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EACE MAKER : 평·화·칼·럼
인정과 이해
김상철 / 평화인권연대 회원
나는 합리적이라는 말을 꽤나 좋아한다. 나의 말이나 행동이 그런 합리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으면 하고 그것이 인정받을 때에는 꽤 큰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하는 행동에 요구되는 합리성이 내 자신의 인간 됨됨이까지 요구하게되고, 급기야 타인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합리성을 기대하는 심리를 가지게 되었다. 합리적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자면, 나를 이해시키라는 요구이다. 내가 너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네가 나를 이해시키지 못했기 때문이 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나의 비합리성을 일깨우는데 사용되는 잣대도 나의 행동이 나에게, 혹은 타인에게 이해될만한 행동인가라는 자기검열에 다름 아니다. 언뜻 보면 그런 합리성의 요구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이에 놓여진 불명료함을 명료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인 것 같다. 하지만 최근에 나는 이와 같은 생각을 전면적으로 재고하기에 이르렀다. 그 이유는 어느 술자리에서 한 선배와 오간 이야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던 것이 여자 동기와 가벼운 언쟁으로 발전했다. 나는 그녀가 얘기하는 “남자는 알 수 없어”라는 논리에 답답함을 표시했고, 급기야 “그런 것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해”라는 말로 그녀의 ‘대안 없음’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나는 내 나름대로 “그렇다면 날더러 뭘 어쩌라는 얘기냐”라는 항변이었던 셈이다. 아마도 위의 논법대로라면, 나는 그녀에게 나를 이해시킬 수 있는 합리성을 요구했던 것 같다. 사실 그녀는 나를 이해시킬 수가 없었고, 나는 “내 얘기가 먹혀들고 있구나”라는 일종의 쾌감을 맛보고 있었다. 그런데 한 선배가 그녀의 ‘편’을 들고나섰다. 평소에 굉장히 합리성을 강조하고 삶 자체에서도 때로는 그런 합리성을 무리하게 적용시키기까지 했던 선배였다. 그 선배가 말해준 얘기의 요점은 “‘때로는 그럴 수 있겠구나’라는 식의 분명하지 않는 근거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그대로 인정해야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여자친구와 있었던 사례까지 얘기해주면서 그와 같은 상황을 이야기 해주었다. 나는 그런 개인의 특수한 사례를 통해 얘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꽤 많은 시간을 그와 설전을 벌였던 것 같다. 딱 부러지는 결론이 나지는 않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내 가 가지고 있던 이해의 적정 선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나는 그의 말이 그리고 그에 앞서 그녀의 말이 옳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요구한 이해라는 것이 현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억압을 인정하지 않는 논리를 함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분명 남한 사회는 물론 진보적이라 자처하는 공동체내에서도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 진행되고 있음을 이해하지만, 나에게로 향해지는 질문에 대해서만 이해를 요구함으로써 “나는 아니다”라는 논리를 교묘하게 전제했던 것이다.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나의 자기방어기제 중 한가지를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솔직히 그것을 깨닫고는 한동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 혼이 났다. 이해라는 것은 인정의 선결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내가 혹은 우리가 어떤 문제를 이해하여야지 그에 대해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논리는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교묘하지만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는 폭력에 대해 즉각적인 대응을 지체되게 한다. 현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은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기 때문에 이해를 하지 않고서도 인정할 수 있다. ‘이해되어야 한다는 요구’는 마치 그것이 투명하게 드러날 때까지 그러한 폭력을 유예시켜주는 일종의 걸림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미성숙한 이해 능력에 삶에서 실재로 접촉해오는 사건의 인정을 종속시킬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해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도 많지만, 그것을 고집함으로써 잃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력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폭력에 민감한 몸이다. 이해에 대한 인정의 해방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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