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군사개입 지지를 둘러싼 국제사면위원회의 내부 분열

「세계사회주의웹사이트」 8/25 리차드 타일러

국제사면위원회(이하 엠네스티) 보고서 2000은 21세기가 밝아오는 시점에서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처절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지난해에 벌어졌던 광범위한 인권 탄압에 대해 세부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자의적인 체포·구속·고문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표현 및 결사의 자유라는 민주적 기본권에 반하는 모든 대륙에서의 폭력적 상황들에 대해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특히 올해의 보고서는 엠네스티 사무총장인 피에르 사네가 서문을 통해 엠네스티 조직 내의 위기를 지적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그는 서문에서 “외세의 침략과 폭격이 인권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리고 외부의 군사개입이 인권에 대한 존중을 이끌어내는데 성공적이었나?”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사네는 계속해서 “대규모적인 인권탄압에 맞서기 위해 외부의 군사개입을 이용하는 것에 관한 인권 단체들과 유엔 내부 논쟁의 핵심에 이러한 쟁점들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그는 전통적으로 엠네스티를 지지해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주요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시대 스타일의 정책과 직접적인 군사개입(이것의 전형은 1999년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폭격이다)으로의 전환에 대해 보이는 정치적 반응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그것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들은 인권탄압 중단이라는 명목 하에 자신들이 초기에 가지고 있었던 평화주의 경향을 포기하고 작고,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뒤진 국가들에 대한 서방의 군사력 사용을 공개적으로 받아들인 일군의 자유주의자들과 탈급진주의자들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사네는 엠네스티가 군사 개입을 지지하고 나서야 한다는 압력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있다. “엠네스티 구성원들에게 있어 [군사적 개입을 인정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관한] 이 논쟁은… 개별 희생자들에게 초점을 두어온 엠네스티의 전통적인 방식이 혼란스런 상황과 대규모 인권탄압에 직면해서는 비효과적일 것이라는 낭패감에 의해 더욱 확대되었다.” 따라서 “엠네스티의 개별 성원들 중 다수가 군사적 개입이 논리적인 다음의 수순이며… 그리고 인권 침해를 막거나 종식시키기 위해 군인을 배치해야만 하는 환경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그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요구하고 있는 군사적 개입에 대한 분명한 지지 선언에 반대하면서 이들의 이러한 방식은 인종분쟁과 인권 탄압을 종식시킨다는 자신들의 정식 목표도 달성하지 못했다고 특별히 언급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은 엠네스티 내에 왜 이런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지를 강조할 뿐이다.

사네는 (“엠네스티는 인권의 위기 상황에 외국 군대가 배치되어야 하는지, 아니어야 하는 지에 대한 입장 표명을 오랫동안 거부해왔다. 우리는 그러한 개입을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라는) 빌라도 총독과 같은 불편부당한 척하는 발언들과 “엠네스티는 폭력의 사용은 물론이거니와 치명적인 무력에 대해서도 거부하지 않는다”라는 뻔뻔한 확언들 사이에서 확실한 입장 정리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엠네스티의 군사 개입 지지에 대한 그의 유일한 경고성 발언은 군사개입을 유엔 당국의 권위 하에 수행되어야 한다는 주장뿐이었다. 그는 군사 개입이 유엔의 사전 승인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제출한 기준에 관해 적극 지지하면서 무력 사용은 “시민과 환경에 미칠 영향에 주의하면서… 제한적이고 균형감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각국 정부들이 그들 자신의 이유를 위해 그러한 행위와 작전을 벌이고 “어느 정도의 정치화와 국가적 이기심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결과 “인도주의의 요소는 신뢰여야 한다…”는 변명을 하고 있다.

엠네스티의 역사

군사개입의 지지를 얻어내려는 엠네스티 내 로비가 상당하게 출현하고 있으며 이것은 이 조직이 건설된 정치적 전망과 세계 정치, 특히 소비에트 연방과 동유럽의 붕괴라는 중대한 역사적 변화로 인한 영향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사네가 인정하는 현재 위기의 근원은 아마도 엠네스티의 “비정치적”, 그리고 “비계급적”인 전망에 있을 것이다. 엠네스티는 영국 변호사 피터 베넨슨이 “양심수” 여섯 명이 처한 절박한 사정을 알려낸 기사를 쓴 뒤인 1961년에 건설되었다. 베넨슨이 시작한 그 캠페인의 목적은 여론을 동원해 구속자들을 석방하도록 불법적인 정부들에 대해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베넨슨은 엠네스티 사업에 기초를 이루는 “불평부당함”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여론의 힘이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그것은] 국제적이고 비당파적이며, 모든 부문에 걸쳐 널리 기반을 가져야 한다”고 썼다.

엠네스티는 건설 초기부터 인권 탄압을 자행하는 각기 다른 정권들 사이의 어떠한 정치적 차이에 대해서도 구별짓는 것을 거부했다. 소속 단체들은 “어디에서 발생했고, 누구에게 책임이 있으며, 억압받는 이념이 무엇인지에 상관없이 모든 박해에 대해 비난할 자세를 갖추고 있다”면 언제나 분명한 환대를 받았다. 1961년 문서에서 관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가 선택한 “양심수” 여섯 명에는 루마니아의 철학자, 미국 시민권 활동가, 포르투갈 식민 치아에서 구속된 앙골라 시인, 체코슬로바키아의 대주교, 그리스의 노조활동가, 헝가리의 추기경이 포함되어 있었다.

엠네스티 건설 첫 해는 상당수의 노동자들과 중산층의 급진화에 행보를 같이 했다. 엠네스티 초기 구성원들은 자유주의적 성향의 교수들, 특히 교육에 관련된 교수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었다.

1960년대는 미국에서의 대중적인 시민권 운동의 출현, 베트남 전쟁 발발,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다수의 무장 게릴라 운동, 그리고 1968년 5∼6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총파업을 비롯해 유럽 전역에서의 계급투쟁의 급증 등으로 장식되었다. 이기간은 서구 열강과 스탈린주의 정권 사이의 냉전이 국제적인 정치 관계를 지배한 시기이기도 했다. 소비에트 연방 스탈린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의 그릇된 동일시는 “공산주의 위협”에 대한 서구의 비난 선전을 계속해서 강화했다. 많은 보통 사람들이 크렘믈린과 그 위성국가들이 저지른 범죄들로 인해 사회주의적 해법 추구에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최소한 스탈린주의 관료주의가 가져온 치안 폭정이나 다수의 저개발 국가들의 억압적인 정권들과 비교해 볼 때, 발전된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이 불완전하나마 하나의 민주적 발전의 모델을 제공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엠네스티가 취한 명목상의 비당파적 입장은 또한 서구 노동자·사민주의 정당, 노조들의 정치가 파탄에 처함으로써 그 신뢰를 더욱 인정받게 된다. 여전히 수백만 노동자들에 대한 지지를 지도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을 때도, 이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힘을 민주적 권리들에 대한 자주적인 수호를 위해 동원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정부의 선전선동과 군사적 모험을 지지하거나 유엔을 보편적인 민주적인 행위 규범의 수호자로 떠받쳤다. 이 당들 보다 더 큰 유럽 공산당들 내부에서 반대의견이 제출되었을 정도였지만 그것은 크레믈린 노선을 비굴하게 따르거나 그 탄압에 대해 비판적인 변명서를 내놓을 뿐인 스탈린주의자들과 그 일당들이 주도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엠네스티는 자유주의적 중간 계급의 정치적 편견을 그대로 견지하고 있다. 또한 유엔과 1948년 유엔에서 채택된 세계 인권선언을 떠받치며 엠네스티가 기반하고 있는 인도주의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면밀하게 살펴보면 이러한 주장이 갖는 정치적 맹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유엔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전세계 국가 공동체”의 대표로 상정되며 탄생했다. 그러나 유엔은 출발에서부터 세계 주요 열강들이 영향력 확대를 둘러싼 경쟁을 벌이고 서로간에는 물론이거니와 작고 약한 국가들로부터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터로 작용했다. 사실상 세계 자본주의의 “국제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두에 대한 각각의 계속적인 투쟁이다. 유엔의 정치적 방침은 언제나 사회 혁명의 위협에 맞서 자본주의 체제를 방어하는 식이었다. “자본주의와의 평화적 공존” 정책에 따라 스탈린주의 관료체제가 유엔을 받아들였을 때만이 이 중심 사실이 부분적으로 가려질 수 있었다. 유엔 인권선언은 이러한 정신적 목표 속에서 마련되었다. 자유, 정의, 평화라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들이 몇몇 조항을 통해 선언되었지만 17조는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요소인 사유 재산에 대한 권리를 담고 있다. 더욱이 이 선언문의 서문은 시민 봉기나 혁명의 경우에 유엔의 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약 인류가 압제와 억압에 맞선 최후의 수단으로 반란에 의지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법률에 의한 인권 보호가 필수적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럼으로써 엠네스티는 인권탄압으로 인해 공포에 떨고 있던 수많은 개인들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지만 스탈린주의로부터 배척당하고 정치적으로는 서구 자본주의에서 두드러지진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무비판적이었다. 엠네스티는 민주적 기본권을 수호함에 있어 노동자들이 정치적 결집에 기반한 전망을 위해 인도주의적 항의를 벌이는 것을 반대하면서, 심지어 엠네스티는 “정부 체제의 변화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고 떠들어댔다. 엠네스티 지지자들은 1980년대에 극적으로 증가를 했는데, 이 기간은 공식 노동자 운동이 자유시장 정책을 끌어 앉고 한때 옹호했던 개혁주의적 정책들을 포기함으로써 급격히 쇠퇴하고 퇴보하던 시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공식 노동 운동의 우경화 경향을 단일 쟁점의 “비정치적” 조직만이 생존 가능하고 효과적이라는 사실의 증거로 댔다. 엠네스티는 대학과 몇몇 유명한 음악가들과 예술가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면서 성장했다. 이러한 흐름으로 인해 엠네스티의 재정적 자원은 증가되었고 상근자 수도 상당한 수준으로 확대되었으며, 많은 국가에서 지부 사무실이 개설되었다. 엠네스티는 비교적 소규모의 항의 집단이라는 존재로 시작되어 이제는 유엔이나 유럽연합과 같은 몇몇 국제적인 조직들과 더불어 준공식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와 “신세계 질서”

엠네스티가 조직적으로 가장 막강해 보이는 그 순간에, 그리고 그것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정치적 원칙이 의기양양 퍼져나가며 선언되었던 시기에 최대의 위기를 경험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1990년대 소비에트 연방과 동유럽 스탈린주의의 붕괴는 “신세계질서”의 시작으로 환호되었다. “공산주의”는 실패로 선언되었고 자유주의적 민주 가치는 보편적이고 무소불위(심지어 한 근시안적인 이데올로그는 “역사의 종말”이라고 포고하기까지 했다)의 추앙되었다.

그러나 냉전의 종말은 민주화와 인도주의가 꽃을 피우는 대신 광범위한 사회적 격변, 빈곤, 억압을 가져왔다. 발발한 전쟁과 내전은 엠네스티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던, 외관상으로는 결코 끝나지 않는 인간 비극의 흐름을 빚어냈다.세계는 다시 군사주의와 식민지주의의 부활을 목도했다. 미국이라는 가장 공격적인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선언된 “신세계질서”는 이라크 킬링필드에서 오싹한 시범을 보여주었다.

페르시아만(걸프만)에 안전하게 정박한 미국 전투함대에서 쏟아내는 초정밀 폭탄들이 이라크의 대공 방위능력을 훨씬 넘는 3만 피트 상공에서 떨어져 바그다드에 비오듯 떨어졌다. 한 때 그 지역에서 경제적으로 (심지어 사회적으로도) 발전한 국가 중 하나로 간주된 한 국가가 폭격으로 인해 중세로 되돌려졌고 이 모두는 인권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사네의 전임자인 이안 마틴은 1993년 하버드 로스쿨에서 있었던 연설에서, 엠네스티가

“국가들 사이의 주요 균열이 대부분 동과 서의 이데올로기적 분열이었던” 냉전의 최절정에서 만들어진 이후 있었던 급격한 변화들에 관해 지적했다. 그는 “현재 인권운동은 그것이 형성되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맥락 속에서 스스로 발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신세계 질서 : 인권을 위한 기회인가 위협인가?”라는 강연에서 이미 엠네스티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적 딜레마를 지적하고 있었다. 예전의 자유주의 지식인들 중 상당수가 소비에트연방과 동유럽에서의 스탈린주의 붕괴로 인해 이제 서구 열강만이 정치적 안정과 인도주의적 탄압을 막아낼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결론지은 바 있다. “오늘날 인권 위기의 대부분은 (소말리아와 보스니아에서 가장 분명히 보여지듯이) 군사적 개입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고 단언하면서 “일부는 소말리아에 대한 미국 주도의 인도주의적 군사 개입을 요구해왔고, 일부는 현재 보스니아에 대한 무력 개입을 주장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네가 그랬던 것과 똑같이 그는 “인도주의를 근거로 한 군사 개입에 대해 인권운동 내에서, 그리고 특히 미국에서 너무 쉽게 열렬히 환호하는 것에 대해 경계”했다.

그러나 개입이 있어왔던 예들을 놓고 볼 때 서방의 군사 개입에 대한 지지는 엠네스티가 역사적으로 해왔던 정치, 사회적 궤적에서 거의 일반적인 규범이 되었다. 한때 전쟁 반대를 외쳤던 정당들은 가장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다. 이것은 독일 녹색당의 변모에서 가장 괴기스럽게 드러난다. 1990년 말 녹색당 당수 요슈카 피셔와 다니엘 콩방디는 이라크 폭격에 반대하면서 “석유를 위해 흘리는 피에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피셔는 현재 독일 외무장관이고 그가 속한 당은 독일 군인들이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히틀러 치하 독일군에 의한 지난번 개입이 야기한 비참한 결과를 기억하고 있는 지역인) 발칸에서의 군사작전을 한번 더 수행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최전선에 있었다.

유엔

엠네스티 지도부는 “세계 공동체”의 대표기구인 유엔의 도덕적 권위를 되풀이해서 강조할 뿐 현재 저속한 지식인들의 친군사주의적 주장들에 대해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분명한 잘못이다. 지난해 세르비아에 대한 공격은 나토에 의해 일방적으로 착수되었고 유엔은 이미 사태가 진행된 후에야 이 폭격을 공식 인정했다. 미 정치관료들은 유엔에 경멸적인 태도를 보이며 위협을 하거나 (1999년 미국은 주요 유엔 회원국의 분담금 중에서 약 12억 9천 3백만 달러를 체불하고 있다) 유엔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생각대로 어디에든지 행동에 착수한다. 워싱턴은 일반적으로 유엔을 전세계에 걸친 미국의 행위에 대해 도장을 찍어주거나 합리화해주는 기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유엔은 중립적인 중재자가 아니며 사네 스스로 서문에서 이를 충분히 시인하고 있다. “유엔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군사적 개입은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는 간에 군대 뒤에 있는 정부의 전략적 이해에 연결되어 있다.” 유럽 강대국들 중에서는 프랑스처럼 유엔을 나토에서의 미국 헤게모니를 견제할 수 있는 필수적인 기제로 간주하는 국가도 있다.

사네가 언급하고 있는 엠네스티 내부 위기는 근본적으로 볼 때 인권 수호를 기존 사회 질서에 종속시키는 그 이데올로기적 전망의 파산과 연결되어 있다. 노동계급은 근본적인 민주적 권리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인권에 대한 탄압에 대해서도 자주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그들은 탄압이 어디에서 발생하든지 간에 무관심할 수 없으며, 그러나 또한 제국주의 열강들이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연출하는 그 역할의 진실에 대해서도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경제적으로 후진국이나 전 식민지 국가에서 발생하는 인권 탄압에 대한 반대는 주요 강대국들과 전 식민지 종주국에 대한 지지에 기초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세계 각국의 수많은 정부들의 억압적 성격은 결국 수세기 동안의 제국주의적 압제로 인한 경제, 사회적 후진성의 결과물이다. 더욱이 인권 탄압이 노동자 계급에 대한 정치적 억압을 향하고 있어 그 정권들은 서방 강대국에 의한 공식적이거나 혹은 암묵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주요 강대국들의 정치, 경제적 야망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나 유고슬라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경우처럼 정권들과의 분쟁을 초래할 때만 “인권 보호”와 “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목으로 개입하여 돈에 눈먼 자신들의 야망을 가리려한다. 이라크, 소말리아, 발칸에서 경험한 이후에도 이러한 이중성을 계속 믿는 사람들은 가장 추악한 자기 기만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반드시 짚어야 할 중요한 결론은 만연한 인권탄압과 전쟁의 근원이 되는 체제의 본질에 대한 비판적인 대응이 없이는, 그리고 제국주의가 그 주요한 원천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그러한 탄압에 반대하는 효과적인 정책을 공식화하기란 불가능하다. 민주적 기본권에 대한 수호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적 세계 질서를 수용하는 것으로 틀지워 진다면 강대국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암묵적으로 방어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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