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ACE MAKER
평·화·칼·럼
易地思之의 평화사상
김상철 / 평화인권연대 회원
사람은 간사하다. 비록 본성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살아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솔직한 느낌이다. 단적으로 동일한 맥락을 가지고 있는 사건이나 일에 대해 우리는 매우 다른, 어떤 때에는 정반대의 행동을 취하는 이율배반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뭐 단적으로 길을 가다가 같이 가는 이가 돈을 주울 경우하고, 내가 돈을 주울 경우를 생각해보아도 내 마음의 변화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간사함이 비단 행동에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고 나름대로 정리하여, 머리 속에 있는 각각의 폴더에 저장할 때에도 그러한 간사함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 그럼 다음에 나열된 단어들을 한번 적절한 것끼리 묶어 보라. 노근리, 버마(반정부인사), 판랑, 북한(탈북자).
여기서, 노근리와 북한(탈북자)를 맞춤개념으로 꼽은 사람은 매우 정상적이다. 왜냐하면 보통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평상의 이기심을 적절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근리와 판랑을 묶은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매우 불쌍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마음으로는 이 풍진 세상을 마음에 상처 한번 받지 않고 살아가기란 정말로 힘이 들 테니까 말이다. 우리는 노근리를 생각하면, 온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심한 분노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베트남전쟁 당시 남한군대에 의해 무차별한 살육이 이루어진 판랑을 생각하면 그들을 동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의 생존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게 된다. 그런데 왜 우리는 판랑에 대해서 분노가 아닌 동정인가.
지난 1월 북한을 탈출한 7명이 중국 측에 의해 북한으로 강제송환 되었다. 중국 측이 “경제적 이유의 탈북이므로 난민의 규정에 들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보이며 강제송환을 결정했을 때 우리는 분노했었다. “송환되면 뻔히 죽임을 당할 건데 그걸 돌려보내다니..”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군사정권에 저항하고 있는 버마민족민주연맹(NLD) 한국지부 활동가를 강제로 송환한다는 남한정부의 입장에 대해서는 동정만을 표명할 뿐이다. 돌아가면 죽임을 당할 것을 뻔히 아는 처지에 어
떻게 송환을 한단 말인가. 그런데 왜 분노가 아닌가.
우리는 여기서 매우 역설적이지만 부끄러운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가 노근리에 대해서는 학살 만행이라며 당시 현장을 방문한 전역 미군의 눈물을 악어의 눈물이라고 비난할 때, 판랑에서 학살을 저지른 한국 군인에게는 그 눈물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중국이 경제적 이유에서 탈북한 것으로 난민의 규정이 어렵다는 논리를 통해 그들의 강제북송을 결정했을 때 남한의 인사들은 중국에 대해 인도적 관점을 요구했지만, 그렇게 ‘인정 많은’ 인사들은 남한정부가
NLD의 활동가를 단지 “난민신청을 입국 후 60일 내에 해야한다”라는 출입국관리법에 의해 추방시킬 때 그 차가운 법 적용에 동의를 표시하고 있다. 이미 우리가 사실을 받아들일 때부터 그와 같은 구분은 암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슬픈 사실이 절대적인 조건이 아닌 만큼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분명한 의식의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먼저, 현재 ‘미얀마’라고 불리는 그 이름이 88년 군사정부 등장 이후에 강제로 사용되어온 호칭이라는 사실로부터 의식적으로 그 국가를 ‘버마’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노근리와 북한 탈출자들에 대한 중국의 처사에 분노를 표시하듯이 ‘의식적으로’ 판랑과 NLD 활동가에 대한 남한의 처사에 분노를 표시해야 할 것이다.
우리를 모든 역사적·사회적 사실로부터 객관화시킨다는 것은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가치가 지닌 하나의 철학이다. 그리고 평화란 그리 어려운 가공이나 창조의 과정이라기보다는 삶의 영역에서 주어진 것의 재구성 작업이다.
P.S: ‘한글’에게 미얀마가 아니라 버마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기란 너무 힘들다. 도전에 성공하면 알려주시길… ▣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