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acecinema : <박하사탕>

“이미-그곳에-있었음”들에 대한 7개의 단상

김일란 / 평화인권연대 회원

#Chapter 4 고백. 1987년 4월.

운동권 피의자 박명식이 가혹한 구타와 끔찍한 물고문에 못 이겨 모든 것을 불어

버린다.

이 때 김영호는 그에게 묻는다.

“너 정말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냐?”

“흑흑윽..네에??”

“니가 그렇게 일기장에 썼잖아. 삶은 아름답다구.”

우리보다 조금 앞서 살았던 어떤 사람들의 삶은 우리에게는 바로 ‘역사’이다. 역

사는 공간과 시간의 교차점에서 발생한 “거기에 있었음”이라는 사실적 완강함과

그러한 사실들은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고 해석할 때에만 비로소 의미로 구성된

다는 긴장감을 동시에 내재하고 있다.

역사는 그렇게 이질적이고 우연적이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어떤 필연성들로

가득 차 있는 무규정적인 것이다. 따라서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현재 우리가

점하고 있는 각각의 위치에서 우리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서 역사적 사건들을

부인하거나 파괴하거나 긍정하는 등 새로이 가정(假定)하는 작업이다. 이렇게 가

정(假定)된 역사는 항상 보편 타당한 것일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중

요한 것은 현재의 근원에 대한 성찰 속에서, 스스로의 영토를 확장시켜가며

시선을 구축하고 그것을 통하여 “이곳의 현재”를 보여주려는 일련의 시도라고

생각한다.

<초록 물고기>에 이은 이창동 감독의 두 번째 영화 <박하사탕>은 “이곳의

현재”, 즉 1999년의 남한 사회를 현시하기 위해 시간을 역순으로 배열하여 20

년간의 역사를 환기시키는 매우 잘 만들어진 영화이다. 그러나 앞질러 말하자면,

과거의 시간과 공간으로의 계속되는 회귀는 너무나 인과론적이어서 “이곳의 현

재”를 현시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이 영화는 공간의 지리학 속으로 들어가

과거의 그 장소에 스며들어간 시간의 기억들과 그 기억들이 남겨놓은 흔적과

자취들을 더듬어가고 있다. 그러한 과거로의 시간 여행 속에서, 즉 물리적 시간

의 반대 반향으로 향하여 영화가 도착하는 것은 선명한 역사적 인과율에 대한 것

이다. 그러한 선명한 인과율은 과거의 사실들과 “이곳의 현재”의 여러 가지 지층

들(1999년의 김영호가 죽여야 할 사람이 너무 많은 것처럼 말이다)과의 상관관계

를 드러내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박하사탕>은 1999년 봄 한적한 교외의 야유회에서 시작하여 20년 전인 1979

년 같은 장소에 있을 때까지,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김영호(설경구 분)의 인생사

를 펼쳐 놓고 있다. 20년간의 세월은 모두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999

년 봄에 철도 위에서 자살을 기도하는 모습에서부터(영화는 앞으로 나아가듯

철로를 따라 영호의 과거로 향한다), 증권투자에 실패하고 아내와 이혼한 채

살아가는 1999년의 피폐하고 초라한 모습, 아내의 불륜 현장을 덮치는 반면 정

부와의 관계를 서슴없이 즐기는 돈 잘 버는 가구점 사장이었던 1994년, 고문형

사로서의 악랄한 가학성과 능글맞은 속물적 근성들이 드러나는 1987년, 노조원

에 대한 동정과 초보 고문형사의 갈등이 드러나는 1984년, 그리고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알고 있었던 그가 망가지게 된 원흉으로서의 1980년 광주, 마지막으

로 스무 살 -너무나 순수했던- 1979년 가을이 그것이다.

7개의 장을 거슬러 오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망가진 한

남자의 삶이자, 그 삶의 배면에서 우연적으로 마주치게되는 상처와도 같은 역

사적 사건들, 그리고 그 사건들에 대한 기억들이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 개인의 미시적인 일상을 포개어 놓는 바로 그 부분에서 감독의 섬세하고 탁

월한 솜씨가 돋보인다. 개인사와 역사적 사건들을 역순으로 배치하여 서술하고

자 하는 감독의 의도는, 아마도 이 땅을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누구도 피하지

못한 개인들의 부조리한 인생과 역사적 상처에 대한 공통의 기억들을 재구성하

여 모든 것이 붕괴되기 시작한 지점을 찾아보고자 하는 의지로 읽힌다.

그러므로 7개의 장은 각각의 역사적인 시간과 공간의 교차점들, 즉 “이미-그

곳에-있었음”들에 대한 독립된 상황을 이루고 있으나, 그 교차점들을 전체적으

로 꿰었을 때 그것은 완전히 끝장나 버린 현재의 최종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마지막 장은 한편으로는 역사적 상황들

속으로 우연하게 휘말리게되는 필연적인 운명을 지닌 한 개인이, 그러한 역사

적 인과관계로부터 벗어나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최초의 순간, 첫 사랑의

순수함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노스텔지아적인 욕망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죽은’ 1979년을 무균질의 진공상태로 제시하면서, 20

년간의 역사를 ‘좋은 꿈’으로 만들어, 1999년 현재를 1979년과 같은 하나의 새

로운 출발점으로 상정할 것을 제안하는 듯이 보인다.(7장, 소풍, 1979, 가을/ 1장

에서 죽은 영호가 마치 환생한 듯 순임에게 말을 건넨다. “이곳은 처음인데 왠

지 와본 것 같아요.” “그런 건요, 꿈에서 본 거래요.” “정말, 꿈이었을까요.” “영

호씨, 그 꿈이 좋은 꿈이었으면 좋겠네요.”) 결론적으로 이창동 감독은 첫 사랑

윤순임(문소리 분)의 이미지로 표상되는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던 그 시절,

1979년을 1999년 혹은 2000년의 우리가 다시 시작해야하는 시발점으로 바라보며,

그 순수함 속에서 희망의 가능성을 논하고자 한다.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이 있다. “우리가 지켜야 했고 앞으로 지켜야

할 그것이 왜 순수함이며, 그 순수함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이창동

감독이 답하는 ‘순수함’과 1979년을 ‘순수 0년’이라고 바라보는 것에 대하여 의

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부연하자면, 감독은 김영호라는 한 남자가 잃어버린 순

수함을 찾아가는 과정을 윤순임이라는 여자와의 첫 사랑을 기억해 내는 과정으

로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 남자에게 있어서 첫 사랑을 순수함으로 상징

화하는 것은 성장 소설이나 영화에서 관습화되어 있는 형식이기에 이것의 진부

함은 논외로 한다해도, 이 영화 속의 순수함에 대한 정의는 집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영화 속의 순수함은 군에 가기 전에 존재하는 것, 너무나 깨어

지기 쉬운 아주 상투적인 것인 동시에 그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음과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특권과도 같은 것으로 한국 사회에서만 적용 가능한 것으로 보인

다. ‘아버지가 죽은’ 1979년이 과연 이러한 순수함을 지킬 수 있었던 희망으로 가

득한 역사적 순간이었던가. 1999년, 현재 우리가 상실한 것이 바로 이토록 구태

의연한 순수함이었던가. 김영호라는 인물이 1999년 자살을 결심한 것은 결국 기

억도 제대로 나지 않은 먼 과거 속의 순수함을 상실했기 때문인가. 앞으로 다가

올 시간을 위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도 바로 이러한 순수함인가.

이미 상기하였듯이, 이러한 이유로 <박하사탕>은 한국영화사상 보기 드물게

잘 짜여진 내러티브 속에서 과거로 회귀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이곳의 현재로”

돌아오는데는 실패하였다. 따라서 거꾸로 퇴적되어 가는 시간의 지층 속에서

각각의 역사적 순간들과, 특히 “1979년과 현재와는 어떠한 상관관계 속에서

놓여 있는 것일까”에 대한 이해의 가능성은 점차 희석화되어 버린다. 과거는

어떻게 현재와 소통할 수 있는가? 과거의 지층은 어떻게 현재로 옮겨올 수 있는

가? 이창동 감독은 인과론적 설명 외에는 그다지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가 역사의 무규정성이라는 특성을 이해한다면, 이창동 감독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그저 하나의 시선일 뿐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두 편의 영화를

통한 그의 행보는 이미 우리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도 남을 만한 모습을 보여주

었기에, 앞으로의 그의 궤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그에게 기대하는

바, 우리 역사에 대한 성찰에 있어 그 운신의 폭을 보다 더 넓혀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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