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서브스택을 팔로우하는 사람 중 일부는 눈치챘겠지만, 나는 이번 여름 현재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읽고 있다. 나는 최근에 출간된 책들보다는 이 갈등의 덜 알려진 기원, 즉 러시아 제국의 해체와 뒤이어 벌어진 내전까지 어느 정도 거슬러 올라가는 책을 읽는 것이 매우 유익하고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당시에도 지금의 전쟁으로 이어진 여러 힘이 아주 뚜렷하게 나타났으며, 여기에는 우크라이나 내부의 정치적·민족적 세력이 보여준 놀라운 이질성도 포함됐다.
나는 지금까지 그 시기를 다룬 책 두 권을 서평했다. 하나는 리처드 파이프스(Richard Pipes)의 《소련의 형성》(The Foundation of the Soviet Union)이고, 다른 하나는 1917년 두 차례의 러시아 혁명과 1918~1921년 내전 시기를 다룬 빅토르 시클롭스키(Viktor Shklovsky)의 뛰어난 회고록이다. 두 책 모두 훌륭하며 같은 사건을 다루지만, 관점은 매우 다르다. 파이프스는 역사가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시클롭스키는 이 사건에 직접 참여하고 목격한 사람인 동시에 문학가의 시각에서 바라본다.
나는 최근 러시아의 역사를 큰 틀에서 다룬 책 두 권도 읽었다. 첫 번째는 블라디슬라프 이노젬체프(Vladislav Inozemtsev)가 러시아어로 쓴 《비근대적 국가》(A non-modern country)로, 오늘날 러시아를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이노젬체프의 견해를 잘 요약한 글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더 최근에는 세르게이 메드베데프(Sergei Medvedev)의 《러시아가 만든 전쟁》(A War Made in Russia)을 읽었다. 이 책은 무엇보다 푸틴을 권력에 올려놓고 그의 ‘권력의 수직구조’를 대중이 받아들이게 만든 1990년대의 경제적 재앙을 피상적으로 다룬다.
나는 우크라이나 정치학자이자 정치 활동가인 볼로디미르 이셴코(Volodymyr Ishchenko)의 《심연을 향하여》(Towards the Abyss)를 막 다 읽었다. 나는 이전에도 그의 글을 여러 편 읽었다. 그의 글은 언제나 분석을 단순화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처음에는 갈등이었고 결국 전쟁으로 이어진 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의 정치경제를 진지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이셴코는 우크라이나의 여러 정치세력이 가진 이해관계를 설명하면서 분명한 계급적 관점을 취한다. 《심연을 향하여》는 2004년 오렌지혁명부터 2014년 마이단 봉기, 혹은 쿠데타, 또는 이셴코가 주장하듯 둘 다였던 사건을 거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미 2년째에 접어든 2023년까지 그가 쓴 글을 모았다.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본 것은 전쟁에 대한 논의가 아니다. 이 책은 포스트사회주의 사회의 계급구조를 규정하고, 이를 정치·경제적 연합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설명 도구로 사용하려 한 최초의 책, 혹은 분명 최초의 책 가운데 하나다. 이반 셀레니(Iván Szelényi)는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에 출간한 한 권의 책과 여러 논문에서 어느 정도 비슷한 접근법을 취했지만, 이후 이런 분석은 드물어졌다. 예를 들어 유고슬라비아 계승전쟁을 계급적 또는 사회적 관점에서 다룬 논문이나 책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놀랍다. 전부, 혹은 거의 전부가 민족성과 종교만을 다룬다. 경제 문제가 등장할 때도 언제나 각 공화국이 다른 공화국에게 착취당했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역시 명백하게 민족적 관점이다.
포스트소비에트 공간은 포스트사회주의 동유럽에 존재하는 정당과 연합, 정치계급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포스트소비에트, 특히 우크라이나의 상황이 더 복잡한 이유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민족과 언어 문제에 뒤섞이면서 서로 중첩되는 이해관계와 정체성, 그리고 그에 따른 갈등의 복잡한 직물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민족적으로 동질적인 나라에서는 사정이 훨씬 단순하다. 분할을 거친 공산주의 국가 대부분이 그런 모습이 됐다. 우크라이나 정치에서 큰 역할을 하는 두 변수, 즉 민족성과 언어는 이런 나라에서 훨씬 덜 중요하다. 특히 언어는 민족성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로 독립적인 변수다.
수년에 걸쳐 쓴 이셴코의 글을 읽다 보면 마르크스의 《프랑스 내전》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 모인 비슷한 글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 역시 수많은 계급으로 구성된 당시 프랑스 사회를 스미스와 리카도에게서 물려받은 영국 정치경제학의 틀에 끼워 맞추는 어려움과 씨름했다. 예를 들어 전체 인구의 약 30%를 차지했지만, 영국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던 프랑스의 소농을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지 마르크스에게는 어려운 문제였다. 이들은 자본가도 임금노동자도 아니었고, 규모와 정치적 영향력이 너무 컸기 때문에 단순히 무시할 수도 없었다. 마르크스는 결국 사회학적·정치적 분석의 걸작 두 편을 만들어냈다. 참고로 다음은 《프랑스 내전, 1848~1850》에 묶인 글들과 마르크스 사후 미완성 상태로 출간된 《자본론》 제3권 마지막 장에서 그가 규정한 계급구조다.

이셴코가 제시하는 계급구조는 훨씬 단순하다.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기 전 우크라이나 사회는 세 개의 큰 계급으로 구성돼 있었다. 첫 번째는 도시 부르주아지였다. 이들은 정치적 선호와 물질적 이해관계 모두에서 서유럽을 하나의 ‘문명적 프로젝트’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다. 우크라이나가 유럽과 가까워지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더 발전할 것이라고 봤다. 유럽이나 미국의 자금은 여러 교육·기술·사회 프로젝트를 통해 도시 부르주아지를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 단순하게 말하면 도시 주민들은 서유럽인들과 공유하는 사업적·전문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도시 부르주아지는 유럽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고, 특히 유럽연합(EU)에 가입하는 데 물질적 이해관계와 이념적 선호를 모두 갖고 있었다. 전쟁 이전에 이런 태도가 나토(NATO) 가입 지지까지 이어졌는지는 전혀 분명하지 않다. 이셴코가 제시하는 수치를 보면 나토 가입 지지율은 한 번도 인구의 과반에 이르지 못했고, 흔히 최다 의견에도 이르지 못했다. 러시아가 침공하기 전까지 나토 가입을 원하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15~20%였지만, EU 가입은 대체로 50%가 넘는 지지를 받았다.
두 번째 큰 계급은 주로 우크라이나 서부 출신의 극우 세력과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야누코비치(Yanukovych)를 축출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그곳에 있던 사람 가운데 우리는 10분의 1이었지만, 일의 10분의 9를 우리가 했다.” 몇 달 동안 이어지고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은 대중봉기는 결국 의회가 석연치 않은 방식으로 야누코비치를 탄핵하는 데 이르렀고, 야누코비치는 러시아로 도피하면서 모든 대통령 권한을 포기했다.
이셴코의 글만으로는 이런 우파 집단의 경제적 기반이 무엇인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이들의 정치적 견해와 폭력성은 독일의 돌격대(SA)를 가장 많이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이셴코는 이들을 정당의 군사조직이라고 말하면서 암묵적으로 그런 비교를 한다. 이런 조직은 여러 개가 있으며, 작전상 서로 독립적이고 여러 우파 정당과 연결돼 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조직은 아조우 여단(Azov Brigade)으로, 현재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우크라이나군의 중추를 제공한다. 이 조직은 모든 것을 포괄한다. “정치적 의제를 가진 부대이면서 정당과 준군사조직, 어린이들을 훈련하는 여름캠프와 연결돼 있다.”(116쪽)
유로마이단에서도 다른 집단들이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라이트 블록(Right Block)’은 원래 축구 훌리건들의 연합이었으며,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조직과 비슷했다. 그러나 이들이 어떤 사회집단을 대표하는지, 또 어떤 형태의 부패한 정치자본주의를 제외하면 경제적 이해관계가 무엇인지 전혀 분명하지 않다.
2014년 이전, 즉 우크라이나가 아직 하나의 통일된 국가였던 시기의 세 번째 집단은 우크라이나 동부 주민들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소련 산업기업을 부정하게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부자가 된 대형 올리가르히들이 정치생활을 지배하며 비교적 수동적인 노동력을 ‘통치’했다.
“이런 올리가르히 정당들은 ‘거물’을 중심으로 조직됐고 후견인-고객 관계에 기반했다. 다른 모델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소련 공산당의 최악의 특징인 강압적인 온정주의와 대중의 수동성을 재생산했지만, 이를 정당화해주던 근대화 프로젝트는 제거했다.”(111쪽)
도시 부르주아지와 달리 이곳에서는 올리가르히와 주민 모두 러시아를 바라봤다. 이들은 러시아와 경제적·민족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러시아와의 무역에서 누리던 특혜를 유지하려 했고, 우크라이나가 EU의 준회원국이나 정회원국이 될 경우 서방 국가들과의 경제적 경쟁에 직면할 것을 두려워했다. 이들은 보수적 이해관계라고 부를 만한 것을 대표했다. 옐친 시대에 ‘붉은 경영자들(Red Directors)’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이 올리가르히로 변모한 셈이다. 그러나 이셴코는 이들에 대한 지지가 노동자들의 열성적인 지지라기보다 노동자들의 수동성에 의존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얕았다고 주장한다.
‘동부 올리가르히’는 ‘서부 올리가르히’와 도시 부르주아지보다 언론과 나머지 주민들에게 덜 매력적이었다. 후자의 집단이 더 세련됐고 고학력 전문직을 많이 포함했기 때문이다. 키이우와 다른 대도시의 언론계는 이셴코가 ‘민족자유주의 도시 중산층’이라고 부르는 집단이 지배했다. 이들은 서방 기업과의 계약이나 서방 NGO에서 돈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을 매판 부르주아지로 볼 수도 있었다.
‘서부 올리가르히’ 역시 부정한 민영화를 통해 부자가 됐지만 사업에서는 서방을 지향했다. 이들은 복잡한 역할을 했다. 때로는 극우 세력과 손을 잡았고, 다른 때에는 민족자유주의 연합과 함께했다. 페트로 포로셴코(Petro Poroshenko)가 아마 가장 잘 알려진 사례일 것이다. 그는 야누코비치 축출 이후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됐다. 그 자신도 올리가르히였던 포로셴코는 민족자유주의적 입장에서 극우 쪽으로 이동했고, 이 때문에 다음 선거에서 젤렌스키는 자신을 평화 후보로 내세워 결선투표에서 73%를 얻으며 압승할 수 있었다.
이셴코는 서부 올리가르히들이 이런 양면적인 태도를 취한 핵심 이유가 부패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원칙적으로 이들은 유럽연합과 더 가까워지는 것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들의 계약에 대한 더 강한 감시와 부패에 대한 더 엄격한 통제를 뜻할 때는 달랐다. 유럽과 관계를 가까이하면서 따라올 투명성 강화와 부패 통제는 이들에게 늘 문제가 됐다. 그래서 때로는 부패처럼 ‘사소한’ 주제에 관심이 없던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2014년 제한전과 돈바스 반란을 거치면서 세 번째 집단, 즉 ‘동부 올리가르히’와 노동자들은 국내 정치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이들은 분리주의 세력이나 러시아군에 합류했거나, 러시아 또는 반마이단 우크라이나 세력이 영토를 장악하면서 우크라이나 정치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 결과 현장에는 민족자유주의 도시 부르주아지와 무장대대를 거느린 우파라는 두 사회계급만 남았다. 후자는 전쟁에서 가장 큰 부담을 떠맡았고, 나는 전쟁이 끝나면 이들이 정부의 최고위직을 차지하려 할 것이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지난 10년 동안 완전히 사라진 집단도 하나 있다. 이셴코는 서문에서 자신과 가족이 이 집단에 속한다고 암시한다. 이들은 이른바 ‘잘못된 우크라이나인들’ 또는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인들’이다. 이들은 소비에트화된 도시 중산층으로, 기술 지식인층이든 자유주의 지식인층이든 사회주의적 가치를 공유하면서도 소비에트식 순응주의는 거부했다. 이들은 소련과 함께 형성된 진보적 가치도 받아들였다. 여기에는 언어를 민족주의의 표지로 보지 않고 의사소통의 도구로 보는 태도도 포함됐다.
이셴코는 서문에서 수사적으로 이렇게 묻는다. “우리 가족의 우크라이나어 사용자들은 러시아어를 쓸 때 억압받는다고 느꼈는가? 정반대였다. 러시아어는 그들이 사랑하는 배우자의 언어였고, 대도시와 고등교육의 언어였으며, 기술 지식인층에 속한 동료와 친구 대부분이 사용하는 언어였다. 수백만의 다른 우크라이나 가정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 러시아어는 억압의 언어가 아니라 사회적 상승의 언어였다.”
한 극단주의 집단이 다른 극단주의 집단과 맞서는 모든 전쟁에서 그렇듯 중간에 있던 사람들은 양쪽에서 밀려난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제거되고, 때로는 육체적으로도 제거된다.
게다가 이들에게 가장 가까웠을 가능성이 있는 정당인 우크라이나 공산당은 2012년 선거에서 13%를 득표했지만, 이른바 탈공산화 과정이 한창이던 2019년 금지됐다. ‘잘못된 우크라이나인들’은 먼저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의 평화로운 공존을 주장하는 모든 집단을 겨냥한 정부의 의도적인 조치로 무너졌다. 이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면서 또다시 무너졌다. 이셴코가 지적하듯 러시아의 침략 이전에 아무리 친러시아적이라고 여겼던 집단이나 정당이라도 돈바스 밖에서는 침공을 지지하고 나선 곳이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전쟁 뒤에는 민족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우파 민족주의자라는 두 주요 집단이 남을 것이다. 후자는 구성원들에게 이권을 배분하는 정치자본주의와 후견주의 형태를 선호할 가능성이 크다. 전쟁이 끝난 뒤 전직 군인과 전투원들이 자신들이 치른 희생에 대해 특별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민족주의자들이 최고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고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한다면 매우 분명한 의제를 갖고 움직일 것이다. 러시아에 대한 복수(l’armée de la revanche), 점령지 탈환이 그 중심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젤렌스키가 언젠가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는 것처럼 우크라이나를 언제든 러시아에 달려들 준비가 된 거대한 무장 진영으로 만들 것이다.
전후 우크라이나가 될 수 있는 매우 낙관적인 모델은 한국이다. 한국은 서방의 보호 아래 매우 번영하는 국가로 발전했고, 첨단기술과 활기찬 예술을 갖췄다. 반대로 나쁜 경우에는 우크라이나가 남베트남처럼 될 수 있다. 극심한 정치 불안정, 수명이 짧은 정부, 높은 수준의 부패, 인구 감소, 그리고 어쩌면 대의제도의 전반적인 붕괴가 나타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전후 우크라이나는 전쟁 이전의 우크라이나와 비슷해질 수도 있다. 2000년부터 2022년 사이 우크라이나에는 대통령 4명과 총리 7명이 있었고 총선은 5차례 치러졌다. 다만 불안정의 한 원인이었던 서부와 동부의 정치적 선호 차이는 국가 분할로 사라졌을 것이다.
1940년대 후반 영국 역사학자 A. J. P. 테일러(A. J. P. Taylor)는 1809년부터 1916년까지 합스부르크 왕조를 연구하고 중·동유럽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다민족사회를 만들려 했던 모든 실패한 시도를 검토한 뒤, 중·동유럽에서 그런 사회가 과연 가능한가라는 수사적 질문을 던졌다. 그는 티토의 유고슬라비아가 살아남는다면 그 답을 줄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유고슬라비아가 폭력적으로 해체되던 시기에 테일러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그 책이 간접적으로나마 왜 중·동유럽에서 그런 국가가 존재할 수 없는지를 설명하는 데 가장 유용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우크라이나의 해체를 이해하기 위해 다시 A. J. P. 테일러에게 돌아가야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크라이나에도 같은 패턴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패턴이 더 동쪽, 러시아연방까지 확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출처] Between South Korea and South Vietnam – by Branko Milanovic
[번역] 하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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