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러시아혁명은 1917년 2월에 일어났고, 더 유명한 두 번째 혁명은 10월에 일어났다. 그 혁명과 제헌의회 해산이 촉발한 내전은 1921년까지 이어졌다. 처음에는 1917년 러시아군이 마지못해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계속했지만, 이후 전투를 중단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전쟁 전 인구의 3분의 1, 산업의 절반, 석탄 생산능력의 90%에 해당하는 지역을 내줬다. 옛 제국은 수많은 독립 정치체로 분해됐으며, 그중 가장 중요한 곳은 우크라이나, 아르메니아, 조지아였다. 엄청난 변화와 믿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이 이어진 시기였다.

러시아 내전에서 숨진 러시아 국민은 약 12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자체에서 숨진 180만 명에 거의 맞먹는다. 하지만 내전 기간 기아로 약 500만 명이 죽었고, 질병으로 200만 명이 숨졌다. 따라서 내전의 ‘대가’는 약 800만 명의 사망자에 이르며, 이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가 입은 군사적 인명 손실을 압도한다. 이 수치는 나이얼 퍼거슨의 《전쟁의 연민》(The Pity of War) 391쪽 이하에서 가져왔다. 여러 면에서 오늘날 같은 지역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동란의 시대’였다.
러시아와 소련의 저명한 예술비평가이자 문학비평 형식주의 학파의 창시자인 빅토르 시클롭스키(Viktor Shklovsky)가 쓴 회고록은 바로 이 시기, 1917년부터 1922년까지를 다룬다. 시클롭스키는 두 차례 혁명 뒤 나라 전체가 겪은 엄청난 파괴와 인구 이동, 국토 황폐화를 직접 겪고 목격했다. 정치적으로 그는 사회혁명당(SR), 즉 19세기 인민주의자들의 계승 세력과 가까웠고, 체카(Cheka)에게 여러 차례 심문받았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1922년 체포됐을 때였다. 당시 볼셰비키 지도자 암살을 정치적으로 준비했다는 혐의를 받은 사회혁명당 지도부의 대규모 재판을 바로 앞두고 있었다. 여기에는 레닌을 겨냥한 암살 미수도 포함됐다. 운명의 아이러니로 부하린이 이 재판에서 검사 역할을 맡았다. 막심 고리키와 야코프 스베르들로프 같은 사람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시클롭스키는 소련을 떠나는 편이 현명하다고 판단했고 《감상적 여행》(Sentimental Journey)의 두 번째 부분을 1922년 베를린에서 썼다. 이 책은 1923년 러시아어로 출간됐고, 영어판은 1970년에 나왔다. 시클롭스키는 1920년대에 소련으로 돌아가 활동을 계속했고, 국제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고르바초프가 집권하기 직전인 1984년 모스크바에서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은 훗날의 이야기다. 이 회고록은 2월혁명부터 내전이 끝날 때까지를 다룬다. 사실 엄밀한 의미의 회고록은 아니다. 시클롭스키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과 전쟁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썼다. 이 책은 나라가 겪은 믿기 어려운 파괴를 기록한 일종의 콩트랑뒤(compte-rendu, 사실 기록 보고서)에 가깝다. 2월혁명 당시 시클롭스키는 서부전선의 러시아군에 있었다. 이후 전반적인 혼란 속에서 그는 부대와 함께 페르시아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그는 러시아와 튀르키예 사이의 전쟁보다 페르시아인, 쿠르드인, 튀르키예인, 아시리아인들 사이의 민족전쟁을 더 많이 목격했다. 마지막 집단은 기독교인이었다. 모두가 서로를 거리낌없이 죽이고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했다. 러시아군 역시 학살에 한몫했다.
“우리는 외국에 들어가 그 나라를 점령했고, 그곳의 침울함과 폭력에 우리의 폭력을 더했다. 그 나라의 법을 비웃고, 무역을 방해했으며, 공장을 하나도 열지 못하게 했고, 샤를 지지했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 군대를 주둔시켰다. 혁명 뒤에도 그곳에 군대를 남겨뒀다. 그것은 제국주의였다. 더구나 러시아 제국주의, 다시 말해 어리석은 제국주의였다.” (78쪽)
시클롭스키가 묘사한 학살의 규모는 믿기 어려울 정도다. 레마르크, 바르뷔스, 헤밍웨이가 쓴 다른 제1차 세계대전 서사에서 읽는 것보다 훨씬 심하다. 약탈하는 군대가 육지에서 싸우고 영토의 통제권이 끊임없이 바뀌는 전쟁과, 폭격이나 참호전으로 벌어지는 전쟁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크게 착각하고 있다. 그런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도시는 구역으로 나뉘었다. 각 중대가 자기 구역을 약탈했다. 더 잘 보기 위해 그들은 도시에 불을 질렀다.” (94쪽)
“바로 길가 덤불 아래에 죽은 남자가 누워 있었다.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 옆에서 병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오스트리아산 통조림으로 아침을 먹으며 깡통을 시체 위에 올려놓았다.” (44쪽)
“소총, 특히 러시아제 소총은 동방에서 보물이다. 우리가 퇴각하기 시작했을 때 페르시아인들은 소총 한 자루에 2,000~3,000루블을 줬다… 비교를 위해 우리 병사들이 페르시아와 캅카스에서 납치한 여성의 가격을 생각해 보라. 예를 들어 [크림반도의] 페오도시야(Feodosia)에서는 이미 사용한 여성은 15루블, 사용하지 않은 여성은 40루블이었고, 한 번 사면 영원히 당신 것이 됐다.” (110쪽)
페르시아를 떠난 뒤 시클롭스키는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로 갔다가 다시 키예프로 향했다. 이런 파괴의 와중에도 기차가 대체로 계속 운행된다는 사실에 독자는 놀라게 된다. 물론 시간표대로 움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쿠르디스탄에서 모스크바까지 며칠 만에 데려다준다. 페트로그라드는 음울하고 춥고 굶주려 있다. 키예프는 좀 더 활기가 있다. 무엇보다 여러 군대가 차례로 들어왔다 나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러시아 부르주아지가 키예프로 피신했다.
“당시 러시아 부르주아지 전체가 우크라이나에 모여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었지만, 독일군은 아직 완전히 털어가지는 않았다. 거리에는 [독일의] 삼색기가 펄럭였다.” (157쪽)
그러나 이후에는 이랬다.
“우크라이나에는 다음과 같은 세력이 있었다. 키예프에는 스코로파즈키[독일이 괴뢰정부 수장으로 세운 우크라이나 헤트만]가 있었고, 러시아 장교들이 그를 지지했다. 그들 자신도 왜 그를 지지하는지 몰랐지만, 에노[프랑스 외교관]가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다. 키예프 주변에는 페틀류라(Petlyura)가 완전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158쪽)
헤르손(Kherson)에서는 전쟁을 어떻게 치렀을까? 백군이 지배할 때는 이랬다. “총살당한 사람들의 명단이 벽에 붙어 있었다. 하루에 15명. 아주 규칙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명은 항상 유대인 이름이었다. 차별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208쪽)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장악했을 때는 이랬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대체로 볼셰비키를 러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쐈고, 러시아인을 볼셰비키라는 이유로 쐈다.” (159쪽)
우크라이나에서 사회혁명당을 위해 ‘일한’ 뒤 시클롭스키는 페트로그라드로 돌아갔다. 문학계 인맥 덕분에 예술가 공동체 건물에 거처를 얻었고, 사회혁명당을 위한 비밀활동도 계속했다. 그는 그 활동이 무엇이었는지는 설명하지 않고 암시만 한다.
“교실에는 난방이 없었다. 부대의 삶은 배급소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매일 빵 1파운드와 청어, 호밀 몇 그램, 설탕 한 조각을 받았다. 집에 돌아와 이 초라한 배급량을 바라보면 끔찍했다. 누군가 당신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180쪽)
“내 친구 한 명은 자기 서재의 책을 불태웠다. 끔찍한 일이었다. 책에서 모든 페이지를 뜯어내 구겨야 했다.” (235쪽)
이 문장은 회고록 전체를 지배하는 건조하고 거리를 둔, 거의 냉정한 문체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이 [예술가] 건물의 일부는 예전에 중앙은행이 쓰던 곳이었다. 나는 은행 열쇠를 손에 넣어 안으로 들어갔고,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방, 방, 또 방. 네프스키 대로를 향한 쪽에도 방이 있었고, 모르스카야 거리를 향한 쪽에도 방이 있었으며, 모이카 운하를 향한 쪽에도 또 방이 있었다. 금고들은 열려 있었고, 바닥 전체에는 서류와 영수증 책, 마닐라지 서류철이 널려 있었다. 나는 서류철만으로 거의 1년 동안 난로를 땠다.” (235쪽)
볼셰비키는 경제를 어떻게 조직했을까?
“그들은 해가 정해진 시간에 뜨고 날씨도 자기들 관청에서 만들어내도록 모든 것을 조직하고 싶어 했다.” (189쪽)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우유를 모으고 있었다. 명령서에는 어느 날까지 우유를 전부 어느 장소로 가져오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담을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우유를 땅에 부었다.” (181쪽)
문체는 독립적이고 거의 순진할 정도다. 문장은 짧고 전보처럼 끊어지며, 냉정을 유지한 채 쓰였다. 책 전체가 대체로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지만 서로 다른 사건 사이의 연결관계는 설명하지도, 논의하지도 않는다. 군대가 붕괴한 뒤 시클롭스키가 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동하는지도 알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면 같은 시대의 또 다른 러시아 예술가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의 ‘시네마 베리테(cinéma-vérité)’가 떠오른다. 목적 없이 페트로그라드의 텅 빈 거리를 오가는 전차, 문을 닫고 판자로 막은 상점들, 어디에나 존재하는 굶주림이 똑같이 보인다.
시클롭스키 같은 책의 의미는 역사적인 데만 있지 않다. 물론 역사적 가치도 중요하다. 책에는 유명 인물들이 짧게 모습을 드러낸다. 케렌스키(Kerensky), 고리키, 혁명의 연대기 기록자 니콜라이 수하노프(Nikolai Sukhanov), 초기 체카가 등장하고, 후반부에는 만델시탐(Mandelstam)이 나온다. “그는 주변에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시를 쓰고, 날마다 한 줄씩 읽어준다.” 안나 아흐마토바(Anna Akhmatova), 구밀료프(Gumilyov)도 등장한다. “그는 나와는 낯선 사람이었고, 그에 대해 쓰기는 어렵다. 그를 죽일 필요는 없었다.” 블로크(Blok)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다. “그는 구밀료프보다 더 힘들게 죽었다. 절망으로 죽었다.”
그러나 오늘, 이 회고록을 읽으면 역사가 반복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많은 경우 오늘날의 문제는 100년 전의 문제와 거의 똑같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역사에서 어떤 문제들은 어느 시점에 사라지는가? 어떤 것의 역사는 언제 끝나는가? 분명 일부 문제는 끝난다. 오늘날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가운데 누구를 지지할지를 두고 싸우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중동 같은 다른 문제에서는 등장인물 일부가 조금 달라졌을 뿐 전쟁이 계속된다. 시클롭스키의 책이 묘사한 유라시아 지역에도 오늘날 똑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주: 이 책은 1970년 달키 아카이브 프레스(Dalkey Archive Press)에서 출간됐으며, 두 편의 훌륭한 서문이 실려 있다. 리처드 셸던(Richard Sheldon)이 문학적 서문을, 시드니 모나스(Sidney Monas)가 역사적 서문을 썼다.
[출처] Destruction and despair – by Branko Milanovic
[번역] 하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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