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히코 학생 파업의 본질

[뉴스&레터스(www.newsandletters.org)] 3월호

지난 9개월간 메히코 국립자치대학(UNAM)을 정지시켰던 학생 파업이 2월 6일 연방 경찰의 진압으로 끝이 났다. 총파업위원회 지도부 중 한 명인 에렌디라 테이예스는 구속 이틀만에 풀려난 후 아직까지 감옥 행활을 하고 있거나 도피 중에 있는 동료들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지 위해 미국에 왔다. 고전문학부 학생인 테이예스는 파견 활동의 일환으로 [뉴스&레터스(News & Letters)] 시카고 사무실을 방문했다. 메히코 연대네트워크(MSN)의 편집장인 제이슨 월러치가 통역을 맡아 수고해주었다.

우리가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은 우남에 들이닥친 모든 신자유주의 정책이다. 우리는 전반적인 언론 체제, 커리큘럼, 학생 참여구조 등에 관해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최선의 대학, 모두를 위한 교육, 그리고 이제는 양심수들을 위한 투쟁까지 벌

이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지난 해 2월 11일 우남 총장은 수업료 인상안을 발표했고 학생들은 이 계획이 무엇보다도 불법적인 것이라며 반대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수업료 인상은 무상 교육을 보장하고 있는 메히코 헌법 3조를 위반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정부가 메히코의 법률을 체계적으로 위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단과대별로, 학부별로 항의를 시작했지만 효과적이지 않았고 모든 단과대가 파업을 벌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당국은 협상을 통한 해결을 결코 원하지 않았고 대화를 위한 어떤 노력도 없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파업 참여자들을 계속 공격했다. 학생들이 대화를 원할 때마다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이 때마다 학생들은 국민들과 대화하며 자신들의 투쟁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10달 동안 이를 지속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 대오에는 완전한 규율과 조직이 있었으며 일반 시민들과 모든 문화 영역, 다른 대학, 교직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지역 사회는 자연스럽게 파업에 동참했다. 모든 사람들이 같은 목적을 위해 함께 투쟁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은 자연스러운 길이었고 그들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도혁명당(PRI)이 집권 70년을 맞는 지금, 그들은 어떠한 형태든 간에 자신들이 변화를

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2월 6일 연방 경찰은 우리가 체 게바라 강당이라 불렀던 대학 강당을 급습했다. 아직 270명의 학생들이 감옥에 있으며 운 좋게 구속을 면한 수많은 학생들이 수배상태에 놓여있다. 그래서 우리는 구속된 학생들과 남아 있는 학생들을 살피면서 파업위원회

를 재조직화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번 파업을 각 단과대 내부에서부터 조직을 했기 때문에(우남은 규모가 매우 커서 단과대별로 분화되어 있다) 각각의 단과대별로 파업위원회를 가지고 있었고, 현재도 단과대별로 재조직화를 진행하고 있다.

2월 15일 단과대 학생 집회가 다시 소집되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공부를 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파업의 재건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교수들은 동료들이 감옥에 있는 현실에서 학생들이 공부를 계속하는 사치를 누리려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의 이런 활동에 대해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노동조합들이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며 놀랄만한 극도의 빈곤 상태에 놓여있는 농민조직들도 우리의 투쟁을 지원하고 있다. 2월 9일 학생 파업을 지지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이 시위에는 20만 명의 시민, 노동자, 학생, 농민이 참여했다.

학부모들은 주요 지지였다. 대다수의 학부모가 68년 당시 자신들의 동지였던 수많은 학생들이 학살당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아무도 이러한 학살이 반복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이번 투쟁의 과정에서 구속된 학생들을 기꺼이 지원하고

있다.

사실 1968년 이후 경찰은 대학에 두 번 진입했는데, 첫 번째는 1977년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대학내 노동자들의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가 이번 우남 학생 파업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첫 번째 경우, 경찰은 교직원 파업이 두 달간 지속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대학에 난입했다. 그 파업은 시설관리 노동자, 비서, 건물 청소원, 정원 관리사 등이 조직되어 있는 STUNAM에 의해 조직된 것이었다.

우리는 정부가 학생들의 어떠한 사상이나 운동이든 탄압하고, 파괴하려 한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에 강해질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번 상황의 진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와 일반적인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임을 정부에 보여주기 위해 이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학생들이 단지 자신들의 권리뿐만 아니라 세로 우에코와 같은 메히코 전역에 있는 양심수들에 대한 지지 투쟁도 함께 전개하고 있는 이유이다.

사파티스타, 그리고 다른 조직들과의 연대

우리는 자유와 정의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다. 12월 11일 우리는 행진 시위를 벌였는 데 시위 내용 중 하나는 무미아 아부자말의 석방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모든 메히코 사람들에게 큰 의미를 갖는 날이었다.

우리는 시애틀 시위의 10일 후인 12월 11일의 집회를 통해 시애틀 시위에 응답했다. 파업 참여자들은 미국 대사관으로 몰려갔다. 이 시위의 내용 중 큰 부분은 무미아 아부자말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행진을 하는 것이었고 또한 시위 참여자들은 시애틀

정신에 입각해 WTO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했다.

94년부터 나는 사파티스타와의 연대 운동에 관여해왔고 많은 고등학생들과 중학생들이 사파티스타 운동을 지지하고 있다. 파업이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언제나 모임을 가졌고 우리는 파업의 출발을 도왔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우리는 또한 결국 파업위원회로 전화한 학생 조직이 출범하는 과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사파티스타와 우남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메히코의 권력 체제를 알아야만 한다. 정부는 우남과 사파티스타 양자 모두의 문제 해결을 계속 회피하려 했다. 그들은 1996년 2월부터 치아파스에서 채택된 산안드레아스 협정을 무시하는 동일한 방식으로 12월 10일 파업위원회(CGH)와의 협상 내용도 무시하고 있다.

우리는 성장했고, 10달 동안 수업을 받아 성장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이 성장했다. 우리는 우리의 직접적인 경험에 관해서는 물론이고 메히코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양심수 문제나 원주민에 대한 탄압 등의 다른 문제에 관해서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의 정치적 전망은 매우 달라졌다. 모든 정당들이 정치적 체제 속에 침몰되어 있고, 이 전반적인 체제가 변화되어야 하지만 정당들은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않을 것이다.

조직화가 낳고 있는 새로운 성과들

이번 파업은 처음부터 사파티스타의 조직 방식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 운동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평등했고 평등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지도부 또한 수평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이 운동은 한 사람에 의해서 주도되지 않는다. 이 운동은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활동을 통해 이루어졌다.

우리 모두가 대통령과 협상하지 않지만 우리 모두는 서로서로를 위해 같은 음식을 요리하고 있다. 우리는 지적인 일과 육체적인 일 모두를 공평히 나누어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을 관철시키려 했다. 우리는 남성이 제안했는지, 여성이 제안했는지는 개의치 않는다. 우리는 최고의 아이디어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이번 파업에 있어서 훌륭했던 것 중 하나이다.

과거에는 각각의 파업마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많은 차별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번 파업에서 우리는 이러한 전통을 과감히 깨나갔다. 이 체제는 효율적인 것에 중심을 둔 민주주의 기제에 반대한다. 우리는 정부가 가지고 있는 억압의 유형과 정부 구조의 유형들이 불필요하며, 현 체제와는 다른 어떤 것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파업과 함께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지에 대한 진실을 말하기 위해 우리는 여기에 왔다. 물론 우리는 감옥에 있는 우리의 동료들에게 지원을 해주기를 바란다. 국제 사회가 그들의 석방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의와 민주주의를 믿는 모든 사람들과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관심을 불러일으키길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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