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은 이전했지만 삶은 이전하지 못했다.”

13일 청와대가 창문 넘어 보이는 한국무역보험공사 건물에서 열린 ‘공공기관 2차 지방이전 노동자·시민사회·청년 타운홀미팅’에서 1차 지방이전을 경험한 이병수 한국가스안전공사노동조합 위원장이 꺼낸 말이다. 충북혁신도시로 기관은 옮겨갔지만 의료·교육·교통 등 생활 기반이 부족해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했던 노동자들의 현실을 압축한 발언이다.

이날 타운홀미팅에서는 공공기관 지방이전이 지역균형발전이라는 목표와 달리 노동자의 삶과 공공서비스, 지역 주민의 일자리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참석자들은 정부가 이전 기관의 숫자와 속도를 앞세우기보다 1차 이전의 한계를 평가하고 정책 당사자들과 공개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가 마련한 이번 행사는 정부가 지난 9월 3일 공공기관 2차 지방이전 추진방향을 발표해 마련됐다. 정부는 수도권 소재 공공기관 350여 곳을 대상으로 이전 필요성을 검토해 올해 4분기까지 계획을 확정하고, 2027년부터 선도 이전에 착수할 방침이다.

그러나 이전 대상과 수도권 잔류 기준, 지역별 배치 기준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이에 공공운수노조는 지난 9월 30일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재명 대통령에게 타운홀미팅에 직접 참석해 노동자·지역 주민·청년들과 공개토론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 대통령실에도 참석 요청 공문을 전달했지만 행사 전날까지 답변을 받지 못했고, 이 대통령은 이날 참석하지 않았다.

출처: 공공운수노조

엄길용 공공운수노조 위원장은 “대통령님, 이제 밀실 말고 함께 이야기합시다”라며 “공공기관 지방이전이라는 중요한 국가정책을 몇몇 정부 부처와 관계자들만의 밀실논의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부에 투명한 선정 기준 공개와 실질적인 노정협의를 요구했다.

이날 토론에서는 1차 지방 이전이 남긴 문제부터 제기됐다. 이병수 위원장은 충북혁신도시에 11개 공공기관이 이전했지만 의료·교육시설과 광역교통망이 충분히 갖춰지지 않아 노동자들이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는 문제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어떤 기관을 어디로 옮길 것인가”보다 “그 기관의 노동자와 가족들이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며 ‘선 정주여건 개선, 후 기관 이전’을 제안했다.

2차 이전 검토 대상 기관 노동자들은 기관의 특성을 무시한 이전이 공공서비스와 업무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최형욱 한국지역난방공사노동조합 위원장은 난방 공급 대상의 약 77%가 수도권에 있고 본사 이전에 약 1,808억 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들어 “국민의 안전은 건물 옮기듯이 이전할 수 없다”고 말했다. 민원찬 한국언론진흥재단지부장은 언론사와 광고회사 등 주요 협력 기관이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며 “기관 이전보다 지역 발전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기범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지부장은 이미 주요 사업과 인력이 전국에 분산된 기관의 본사를 다시 이전하는 것이 어떤 추가적인 지역발전 효과를 가져올지 검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순영 한국무역보험공사지부장은 수출금융 업무에 필요한 금융기관과 전문기관의 협력체계를 강조하면서 무기계약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전 과정에서 더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출처: 공공운수노조

지역 시민사회와 청년들의 문제 제기는 공공기관 이전이 실제로 지역을 살리는지, 그곳에서 살아온 주민과 청년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지에 집중됐다.

충북 옥천군 주민인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은 공공기관 이전이 지역경제에 대한 기대를 높이지만 기존 도심의 쇠퇴와 지역 내부의 불균형을 심화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관을 일단 이전하기보다 지역의 지방공기업과 공공기관, 지방자치단체가 공동사업을 추진하며 협력 기반을 만드는 것이 먼저라며 “속도감 있는 이전이 아니라 속도가 느린 접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충북 청년인 정누리 삶과 노동을 잇는 배움터 이짓 활동가는 정부의 이전 지원책이 수도권에서 내려오는 공공기관 노동자에게 집중돼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역에 이미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도 주거와 이동, 일자리 지원이 필요하다며 혁신도시만 성장하고 주변 지역은 쇠퇴하는 방식의 균형발전 정책을 비판했다.

경남에서 활동하는 문준혁 대학원생·비정규연구노동자노동조합지부 사무차장은 “사람이 아니라, 자리가 내려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공공기관이 지역으로 이전해도 지역 청년에게 일할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면 균형발전의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지역 안에 또 하나의 ‘작은 서울’을 짓는 일은 이제 멈춰야 한다”며 실제 지역인재 채용 확대와 연구·의사결정 기능의 이전을 요구했다.

이날 참석자들의 문제 제기는 공공기관 지방이전 자체에 대한 찬반을 넘어 누가 정책을 결정하고 그 성과를 누리는가로 모아졌다. 기관 이전이 노동자의 희생을 전제로 추진되거나 지역의 또 다른 불균형을 만드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공운수노조는 정부에 이전 대상과 선정 기준 공개, 1차 지방이전의 성과와 한계 평가, 노동자·지역 시민사회·청년이 참여하는 실질적인 공론화 절차 마련을 촉구했다. 정부가 올해 안에 이전계획을 확정하겠다고 밝힌 만큼, 정책 결정 이전에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는 요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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