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 워싱턴 시위가 우리에게 남긴 과제들
이창근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필자는 작년 11·30 시애틀과 올해 4·16 워싱턴 시위에 참여했다. 이 글은 그 동안 참가한 국제연대행동 속에서 느꼈던 몇 가지 단상들을 정리해본 것이다. 아직 채 덜 익은 생각들이지만, 국제연대운동의 현재적 흐름과 한계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이 글을 쓴다.
1. 누군가는 ‘미국이 변해야 세계가 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시애틀 전투’와 ‘워싱턴 시위’는 미국 내 시민·사회단체와 노동조합의 현 주소를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작년 시애틀에서 약 3만여 명의 조합원을 동원해 ‘집단시위’를 벌였던 미국노총산별회의(AFL-CIO)은, 4월 16일 워싱턴 시위에 대해서는 대단히 미온적이었다. ‘참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겨우 막판에 가서야 ‘공식적인 참가’를 결정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시애틀과 워싱턴 행동이 똑같이 ‘세계화의 3대 핵심 주도자’인 WTO/IMF/세계은행을 주요 타깃으로 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세계화 반대 시위’이지만, 각각의 기구들이 갖는 역할이 차별적이고 그것이 미국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다르기에 AFL-CIO가 갖는 태도도 달라졌던 것이다. 미국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WTO는 자신들에게 ‘고용불안/임금하락’이란 재앙적 결과를 가져다주었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비슷한 협정/기구로 인식된 반면, 4·16 행동의 핵심적인 타깃인 IMF/세계은행은 자신들과는 다소 먼 제3세계의 이슈로 사고되었기 때문이다. 넓게 보면 IMF/세계은행도 WTO와 마찬가지로 전세계를 신자유주의의 물결로, ‘밑바닥을 향한 끝없는 경쟁’ 체제로 만드는데 복무하고 있고, 그런 만큼 미국 노동자들에 미치는 영향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워싱턴 시위에 참가했던 어느 철강노동자가 ‘IMF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을 정도로, 이번 행동에 대한 미국 노동자들의 관심은 거의 없었다. 다만 시애틀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국의 WTO 가입 반대’에 목을 매고 있었다. 미국 노동자들은 또 다른 ‘고용불안/임금하락’을 우려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이기주의적인 목적을 감추기 위해 ‘독재국가 중국’, ‘중국 노동자의 기본권 및 인권 보장’ 등의 부대 슬로건을 내세우긴 하지만, 초라하긴 마찬가지다. ‘중국의 WTO 가입 반대’라는 슬로건과 ‘IMF/세계은행 구조조정 중단’이라는 요구가 ‘세계화 반대’라는 ‘대의’ 속에 뭉쳐지긴 했지만, 이러한 관심사와 입장의 차이는 ‘세계화 저항 연합’내의 잠재적 갈등 요소이다.1)
2. ‘세계화 저항 연합’ 내의 입장 차이도 화려한 시위대의 모습과는 달리 심각한 수준이다.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났던 입장 차이는 널리 알려졌듯이, 작년 시애틀에서 미국노총에 의해 제기되었던 ‘노동기준’ 문제였다. 그것의 핵심은, “WTO가 ‘자유’무역에 있어 노동기준의 문제를 항상 고려해야 하며, 이를 위해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며, 궁극적인 목적은 “노동자 권리 및 환경보호 조항이 WTO 내에 편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노총의 주장은 팀스터스 노조 의장인 제임스 호파의 “WTO내 노동기준 작업반 구성에 있어서 테이블의 한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라는 언급에서, 뚜렷이 드러난다.2)
이러한 AFL-CIO의 전략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 전략’과 일맥 상통한다. 즉, 세계화의 재앙적 결과를 적당히 어루만져줄 장치들을 다양한 수준에서 계발하고 실행함으로써, 현재의 세계화 구조와 제도들을 ‘합법화’시키고 ‘강화’시킨다는 전략이다. 세계은행에 수십명의 NGO출신 전문가들이 근무하고 있고, 수많은 프로젝트가 NGO와 협력하에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IMF도 제3세계에 구조조정을 강요하는 구조조정향상기구(Enhanced Structu-
ral Adjustment Facility)를 빈곤감축 및 성장기구(Poverty Reduction and Growth Facility)로 바꾸면서, 보다 인간적으로 보이려 애쓰고 있다. 그래서인지 IMF와 세계은행이 그들의 ‘반대 세력’ 앞에서 점점 당당해지는 것 같다. 이번 워싱턴에서, 4·16조직위원회와 IMF/세계은행 간에 공개토론회가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이 두 기구의 대변자들은 “우리가 얼마나 제3세계의 빈곤퇴치를 위해서, 그리고 음식과 식수를 제공해주기 위해서 노력했는지 아느냐? 너희들이 직접 가서 본다면 이러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해 청중들의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WTO/IMF/세계은행의 ‘NGO 및 노동조합 포섭전략’은 대단히 공세적으로 전개되고 있고, AFL-CIO를 비롯해 거대한 북반구 노동조합 및 NGO들은 이러한 전략에 ‘빈곤퇴치’ 및 ‘제3세계 노동권/인권의 보호’라는 미명하에 흡수되고 있다. 그러나 미셸 초수도프스키가 자신의 저서 『빈곤의 세계화』에서, “1980년대 후반부터 ‘빈곤의 축소’는 세계은행 부채협약의 ‘조건’이 되었다. 그것은 선별적이고 명목뿐인 ‘빈민 우선 원칙’에 근거하여 사회복지 예산을 삭감하고, 예산 지출의 방향을 전환한다”고 밝혔듯이, IMF/세계은행의 빈곤퇴치 프로그램이란 기존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폐지, 자선 사업과 국제적 ‘구호 프로그램’에 기반한 NGO 활동에 상당부분 의지하는 빈약한 ‘사회 안전망’에 의해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재배치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3. 외채탕감운동도 국제 사회운동 내에서 가장 큰 쟁점중의 하나이며, 결국 작년 11월 외채탕감운동의 대명사였던 ‘주빌리 2000 캠페인’은 남반구와 북반구로 분화하고 말았다. 북반구 ‘주빌리 2000’과 ‘주빌리 남반구’ 운동과의 차이점에 대해, 국제남반구그룹네트워크(ISGN) 대표인 야쉬 탄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① ‘주빌리 2000’은 북반구 국가들에 압력을 가하는 것을 목적으로 북반구 NGO가 주도하고 있는 반면, ‘주빌리 남반구’는 남반구 국가의 시민사회에 외채문제를 계몽하고 남반구 국가들에 압력을 행사하는 운동이다. ② ‘주빌리 2000’은 외채의 규모를 축소시키려는 목적 하에 단기간 진행되는 운동인 반면, ‘주빌리 남반구’는 외채의 구조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장기적인 운동이다. ③ ‘주빌리 남반구’는 중채무빈국(HIPC) 외채탕감 계획을 거부하고 모든 외채의 탕감을 주장한다.”3) 이러한 분화의 결정적 계기는 99년 6월 독일 쾰른에서 열린 G7 정상회담이다. 이 회담에서 ‘중채무빈국 외채탕감 계획’이 채택되었는데, 이 계획에는 ‘탕감조건’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조건’이 무엇인가는 영국 재무부장관 고든 브라운의 다음 언급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IMF와 세계은행은 선택된 모든 나라들이 반드시 서명을 해야 하는 빈곤 축소 전략을 내놓았다. 여기에는 의무적으로 지켜야 하는 시한과 기일이 있다. 빈국들은 부채 탕감에 해당하는 액수를 건강, 교육, 빈곤 구제사업에 쓰겠다는 약속을 했다. 우리는 그 돈이 무기 구입이나 부패한 행위에 쓰이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4) 이러한 ‘빈곤구제사업’은 대부분 북반구의 거대한 NGO와 거기에 빌붙는 남반구 NGO 들이 참여하며, 이들은 ‘국제구호 프로그램’이라는 거창한 이름아래 엄청난 재정지원을 받게 된다. 실제 이번 워싱턴에서 4·16 행동조직위원회와 IMF/세계은행 공개토론회에서, ’50년이면 충분하다’ 네트워크의 활동가인 조키 조로헤 제후(Njoki Njoroge Njehu)는 “좋은 NGO와 나쁜 NGO를 구분하는 기준은 바로 IMF가 후원하는지 하지 않는지에 있다. 진정으로 NGO 운동을 지원하고 싶다면 당장 재정지원을 중단하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외채탕감운동에 있어서의 남·북반구 사회운동의 분화는 상징적이다. 북반구 NGO 운동의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비롯된 외채탕감운동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반구·북반구 사회운동 세력들간의 연대 전선에는 여전히 많은 난관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4. ’50년이면 충분하다’의 한 활동가는 현재와 같은 시기에서, ‘국제기구 및 협정에 대한 입장’의 차이(즉 개혁론자와 해체론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최소한 현재와 같은 조건에서는 연대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가 제기하는 양자의 공통분모는 어느 입장을 제출하든 그것은 “극단적인 세계화 과정의 파괴성을 고발하고, 속도를 완화시킬 수 있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이 인식이 그리 틀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최소한 각국 민중들이 ‘세계화가 필연적이고 되돌이킬 수 없는 과정’이라는 선험적인 전제에 대해 한번쯤 의심할 수 있게는 된 것도, ‘개혁’을 제기했든 ‘해체’를 제기했든 “세계화에 도전한 운동”들 덕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현재에도 여전히 그러한 단계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이다. 즉, WTO/IMF/세계은행 등 세계화의 주도자들이 적극적으로 NGO 포섭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화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대응 방향의 정립과 연대전선의 구축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5. 야쉬 탄돈은 “탈냉전시대에 있어서 세계화의 의미는 냉전시대에 제3세계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던 모든 성과물들을 다시 빼앗아 가려는 시도”라고 주장한다.5) 즉, 사회주의권의 몰락이후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조금이라도 포기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는 뜻이다. 더 이상 고관세 장벽을 이용한 국내산업 보호 전략도, 제국주의 국가들의 기술을 ‘무상으로’ 모방하는 것도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오히려 제3세계의 국민경제적·사회적 필요에 따른 정책들은 ‘자유’무역 원리를 해치는 “비관세장벽”(Non-tariff barriers)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결국 95년 출범한 WTO 체제는 ‘식량안보’를 위한 정책도, ‘국내생산품을 일정비율 이상을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정책’도, ‘내국인 고용을 촉진하기 위한 정책’도 모두 ‘불법화’시켜버렸다. 제3세계 국가들이 세계체제로부터 조금이나마 배려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사라진 셈이다. 또한 IMF/세계은행은 외채위기를 빌미로 제3세계 경제의 자유화·개방화 기조를 ‘강요’하여, 초국적자본을 위한 ‘평탄한 경기장’을 만드는 데에만 온갖 공을 들이고 있다. 지금의 세계화는 분명 냉전시대의 정치적 배경 아래에서 제3세계 국가들이 이뤄놓은 부와 천연자원, 심지어 전통적인 지식과 문화까지도 무자비하게 수탈해가는 구조에 다름 아니다.
6. 세계화 체제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대응이 필요한 때이다. WTO/IMF/세계은행 등에 대한 어설픈 ‘개혁론’은 오히려 그것의 정치적 정당성과 합법성을 강화시켜줄 뿐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세계화의 주요한 행위자들을 해체하고, 그 체제로부터 ‘이탈’하는 방향으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당장 이 목표가 달성되기는 힘들겠지만, 위의 방향에서 단기적으로 농업·문화·생명특허·필수서비스 등을 WTO 체제에서 ‘제외’시키고, 제3세계 국가들의 국민경제적·사회적 필요에 따른 정책을 제한하는 IMF/세계은행의 구조조정 강요의 중단을 요구해야 한다. 또한 남반구 사회운동 세력들간의 연대 속에서, 외채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교육과 모든 외채의 ‘조건 없는’ 탕감을 주장해야 한다.
1) 4월 12일 워싱턴의 캐피탈 힐 공원에서 미국의 철강 노동자들은 ‘중국의 WTO 가입 반대’ 집회를 벌였다. 이 시위에 함께 참가한 ‘세계적 정의를 위한 동원(Mobilization for Global Justice)’ 관련자들도 위 구호를 따라 외쳤는데, 그 맥락은 달랐다. 노동자들이 ‘일자리의 위협’ 때문에 ‘반대’했다면, ‘세계적 정의를 위한 동원’ 네트워크는 ‘WTO의 권력이 강화되는 것을 막는다’는 맥락에서 ‘반대’했다. 이에 대해 남아공에서 온 패트릭 본드는 인권단체들의 독재국가 버마에 대한 경제봉쇄 주장도, 버마 민중들 스스로가 ‘봉쇄’를 요구했을 때 가능했다는 점을 예로 들면서, “중요한 것은 중국 노동자들의 입장이 아니겠냐”며, 양 입장 모두에 대해 다소 거리를 두었다.
2) “Fix it or nix it?”, Sean Healy, Green Left Weekly #402, April 19, 2000
3) 박하순, ‘방콕 운크타드 회의 보고서'(00/03/26) 중 [외채탕감운동의 현재]에서 재인용
4) [인터내셔널뉴스 83호] 인용(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발행)
5) 이 단락은 필자가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창간호에 기고한 ‘세계화에 보다 근본적인 대응이 필요하다’에서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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