괴행위의 결과인 비정규직이라는 “상이용사들”을 양산하는 “비열하고 탐욕스런” 자본가 계급의 간접 살인행위에(생활고에 따른 이혼과 자살) 당당하게 저항할 줄 모르는 전봉준의 못난 후예들! 아담 스미스가 <<도덕 감정론>>(1759년, 영조의 치세)에서 자본가 계급을 “비열하고 탐욕스런” 놈들로서 “일반적으로 대중을 속이려들고 심지어는 억압하려는 데 관심이 있다”고(R. Heilbroner, 'The Worldly Philosophers') 비판한 사실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4)

자살은 개인적 선택이기 이전에 사회적인 맥락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카이스트 학생들은 연쇄자살이 “학력전쟁” 상황에서 일어나는 비극임을 직시해야하며 그런 비극이 신자유주의라는 야만적 사회구조의 악을 개조하려는 최소한의 비판정신과 정의로운 행동을 회피하는 한편 오히려 그런 “수수(獸秀)한” 인간들을 사육해내는 구조에 수동적으로, 나아가 비열하게 “적응”하려는 “살풍경한 심심산천” 임을 직시해야합니다.


1. 아인시타인의 반 군국주의와 반권위주의

카이스트 학생들의 총학 의결과정을 보면서 적잖이 실망스러운 중요한 점은 총장이라는 냉혈한의 사톼 안을 압도적으로 지지-통과시키지 않은 일입니다. 그는 연쇄자살 사태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자입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오늘날처럼 이렇게 허약한 이유들 가운데 한 가지는 “책임을 져야할 수컷들”에 단호한 벌을 정정당당하게 내린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민주주의가 굳건한 뿌리를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용서”라는 것은 민주주의의 적과의 타협 혹은 굴종입니다. 이런 결함들을 깊이 성찰하는 데 아인슈타인은 모범을 보여줍니다.

아인슈타인은 우리나라의 중-고에 해당하는 김나지움의 군국주의와 권위주의에 적응하는 비열함과는 단호히 인연을 끊어버리는 용기 있는 청소년 이었지요. 그는 독일 남성은 17세 이전에 이민을 가면 귀국해서 군 복무를 해야 하지 않아도 되는 조항을 알고서는 “부모님들과 상의도 하지 않은 채” 의사의 도움을 받아 김나지움으로부터 해방되어 가족이 사업을 하고 있던 이탈리아로 출국합니다. 아인슈타인은 탐구하고자 하는 호기심을 신성한 것이라고까지 강조하면서 관찰하고 탐구하는 즐거움을 강제와 의무감으로 진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실수임을 지적합니다. 징벌적 등록금제와 본말이 전도된 영어강의의 강행은 면학 분위기를 군국주의적으로 왜곡하는 작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에게 가장 나쁜 것은 학교가 주로 공포, 강제 그리고 인위적 권위라는 방법들로 운영되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은 건전한 정서, 학생들의 진지함과 자신감을 파괴합니다.”

나 자신이 역도(逆盜) 박정희의 독재시대에 초-중-고를 다니면서 바로 이런 군국주의적 권위주의적 교육이 역겨워 학교공부를 거의 한 적이 없으며 “자기 주도적 독서”로 스스로 인격을 형성해왔기에 아인슈타인의 체험에 입각한 이 판단은 바로 나 자신의 판단이기도합니다. 카이스트는 2009년 학교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린 학생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전과가 있습니다.(<경향신문>, 2011-04-11, 30면) 내친 김에 “업무방해”까지 추가했으면 해외토픽 감이 되어 “명문”이 되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생각하건대 학문적 자유란 진리를 탐구해서 출판하며 진리라고 믿는 바를 가르칠 수 있는 권리다. 이 권리는 또한 일종의 의무를 함축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진리라고 인식한 바를 조금이라도 은폐해서는 안 된다는 의무”. 나아가 아인슈타인은 1953년5월16일 브루클린의 교사 프라우엔글라스가 미 상원의 국내 안보 소위원회(당시 McCarthyism의 광풍 속에 하원에는 반 미국적 활동조사 위원회가 있었습니다)에 소환되자 그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면서 이런 결기까지 표명합니다.

“모든 지성인은 .......감옥행과 경제적 파국을 무릅쓸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유신시대 문교부 장관 유기춘이 박정희에게 “개와 말과 같이 (대통령에게) 온몸을 다 바치는 노력을 하겠나이다(犬馬之勞:견마지로)”라고 머리를 조아린 꼴불견이 생각납니다. 오늘도 대통령이나 이 나라의 5적들-재벌, 장성, 장차관, 고위 공무원, 국회의원-에게는 굴종하면서 그들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과 뭇 생명들에게 군림하는 “항문 같은 주둥아리의 자유”에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파는 수컷들은 死대강 邪업과 천안함 사건에서 “견마지로”를 아끼지 않고 있지요.

그런 반면 사대강 사업과 천안함 사건과 관련해서 파시스트적 은폐와 왜곡 그리고 거짓에 대항해서 진상을 폭로하고 과학적으로 검토해서 진실을 알리는 용기를 발휘하고 있는 “운하반대 전국교수모임” 그리고 버지니아 물리학과의 이승헌 교수,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의 서재정 교수, 한국 미래발전 연구원의 박선원 실장 등 지식인들의 “무실역행”(진실에 힘쓰고 그에 기초해서 실천하려 애쓴다)을 대학생들은 본받아야할 것입니다.


2. 아인슈타인의 폭 넓은 독서와 사회주의

오늘날 학문의 혁신은 학제 간(interdisciplinary)을 넘어 원융회통(transdisciplinary:환원주의적인 E. O. Wilson의 통섭과는-Consilience-다른 접근방식으로 여러 분과학문을 가로지르는 접근방식. 원효대사가 실천한 교리적 입장인 圓融會通이 지향하는 바와 상통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을 통한 통합학문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전공인 수학-물리학-천문학에만 매몰되지 않고 폭 넓은 공부를 했습니다.(Peter Galison 외 3인 편집, 'Einstein for the 21st century').

산의 지질학을 수강한 일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괴테의 저작과 세계관, 칸트철학을 수강하는 일은 정 다산의 사상과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소광섭의 <<물리학과 대승기신론>> 참고)를 공부하는 일과 유사합니다. 그는 스위스의 정치와 문화사(그는 취리히 공대생 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선사시대 역시 수강합니다. 한국의 상황에서는 대국굴기(산이 솟구치듯이 국제적으로 일어섬)하는 중국의 정치-경제와 제자백가 사상 그리고 진화 심리학을 학습하는 자세와 통합니다.

나아가 그는 자유경쟁의 사회적 결과, 금융과 주식교환, 통계학과 사 보험, 그리고 국민경제의 토대까지 수강합니다. 아인슈타인이 오늘날의 물리학도라면 첨단 수학을 동원하는 파생상품을 비롯한 금융투기의 사악한 영향, 산지가 7/10에 이르는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동산 투기와 골프장 조성이 민생을 파탄시키는 문제, 사대강 사업과 생태계의 파괴가 미래세대에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성 장애(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와 함께 자연애호 결핍증(Nature Deficit)을 초래하는 현상, 신자유주의와 공기업 사유화가 끼치는 고용 없는 성장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가속화, “양자(quantum)의 모순”과 인간의 자유의지, “비선형적 사고”에 필요한 논리-철학적 문화(Michel Bitbol의 'Theorie Quantique et Sciences Humaines' 그리고 Lucien Seve의 'Emergence, complexite et dialectique' 참고), 노동자 계급의식을 의식하면서 그 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신경과학적 접근을 공부하지 않을까요?

그뿐만 아니라 그는 대학원 과정에서 만난 Solovine과 Habicht와 “아카데미 올림피아”라는 독서클럽을 조직해서 상대성 이론의 수학적 기초인 리만의 기하학, 상대성 이론에 거의 근접했던 앙리 푸엥카레의 <<과학과 가설>>등 수학과 물리학에 관한 책은 물론 그리스 3대 비극작가 중 한 사람인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흄의 <<인간성론>> 그리고 내가 청소년기에 감명을 받기도한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읽고 이웃을 화나게 만들 정도로 밤늦게까지 토론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 밤과 축일에는 실내음악 합주단과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하는 학창생활을 영위합니다.

한국인들은 홍대용이 이미 지적했듯이 “대체로 기운이 치우쳐 있는” 성향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의 분업과 전문화에 따라 “더욱 악화된 생각의 터널효과” 탓에 현실의 전체 실상을 놓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이런 우매함을 장자는 “자기 직업의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라며 자기성찰의 부족과 그 황량함을 개탄합니다. 삶과 과학 전체의 실상을 성찰할 때 비로소 진정 “개성 있는 자유인”의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카이스트의 대학생들은 물론 한국의 대학생들에 비해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강조하고픈 삶의 자세는 “어떤 장소(상황)에 있든 삶의 주인이 되라”(隨處作主:수처작주)는 것입니다. 카이스트의 반이성적 권위주의적 분위기를 학생들 스스로 변화시키려 노력해야하며 그런 실천은 아인슈타인처럼 주 전공을 넘어서는 학습을 통해서 삶의 조건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게 되고 그와 동시에 그런 인식에 입각한 “삶의 의미의 절실함”을 정서적으로 체화하고 실천함으로써 용기와 이성적 자기 확신의 심화를 동반하게 됩니다.

요컨대 대학생들은 일제시대 이래 뿌리내리기 시작한 군국주의적 권위주의가 신자유주의의 세계관을 신봉하는 사회세력에 의해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개성과 창의성”을 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강도질당하고 있음을 “과학적이며 정의로운 열정과 패기”로 직시하고 현실변혁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조성해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그런 진지하고 비판적인 학습을 통해서 반 파시스트적이며 사회주의적 입장을 용기 있게 실천하는 사람들을 지원하고 기탄없이 자신의 입장을 표명합니다. 그는 1949년 5월 미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창간한 월간 Monthly Review에 “왜 사회주의인가(Why Socialism)"를 기고하는데 그 요지는 이렇습니다.(www.marxists.org). 6)

{사회악의 진정한 뿌리는 경제적 무정부상태에, “합법적인 경제적 잉여의 착취”에 있다. 이런 비극적 상황의 유일한 타개책은 “사회주의 경제의 수립”이다. 이와 함께 필수불가결한 것이 교육개혁이다. 그것은 개개인의 능력개발뿐만 아니라 상호부조의 이상을 지향하는 것으로 권력과 성공을 영광시하는 가치관을 대체해야한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개인의 완전한 노예화 역시 진행시킬 수도 있으므로 정치-사회적 난제를 초래하는 관료주의가 뿌리 내리는 사태의 해결이 사회주의에서 중대하다. 현실 위기의 성격은 “이기주의에 갇혀 개인주의적 생존이 행복할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있는 것”이다.  이러한 환상은 학교교육과 언론-출판을 통해서 경제적 자유주의의 “무자비한 무한경쟁”과 “능률” 그리고 이것을 통한 “성공”을 숭배하기에 이른다. 교육의 목표는 “삶의 진정한 의미가 사회에 봉사하는 것임을 천성으로 만드는 것”이다.}

2011년 반인간적이며 비정한 개인주의가 창궐하는 한국사회를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아인슈타인의 사회주의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그의 종교관을 이해해야합니다. 그는 “개인주의라는 감옥”의 극복방안으로 “우주적 종교 감정”을 제시합니다. 7) 그의 종교관은 특히 한국의 개신교와는 전적으로 인연이 없는 것이며 신인동형(神人同形)적 인격신과도 격이 다릅니다. 그의 종교관은 스피노자의 철학에 기초를 둔 것으로서 불교가 자신이 생각하는 종교관에 가장 가까운 종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心心山川이었기에 그는 1929년 1월6일 레닌의 별세 5주년을 맞이하여 이런 심정을 밝힙니다. 9)

“나는 레닌을 한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을 송두리 채 희생하면서 사회정의를 실현시키는 데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바친 한 사람으로서 존경합니다. 그의 방법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인류양심의 수호자들이며 혁신자들이라는 것”.
- D. Rowe 외 2인 편집, 'Einstein on Politics').


3.정의로운 감정이입의 心心山川을 향하여

純其心者(순기심자) 瞢其識(몽기식)  마음이 순수한 자는 식견이 어둡고
富其才者(부기재자) 廧其行(장기행) 재주가 많은 자는 그 행실이 보잘 것 없다. 10)

정조대의 실학자로서 지전설(지동설)을 주창하며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하여 세상을 구제하고자한다”(澄心救世:징심구세)는 뜻을 품고 ”공정한 마음으로 보고 다른 사상을 두루 받아들인다(公觀倂受:공관병수)는 열린 정신을 지니고 살아간 담헌 홍대용이 당대 인간세태를 이렇게 평합니다.(박희병 편역, <<선인들의 공부법>>, 창비).  유리 가가린이 1961년4월12일 발사된 지 57분 된 순간 “지구 지평선을 볼 수 있습니다. 푸른 후광이 아름답습니다” 11) 라고 감격어린 평을 한 이 푸른 행성이 인터넷으로 전자 촌이 되고 생명 자체를 조작할 수 있는 경이로운 과학기술 혁명의 시대에도 특히 이 나라의 순진한 민초들은 식견이 어둡고 재주 있는 자들 중 적잖은 놈들이 “합법적 범죄자 놈들”이지요. 한국사회가 백범이 꿈꾸었던 “문화국가”가 되려면 “재주가 뛰어나면서 큰 덕을 지닌”(才勝博德:재승박덕)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늘어나야할 것입니다.

“정말 어려운 일, 모든 시대의 현자들에게 좌절감을 안겨다준 어려운 일은 이랬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가르침을 인간의 감정에 큰 영향을 끼쳐서 개개인 심리에 있는 원초적 힘의 압력을 견뎌낼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A. Calaprice, 'The New Quotable Einstein'). 8) 아인슈타인은 인간의 짐승성의 중력을 벗어나 “사회에 봉사하는 천성”을 교육하는 데 감정이 중요함을 통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감정교육에서 씨앗이랄 수 있는 것이 감정이입(Empathy)입니다. 감정이입을 통해서 피착취자들과 피억압자들의 입장에서 현실을 이해함으로써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동시에 정의감 그리고 불의를 극복하고자하는 용기가 발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감정이입은 용기 있는 자비심의 기초입니다. 감정이입은 “인지적” 감정이입과 “정서적” 감정이입으로 구성됩니다. 13)('New Scientist', 2011-04-09, 32~33면).

인지적 부분은 타인의 정신 상태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며 정서적 부분은 타인의 정신 상태에 감정이 반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연쇄자살에 대한 카이스트 서 총장의 비정함과 死대강 邪업의 희생자들에 대한 정종환의 비정함 그리고 같은 대학공동체 구성원의 죽음에 대한 카이스트 학생들의 상대적 무관심은 바로 이런 “감정이입”이 바람직하게 작용하지 않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자본주의의 반 인간성 나아가 반 생명성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소외(Alienation)된 삶 그리고  만사를 분절적으로, 반 변증법적이고 반 연기론적으로 보는 사고방식(Reification)"의 표현입니다. 그럼으로써 자기중심적 개인주의와 자기애(Narcissism) 그리고 경제 환원론적 사회의식이 만연하게 되며 협력과 공생을 냉소하는 공동체 파괴적 무한경쟁의 강박적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입니다.

최근의 후쿠시마 원전의 비극을 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합니다. 그 중 한 가지는 과학-기술의 혜택은 경제 동물적 인간(Homo Economicus)관과 결탁한 정치권력 그리고 가치관과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는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인류는 역사상 그런 적이 없는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하고서도 경악스런 빈부격차를 방치하고 있으며 지구 생태계 자체의 파국을 스스로 자초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런 심각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진화론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그 뿌리를 내려온 “공격적 경제동물성, 연기적 총체적 실상에 맹목적인 이기주의적이며 사물화된(Reified) 사고방식의 비정함”의 목을 칠 수 있는 “정의로운 감정이입에 기초한 용기, 탐욕과 미움에서 해방되어 ”있는 그대로의 실상 전체를 볼 수 있는(如實知見:여실지견)“ 연기적 사고방식 그리고 협력할 줄 아는 인간성을 발휘하며 그런 인성교육을 심화함으로써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뜻을 공유하고 있는 학자들은 새로운 신경과학의 성과를 진화론적 관점 그리고 성찰하며 자비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철학적 통찰들과 통합적으로 원융하려는 사상적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폭 넓은 식견을 보시(布施)해온 J. Rifkin의 <<감정이입이 충만한 문명>>(The Empathic Civilization), 하버드 대학교의 수학자이자 생물학자인 M. Nowak의 <<비범한 협력자들: 이타주의, 진화,  성공하기 위해서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유>>(Super Cooperators), 탁월한 영장류학자인 F. de Waal의 <<감정이입의 시대>>(The  Age of Empathy)는 그런 사상적 정진들 중 극히 일부입니다.

자본주의라는 이 “더럽고 탁하며 불의스런 세상(汚濁惡世:오탁악세)에서 과학기술자들을 비롯한 사상과 예술의 엘리트들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 엘리트들의 사회적 책임을 모범적으로 실천한 분이 짧게나마 거론한 아인슈타인 박사입니다. 그 분은 ”예, 나는 늙은 혁명가입니다.......정치적으로 나는 여전히 불을 내뿜고 있는 베수비우스 화산입니다“라고 서거하기 약 1년 전 마르지 않는 패기를 보여줍니다. 가장 바람직한 과학자들의 심심산천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닙니까?

카이스트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젊은 과학-기술 학도들은 “방정식의 정치 그리고 정치의 방정식”을 심사숙고해야할 절박한 책임이 있습니다.

약 250년 전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한 분들 중 한 분인 담헌 홍대용의 자세를 ”옛 것을 본 받아 새로움을 창조한다는(法古創新:법고창신)“ 관점에서 받아들인다면 이제껏 내가 주장한 바와 상통하지 않을까요? 14)

“天下之富  不能以淫其志 (천하지부 불능이음기지)
천하의 부도 그의 뜻을 움직이지 못하고
陋巷之優不能以改其樂 (누항지우 불능이개기락)
가난의 근심도 그 학문하는 즐거움을 그만 두게 하지 못하며
天子不敢臣  諸侯不得友(천자불감신 제후부득우)
천자도 감히 그를 신하로 삼지 못하고 제후도 감히 그를 벗으로 삼지 못하며
達而行之卽澤加於四海(달이행지 즉택가어사해)
세상에 나아가 도를 행할 경우 그 혜택이 온 세상에 미치고
退而藏焉 卽道明乎千載(퇴이장언 즉도명호천재)
세상에서 물러나 숨을 경우 그 도가 천년 동안 빛을 발하는 사람이라야
然後乃吾所謂士也(연후내오소위사야)
내가 말하는 선비다.“




1. Jerome, <>(St. Martins, 2002), p. 22.
2. <경향신문>, 2011-04-18 자, 1면.
3.<경향신문>, 2011-04-13 자, 4면.
4. R. Heilbroner, <>(Touchstone Book, 1980년 판)
5. Dudley Herschbach, "Einstein as student", Peter Galison 외 2인 Eds., <>(Princeton u.p., 2008), pp. 217~238.
6. "Why Socialism", Jacque Merleau-Ponty et Francoise Balibar Eds., <>(Paris: Seuil et CNRS, 1991), pp. 181~186.
7. "Religion and Science"(1931-11-11), A. Einstein, <>(C개주 Trade Paperbacks, 1982-1952), pp. 36~40.
8. Alice Calaprice, <>(Princeton U. P., 2005), P. 67. 그리고 “On Education", <>, p. 61.
9. "On the fifth Anniversary of Lenin's Death"(1929-01-06), D. Rowe 외 1인 Eds., <>(Princeton U. P., 2007), P.413.
10. 박희병 편역, <<성인들의 공부법>>(창비, 초판 19쇄, 2008), P.165.
11. "One Minuit with.......Yuri Gagarin", <>(2011-04-09, No.2807), p. 29.
12. 주 1의 책, 68면.
13. “Opinion Interview: The Man who banish evil" by S. Baron-Cohen and L. Else, <>(2011-04-09, pp. 32~33.
14. 주 10의 책, 154면.
15. 주 11의 책, 185면.
16. 주 3의 책, 186면.
17. <<경향신문>>, 2011-04-11 자, 30면.
18. Michel Bitbol, <'Theorie Quantique et Sciences Humaines'>(CNRS Eds., 2009), Lucien Seve, <'Emergence, Complexite, et Dialectique'>(Odile Jacob, 2005) 참고.  


2011-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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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재야 인문학자 최형록 선생의  철학, 역사, 과학, 정치에 관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는 에세이를 매주 토요일 시리즈로 싣는다. 최 선생은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사민청 지도위원, 진보평론 편집위원을 지낸 바 있다. 저서: 이 야만의 세계에서 어린 시절의 꿈나무를 키워나간다, 영역: 모든 노동자의 건강할 권리를 위하여. [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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