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 본 세상 : Peacecinema
이상한 판칙나라의 ‘피터팬’
김일란 / 평화인권연대 회원
<반칙왕>에 대한 변명
<반칙왕>은 정말 괜찮은 영화다. 억압적 현실에서 소시민으로 산다는 것.
이 어려운 문제를 다루면서도, 무거운 언어와 의미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가볍고
익살스러운 상황으로 보여준다. 웃음과 슬픔의 조우. 그래서일까? 영화를 보면서 얼
핏 찰리 채플린이 떠오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 판단중지를 요구하는 지점이 있었다. 그것은 ‘남성성’의
재현 문제이다. ‘여성-수동-복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묶음만큼, ‘남성-능동-권력
‘도 이분법적으로 스테레오타입화 되어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시각은 주류 사회
(혹은 영화)를 고착화하려는 재현 방식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현 주류 사회를 유지
하려는 강박관념을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성성의 전형화 전략을 탐구하는 것이 양가적이듯이, 남성성 역시 마찬가
지이다. 즉 남성성은 주류 사회를 특권화하는 동시에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균열
과 모순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반칙왕>은 어디에 위치하는 것일까.
시끄러운 세상을 반칙으로 산다.
모든 것은 헤드락(headlock)으로부터 시작된다. 헤드락은 “머리를 조여” 상대방이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레슬링 기술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부지점장(송영창)은 임대
호(송강호)의 머리가 아닌 “목을 죈다”. 그 자체가 반칙이다.
<반칙왕>은 규칙을 압도하는 세상의 ‘반칙’에 대해 또 다른 ‘반칙’으로 맞서는 현
대인을 보여준다.
조직과 규율에 찌들어서, 삶의 의미를 되새기기에는 너무나 지친 현대인. 임대호는
이러한 심약한 현대인을 상징한다. 그는 소심하고 무기력한 은행원으로, ‘때와 장
소를 가리지 않고’ 걸어오는 부지점장의 헤드락을 푸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이다.
임대호는 우연히 들른 프로레슬링 체육관에서 헤드락을 푸는 기술을 배우고자 한
다. 그는 프로레슬러가 되어 ‘간지럽히기’라는 반칙을 통해서 반칙 헤드락을 푸는
한편, 난생 처음 삶의 희열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임대호는 부지점장과의 정면 대결에서 눈에 미끌어지는, 그야말로 어이없
는 이유로 실패하고 만다. 이렇듯 권위와 질서에 대한 <반칙왕>의 비판은 세상
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 없이 끝맺어 진다. 그러나 <반칙왕>은 절망적이지 않다.
마지막 장면은 도심 속을 걸어가는 임대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때 임대호는 이
전의 무기력한 패배자가 아니라 세상을 거슬러 오를 수 있는 힘을 지닌 인물로
보인다. 그래서 남루한 일상은 지속되지만, 암담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예시한다.
왜냐하면 반칙하는 세상에 대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반칙’으로 승부하면 되니까.
얼마나 유쾌한 발상인가!
이상한 반칙 나라의 피터팬
그러나 이토록 재미있는 영화 <반칙왕>을 보고 난 후, 나는 혼란스러웠다.
왜냐하면 “남성의 환타지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쉽게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
다. 환타지는 단순히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허위가 아니라 욕망을 억압하는
사회적 기제와 억압된 욕망의 발현이다. 따라서 남성 환타지는 남성들의 억눌린 욕
망의 구조와 그러한 구조 속에서 남자들이 어떠한 행위를 선택하는가를 드러내는
지표가 된다.
나약한 현대인의 상징인 임대호는 현실에서 일탈하여 자신의 욕망을 분출하는 통로
로서 레슬링을 선택한다. 그래서 그는 사각의 링, 특히 환타지 속의 링에 올랐을
때, 남성으로서 가지고 있는 욕망들을 상연한다. 그는 꿈의 환타지 속에서는 엘비
스 프레슬리이자, 놀라운 테크닉을 지닌 레슬러였다. 그러나 현실이 개입하는 순간
(상대선수가 부지점장임이 밝혀지는 순간), 그는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아무런 힘
을 쓸 수 없는 나약한 남자로 전락하게 된다. 사실상 임대호에게 있어 부지점장은
사회적 위계 질서뿐만 아니라 육체의 범주 속에서도 넘어설 수 없는 존재이다. 신
화화된 남성성을 가장 두드러지게 상징하는 지점은 ‘강한 육체’와 그로 인해 발생
하는 권력, 여성의 소유, 명예 등에 있다. 따라서 강한 육체를 과시하는 스포츠는
남성 세계의 알레고리이며, 남성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영역이다.
그렇다면 <반칙왕>의 남성 환타지는 전통적인 남성성을 복원하고자 하는 주체의
욕망을 표현하는 것일까? 아니면 상징적 질서를 강화되는 과정에서 외면 당한 주체
의 욕망을 회복하는 것일까? 좀 더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기득권을 쥐고 있는 남자
의 엄살’인가 혹은 ‘강한 남자 되기의 두려움’인가 하는 문제이다. 사실 이 두 가지
측면은 거의 이형동체에 가깝다. 단지 <반칙왕>을 어떻게 의미화할 것인가에 대한
해석자의 의지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반칙왕>은 후자에 가깝다.
물론 전자의 혐의도 짙다. 그것은 ’70년대’ 문화에 대한 복고 때문이다. 고도의 산
업성장과 그것을 이끌어낸 박정희 대통령, 프로레슬링과 그 스타들, 도시화, 텔레비
젼의 대중화와 대중문화의 부상…. 이 모든 것을 이룩한 토대에는 ‘강인했던 아버
지’, 즉 임대호의 실제 아버지, 장칠삼, 엘비스 프레슬리, 70년대라는 맥락 속에
희미하게 존재를 드러내는 박정희(70년대 한국에서 프로레슬링의 부상은 박정희
의 개인적인 취향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가 있다. 이 영화는 철저히 가부장적이었던 70년대에 대
한 향수를 담고 있다.(임대호가 영화를 보는 장면에서, “남자 품에 처음 안겨보는
거예요”라는 여성의 화면 바깥(off screen) 보이스가 들린다.
이것은 70년대 최고의 흥행작이자, 멜로드라마의 대표격인 <별들의 고향>으로 추
측된다. 그것도 아직 확인해 보지 못했지만…) 그러나 이제 아버지’들’은 권위를
상실한 채, 과거의 영광 속에서만 존재한다. 임대호는 이렇게 쇠락한 아버지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임대호는 소통에 실패한다. 그것은 아버지 세대의 영화(榮華)가 현실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반칙왕>의 매력이다. 그래서 나는 <반칙왕>에
열심히 손을 들어주려 한다. 앞질러 이야기하자면, 임대호는 반칙하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어른(아버지)되기를 거부하며 ‘울트라 타이거 가면’ 속으로
숨어버린 피터팬이다.
임대호가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보자. 세상은 지금껏 유지해왔던 가부장
적이며 자본주의적 논리를 지탱하려 한다. 그러나 현실 세계는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이미 그 균열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유지해왔던 기존의 논리는
그 균열을 메우기 위해서, 부지점장의 헤드락과 같은 ‘반칙’적인 행위를 통해 자
신의 건재함을 자랑하려 한다. 그래서 소심한 한 ‘남자’는 이중 부과에 시달리게
된다. 즉 이전의 논리를 지탱해온 ‘남성성’을 회복하고픈 욕망과 한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이것의 실체가 과연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이 두 개의 축을 매개하는 것이 가면과 환타지이다. 한 마디로 가
면과 환타지 속에서는 이 두 개의 분리하기 어려운 욕망을 과감히 표현한다. 그
래서 가면과 환타지는 임대호의 잠재해 있는 욕망과 두려움이다. 그러나 가면과 환
타지는 현실 세계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오히려 가면을 쓰고 현실과
대면하려는 임대호의 모습은 그 유약함을 더욱 드러낼 뿐이다. 따라서 임대호는 이
상한 반칙 나라에서 어른으로서 살아가기를 회피하려는 피터팬처럼 보인다. 그러므
로 <반칙왕>에서 재현하고 있는 강한 남성성은 현실 세계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
는 남성성을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에게 있어 불가능한 존재 조건
임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반칙왕>에 대한 또 하나의 변명
난이도가 있는 문제를 풀려고 했으나 실패한 느낌이다. 수준에 맞는 문제선택이 중
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솔직해지자. <반칙왕>을 보았을 때, 문득 <남자는 괴로
워>가 생각이 났다. <남자는 괴로워>는 직장살이의 어려움을 그린 이명세 감독의
영화이다. 직장에 다니는 남자는 고달프다. 위로는 닥달하는 상사가 있고, 늘 경쟁
할 수밖에 없는 동료들이 있고, 현재의 자리를 위협하는 후배들이 있다. 이 불안한
위치에 여자들까지 가세하여 더욱 힘들어진다. 그래서 남자는 괴롭다. <남자는 괴
로워>를 보았을 때, 자기 연민에 빠지며 영화 속 주인공에 동일화할 수많은 남성
직장인들이 떠올랐다. 진정으로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남자들의 엄살’이다. 그
러나 <반칙왕>을 그렇게 매도하기에는 좋은 느낌이 있었다. 더욱 솔직해지자. 난
그 좋은 느낌을 설명하는데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더 추해지기 전에 마무리해야겠
다. 그것도 상투적인 표현으로. “다음에 잘 쓰도록 노력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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