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의 풍경

[알아람(Al-Ahram)] 2000년 6/8-14 에드워드 사이드

소모적이고 매우 파괴적이었으며, 결국 쓸모 없는 것으로 돌아가버린 지난 20년간의 군사력 배치 이후,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에서 패배한 후 황급히 철수하고, 여전히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미국 언론이 조장하고 있는 왜곡에서 벗어난 냉정한 분석을 요구하고 있다.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주둔은 결코 이스라엘 북부의 “방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패퇴시킨 다음 이스라엘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방향으로 레바논의 정치구조를 변화시키고, 마침내 시리아에 압력을 넣어 이스라엘의 일방적 강권 정책을 수용하도록 하는 고안된 정치적 목표를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의도 중 첫 번째는 부분적으로 성공했으며, 인티파다(이스라엘 점령지에서의 팔레스타인의 반란-번역자주)를 종식시키고 팔레스타인 점령지의 치안을 유지하며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했지만) 팔레스타인의 자결권 추구를 이스라엘의 이익에 부합되도록 결론지으려 하는 데 있어, 결국 1993년 추방당한 방관자 신세의 야세르 아라파트를 자신의 유순한 파트너로 만들었다. 다른 두가지 정치적 목표들에서는 처참한 실패를 했다. 이스라엘 용병 남부레바논군(시아파가 압도적으로 우세하지는 않을 지라도 거의 동일한 비율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는 흔히 “기독교인”으로 묘사되고 있다)의 힘없는 패배와 성공적인 저항 정책을 가진 헤즈볼라의 출현과 공세적인 반격이 목격되고 있고 시리아는 완전 철수 이후 평화 협정 체결에 못미치는 조건을 제시한 이스라엘의 제안을 계속 거부했다.

이스라엘 지지자들에 의해 계속된 미국 언론의 시각에 대한 개입은 놀랍게도 현실을 축소시키는 관점을 유포했다. 이스라엘이 전세계에서 단지 초강대국들에 의해서만 완전한 지원을 받으면서 중동 지역 유일의 공격용 공군과 핵무기 선택권, 그리고 군사-정치적 기제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전술을 표현하기 위해 “방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지난 22년 동안 이스라엘이 다양한 군사 점령을 지속시키고 아랍 주요 도시들에 마음껏 폭격을 하고 민간인 시설을 파괴하면서, 레바논에서만 최소한 2만 명을 살해하고 민간인이 95%를 차지하고 있는 수천 명의 무수한 부상자를 내면서 국제 사회를 우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어떻게 “방어”일 수 있는가? 혹은 “평화”라든가, 같은 맥락에서 나온 “평화과정”이라는 말을 생각해보라. 이스라엘은 아랍세계에서 정복당한 지도자들에 대해 “평화”를 강제하는 동시에 (유태인 대학살의 기억을 이용하면서 비유태인들에 대한 인종 청소와 체계적인 차별은 냉소적으로 간과하거나 정당화하고 있는 미국 언론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비난을 사고 있는 식민화와 합병정책을 계속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아랍과 이슬람 세계에서 명목상으로라도 인정받기 이전에 자신의 역사와 현존에 대한 현실적인 시각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당한 수의 이스라엘 국민들과 미국의 이스라엘 지지자들 사이의 간극은 사실상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레바논에서 전설적인 IDF(이스라엘 주둔군)을 격파한 민병대에 대해 이스라엘과 서방 언론이 “이란의 지원을 등에 업은” 또은 “테러리스트”와 같은 김빠지는 말들을 수없이 되풀이할지라도, 이스라엘이 그토록 결정적으로 패배한 국지전 모두를 완전히 설명해낼 방법은 없다.

그런 까닭에 이스라엘의 레바논 퇴각은 사실상 혹사와 희생을 기꺼히 자처하고 있는 대중들의 단호한 저항의 결과임에 틀림없었다. 헤즈볼라는 (자신들에게 타격을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어마어마한 장갑부대와 공군의 우세가 지체되고 무력화되는 지역에서 활발히 움직였고 자신들을 배신한 지역 동맹군들과 나란히 진군하는, 환멸스럽고 공포스러운 외국군보다 더 용감하고 훨씬 비상한 수완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 언론이 레바논에서의 이스라엘의 분투에 대해 그토록 일방적으로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20여년간 유엔 결의안을 무시하면서 자신을 내버려두라고 요구하고, 수십년 동안 고문과 이적행위, 약탈로 이루어진 끔찍한 체제를 레바논인들에게 강요했다는 사실은 쉽게 잊혀졌다. 이러한 테러 통치를 마침내 끝장냄으로써 해방된 남부 레바논은 이스라엘이나 아랍 정권들이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없는 이 지역의 미래에 대한 첫 번째 도전이 될 것이다.

아랍-이스라엘 분쟁이 종식될 것이라는 견해는 지금까지 안와르 엘-사다트가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구체화하는 것에만 전적으로 근거하고 있었다. 카리스마적인 공식 지도자들이 과거의 적들 사이에서 새로운 평화를 교섭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이집트와 요르단, PLO의 사례를 통해 그릇된 생각임이 드러났다. 이들 지도자들은 자국 국민들을 설득하지 않은 채 모든 일을 처리했을 뿐이다. 사소한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한다면, 독립국가를 이룩한 어떠한 문화, 정치적 인물도, 자국 지도자가 이스라엘과 화친한 아랍국 가운데 어떠한 대중조직, 노동조합, 실질적으로 자율적인 비정부기구도 진지한 태도로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은” 나라이며 마지막에서야 고려되는 유일한 국가로 고립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현존(이스라엘의 존재가 아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에 대한 저항은, 떠들썩하게 보여진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격렬하다. 남부 레바논에서 울려퍼지는 승리의 환희가 아랍 텔레비전에서 끊임없이 방송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분명 아랍과 이스라엘의 기업인들은 다소 제한된 제휴를 계속하고 있으며 세계화를 저지하려는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이다.

다시 말해, 중동의 화해에 관한 진부한 지혜들은 본질적으로 틀린 것임이 밝혀졌다. 중동의 화해가 이제 멈출 것이라거나 현재의 평화 궤도가 단념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기치않게도 두드러진 대립과 반발의 풍경이 드러났으며 이는 신속하게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둘째, 우리는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에서의 현재의 권력구조가 이차대전 이후 기간에서 가장 낡은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들 나라의 권력구조는 여전히 극도로 군사화되어 있고 대부분 소수독재 체제이며, 따라서 헤즈볼라의 승리가 표상하는 것과 같은 변화에 무감각하다. 미국은 중동 문제에 있어서 경우에 따라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이슬람 반대파들을 흡수하거나 (재단설립, 경영학부 설립 프로그램, 대학교류를 통해) 미국식 시민사회를 추동하기도 했지만 역사적으로는 분명한 대화자 및 상대자들과 사업을 해왔다. 광대한 부문의 삶이 이들 정권과 미국이 제시하는 시야를 넘어서고 있으며, PLO가 출현하고 1970년 요르단에서 패배한 이래 처음으로 이러한 비공식적 삶의 측면이 낡고 경직된 구조들을 위협하고 있다.

물론 이슬람 운동은 이러한 비공식 영역의 일부이고 그들이 제공하는 것은 현재 권력의 지위에 있는 진부한 것에 대한 지적이고 문화적인 하나의 대안이다. 이러한 경향들 대부분은 서로 모순된다. 그러나 이들은 미국식 문화에 대한 순응과 소비주의에는 한목소리로 저항하고 있으며, 느슨하게 협상하는 것(가령 오슬로 모델을 보라)이 아니라 탈시오니즘화시키고 격퇴하거나 저지해야 할 거만한 외부세력으로 표상되는 이스라엘에 반대하고 있다. 이들은 또한 문화적, 시민적 전통이라는 “믿을만한” 대중적 형태에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양한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건강하고 세속적인 반대 세력 또한 존재한다(가령 아랍 세계 전반의 억압적인 언론법에 맞서 싸우는 저널리즘 반대 세력이나 고문과 정치에 종속된 사법부와 싸우고 있는 인권운동, 여성권운동과 이제 막 싹트고 있는 환경운동 등을 보라. 오늘날 모든 아랍 사회에는 이러한 운동들이 존재한다. 이미 발언권을 쟁취하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학계와 노동조합, 작가조직 및 예술가연합 등은 말할 것도 없다). 이들 세속 세력 모두는 종교적 반대 세력들과 단호하게 경쟁하고 있다.

이제 상황은 열기를 더해가고 있다. 이는 헤즈볼라가 공식 국가의 지원 없이도 남부 레바논을 해방시킨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반이스라엘 전선에서 최선두에 서있는 정권들 대다수가 심각한 권력계승 문제에 처해있는 것도 한 원인이다. 아랍 국가 대부분을 한번 살펴보라. 구질서는 국민 대다수가 생각하기에 인기없고 고립된 늙은 지도자들의 실패로 인해 활기찬 저항을 벌이고 있는 새롭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력들의 재편성을 쉽게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우선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독립 시기 이후 최초로 중동의 정치는 외부의 힘이나 저명한 인물이 아니라 이와 같은 용솟음치는 내부의 경향들에 의해 영향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평화 협정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가는 바라크(이스라엘 총리)이나 그의 아랍 파트너들이 자기들끼리 결정하는 내용이 아니라, 아랍 세계와 이스라엘(그리고 이란과 터키)에서의 승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샤스당(이스라엘의 유태 근본주의당), 헤즈볼라, 하마스 같은 정당과 수많은 세속적 반대 세력들이 이제까지 자신들의 한계를 넘어서있던 문제들에 대한 발언권을 둘러싸고 투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세속적 반대 세력이 결국에는 종교적 경쟁자들에게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확신한다. 중동은 무슬림과 유태교의 신정(神政)을 목표로 하는 후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황당한 사고에 굴복하기에는 너무나도 이질적이고 정치적으로 각성되었으며 현대화된 지역이다. 시민권, 정체성, 정치적 권한 등과 같은 문제를 둘러싼 혹독한 싸움은 중요하며 궁극적으로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은 바로 이러한 싸움이다. 불안정한 시기가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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