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로세비치 몰락 배후의 서구의 조작
[세계사회주의웹사이트] 10/13 크리스 마스든
서구 언론들은 일치된 시각으로 밀로세비치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의 하야를 자생적인
대중적 민주 혁명의 결과로 파악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베오그라드의 상황을 행동에 나선 “민중 권력”으로 묘사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대중을 기만하려하는 것일 뿐임을 보여주는 압도적인 증거들이 존재한다.
서구 언론의 목적은 그들도 이미 파악하고 있는 바, 미국과 유럽 열강들이 꾸며낸 정
치적 쿠데타에 적법성을 실어주는 것이었으며, 발칸 반도에 대한 그들의 당연한 통제권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밀로세비치의 정치와 그 어떤 근본적인 차이도 없는 세르비아 지배 엘리트 분파와의 연대를 한 축으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언론 보도의 한 예는 10월 8일자 [옵저버]지 8판의 닐 아스처슨의 기사
이다.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는 10월 5일의 사태에 대해 이렇게 단언한다. “그 어떤 지도자도, 그 어떤 실질적인 지도부도, 심지어 그 어떤 영웅도 아니었다… 혁명이라는 것은 항상 그러했다. 세계는 베오그라드에서 진정한 혁명을 목격했던 것이다.”
사실 지도자들도, 실질적인 지도부도 수없이 존재했다. [옵저버]지는 그 점을 분명히
알고 있다. 세르비아 민주야당(DOS)의 선거 캠페인에 미국과 유럽이 지원한 수백만 달러의 자금과 최고 수준의 자문단, 수백에 이르는 지원인력 등이 매달린 것은 대중적 조작의 문제였다. [뉴욕 타임스]가 명명한 바 있는 부다페스트의 “유고슬라비아 망명 대사관”을 이끌었던 것은 전직 미국 외교관 윌리엄 몽고메리였으며, 그가 실질적으로 이 캠페인의 대부분을 지휘했다.
자금과 전문적 능력은 정부 기관을 통해 직접적으로 지원되기도 했으며, 독일의 프리
드리히 에버트 재단이나 미국의 프리덤 하우스 등과 같은 비정부기구들을 통해 지원되기도 했다. 이들은 야당의 언론 네트워크에 대한 주요한 지원 세력이었다.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은 독일 제국주의가 자신의 이익을 지구적으로 관철시키는 주
요한 매개물 중 하나이다. 프리덤 하우스는 지도급 민주, 공화당 인사들 및 기업, 노조 지도자들과 더불어 미국에 우호적인 친자본주의 운동을 육성한다. 프리덤 하우스를 지원하는 곳 중에는 민주주의를 위한 전국기금과 같은 준공식적인 기구들도 있다. 이 기구는 다양한 미 정부 기관들과 국제민간기업센터 등으로부터 기금을 받고 있다. 프리덤 하우스는 공공연하게 자신들이 자발적인 “미국인 전문가들”을 지원하고 있으며, “세르비아 정당인들”을 훈련시키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서구 열강들이 설정한 과제는 밀로세비치 체제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불만을 도발하
는 것이었으며, 그들이 선택한 세르비아민주야당내의 대표자들을 그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었다. 풍부한 자금 지원을 받는 정교한 선거 및 선전 네트워크로도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엔 충분하지 않았다. 세르비아민주야당은 바로 얼마 전에 베오그라드를 폭격했던 나토 열강들의 수족처럼 보일 정도로 깊은 의심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과 유럽은 양면의 전술을 구사했다. 한편으로는 이미 야당 세력이 통제하고 있는 지역에 사회적 지원을 구축하는 것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나름의 전략과 함께 국가보안군과 경찰, 군대 내에서 지배 분파의 협력을 확보해내는 일이었다.
이번 주 독일 [슈피겔]지는 이러한 기존의 전략에 대해 개략적인 설명을 내놓았다. [
슈피겔]지는 밀로세비치를 내몰기 위한 세르비아민주야당의 캠페인에 있어서 미국의 주도적인 역할을 인정했지만 사실 그 기사의 초점은 독일 정부가 수행한 상당한 역할이었다. “넉 달 동안 (독일) 연방정부는 간헐적이지만 의도적으로 세르비아 야당의 반 밀로세비치 운동을 지원했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여타 서구 열강들의 경우처럼 베를린으로부터의 실질적인 정치적, 물질적 지원 역시
반대 세력과 정당들이 밀로세비치를 하야시키고 정부를 전복시킬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세르비아민주야당의 선거 도전이 처음 제기된 배경에 있어서도 [슈피겔]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작년 12월 17일, (독일 외무장관) 피셔와 (미 국무장관) 올브라이트는
G-8 회의를 틈타 베를린 부다페스트거리에 있는 인테르콘티 호텔의 밀실에서 유고슬라비아의 가장 저명한 반정부 인사들을 만났다. 조란 진치와 부크 드라스코비치가 이 과정에 참여했다. 사실 이들은 밀로세비치에 반대하는 인사들이긴 하지만 결코 서로 단결할 수 없었던 이들이었다. 이 회합의 한 참여자는 지금에 와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시 반대 세력이 들었던 것은 엄한 꾸지람이었다.'”
“사실 기꺼이 협력할 의향이 있었던 밀로세비치의 반대자들은 그때까지도 거의 무명이
었던 코슈투니차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는데 동의했다. 당시 논의를 통해 예측불허의 인민주의자였던 드라스코비치에 대한 그 어떤 지원도 철회되었던 것이다.”
“대부분 미국으로부터 지원된 거의 3천만 달러의 자금이 부다페스트의 사무실을 통해
이 나라로 흘러들었다. 컴퓨터와 전화, 사무집기 등 선거운동에 필요한 장비들을 야당에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백명에 달하는 선거조력자들이 국외에서 임무를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슈피겔]지의 단언이다. 그 결과로, “선거 당일에 이르러서 야당은 상당한 장비를 갖추고 밀로세비치보다 선거 결과를 더 잘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선거조력자들은 약 9천 2백개에 달하는 투표소 중 180개 정도의 개표를 모니터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라디오 네트워크를 통해 야당 선거본부로 그 결과를 바로 보낼 수 있었다.” 독일 정부는 또한 야당측 신문과 라디오, TV 방송국 등을 운영하기 위해 거의 4백만 마르크나 되는 자금과 물적 지원을 제공했다. 한편 독일 해외방송인 도이체 벨레는 1999년 한 해에만 거의 1천만 마르크를 투자했다. 야당 세력을 위한 사회적 기반을 확보하는 캠페인은 유고슬라비아 지방 주들에서 반밀로세비치 정서를 구축하는데 쏟아 부어진 움직임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1996년과 1997년 선거에서 밀로세비치에 반대했던 도시 혹은 지역들의 정치인들, 단체 및 정당들은 그 대가로 재정적 지원을 받았던 것이다. 독일은 자국 도시들을 자신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유고슬라비아의 수혜 지역과 “자매결연”시키는 등으로 그러한 술책을 관철시켰다. “이러한 방식으로 약 4천 5백만 마르크(2천만 달러) 정도의 자금이 야당이 통제하는 40여개의 도시들로 직접 흘러들었다. 서방측이 지원하는 이런 거대 계획들은 ‘평화를 위한 동력’, ‘평화를 위한 교육’ 혹은 ‘평화를 위한 길닦기’ 등으로 포장되었다.”
전 사민당 의원 요세프 포젠이 주도하는 이 계획에는 16개의 독일 도시들과 41개의
유럽 지자체들, 그리고 미국 오하이오 주의 네 지역이 참여했다. “도시간 자매결연은 독일을 비롯한 여타 국가들이 유고슬라비아의 야당을 직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분명한 속임수이다.” [슈피겔]지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현재 자매결연한 도시들로 보내진 16,951,800 마르크(750만 달러)의 현찰은 사실상 안정화협약 이행을 위한 대외관계청 기금에서 나왔다. 일단 이 계획에 참여한 많은 독일 지자체들은 또한 자신들의 시 재정에서 가외의 돈을 더 제공했다.” 야당의 지위는 그렇게 당근과 채찍이라는 고전적인 양면전술을 통해 재강화되었다. 세르비아 인민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바로 이러했다. 즉 코슈투니차의 대권 도전을 지지하고 서구의 환대를 받던가, 아니면 밀로세비치를 지지하고 지속적인 봉쇄와 전쟁 재발의 위협에 직면하는 것이었다.
서구 전략의 두 번째 측면은 비밀경찰과 군 세력이 밀로세비치의 대체 가능성을 인정
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10월 5일 실제로 진행된 일련의 상황들을 설명하는 보고들을 통해 알 수 있다.
10월 9일 [가디언]지는 정예 63 공수여단 특수부대원이었던 지반 마르코비치와의 인터
뷰를 실었다. 마르코비치는 연방의회와 국영방송국 점거의 선두에 선 것은 100명 이상의 전현직 군인들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의 점거는 건물을 경비하기로 되어있던 경찰 동조세력과 연계를 통해 가능했다는 것이다.
“경찰과 준경찰민병대 출신의 반테러 특수부대 병력이 개입되어 있었다.” 그는 1만명
정도가 무기를 들고 있었다는 유고슬라비아 언론의 보도를 인용하기를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마르코비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또다른 근거는 [뉴욕 타임스]와 영국 채널 4 텔레비
전의 보도이다. 베오그라드로부터 60마일 정도 떨어진 카착의 연방의회 건물 점거에 있어서의 핵심 고리가 무엇이었는가에 관한 것이다.
카착의 시장 벨릭 일리치는 부크 드라스코비치가 이끌던 야당인 세르비아재건운동의
주도적 인사였으며 현재는 신세르비아당을 이끌고 있다. 그는 언론에 정예 세르비아 내무부 소속 네 명의 경찰 고위 인사들과 함께 연방의회 점거를 계획하고 조직했다고 밝혔다. 이들의 인도로 일리치는 10월 5일로부터 최소한 한달 전에 이미 수도를 점거할 핵심팀을 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는 유고슬라비아군 출신의 젊은 전문가들과 공수부대원들, 그리고 젊은 경찰들로 이뤄진 팀을 꾸렸으며, 내무부 소속의 베오그라드 경찰 최정예 부대와 함께 작업을 진행
했다. 무도 전문가들과 직업권투선수들도 우리측에 참여하고 있었다. 우리는 심지어 인
근 도시들에서 사복 경찰들과도 함께 일을 추진했다.” 일리치가 [뉴욕 타임스]에 한 말이다.
10월 5일 이른 아침, 1만명의 사람들이 호위 속에 카착을 출발했다. 이것은 채널 4의
화면에 담겼다. 이 인원이 베오그라드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일리치는 의사당의 실제적인 점거가 자신의 비밀경찰과의 공모로 계획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비밀경찰의 이런 행동은 오후 세시에서 세시 반 사이 있었던 건물 호위 경찰에 대한 대중적 불복종과 함께 진행되었다.
반 밀로세비치 행동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던 이 사태가 제국주의 열강과 세르
비아 비밀경찰에 의해 계획되고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밀로세비치의 몰락은 “인민 권력”의 시위 때문이기는 커녕 서구의 정치적 관심의 산물이었다. 또한 그것이 종종 주장되듯 민주 혁명이라기보다는 궁정 쿠데타의 근대적 변형이었다는 점에서 정점을 이룬다.
10월 6일 자 [뉴욕 타임스] 기사에서 로버트 D. 카플란은 왜 서구 언론이 그토록 10월 5일의 사건에 대해 열광했는지에 관한 가장 극명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베오그라드의 당시 상황은 미국이 가진 힘의 시위였던 것이다.
“나토는 이제 진정으로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의 제국주의적 지배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러시아가 발칸에서 휘둘렀던 역사적 권력을 대치하는 것이었다. 클린턴 대통령과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압도적인 힘이야말로 자신들이 가진 가치관의 확산을 위한 필수조건이라는 현실주의적 원칙을 적용시킬 수 있는 자격과 역량을 가진 것이다. 1930년대 돈과 정보력, 제도 언론 등과 여타 원조를 통해 발칸의 토착 정당들을 지원하고 군사적인 압력을 행사했던 것은 나치였다. 당시 파시스트적 관념이 우세종이었다는 것은 놀랄만한 사실도 아니다.”
카플란은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는 발칸과 여타 지역에서 열린 사회의 확산이 필연적
으로 자연스런 발전일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서는 안된다. 조용하고 은밀하긴 하지만 그것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권위 확산의 직접적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이 지역민들은 이제 그것을 어울려 지낼 수 있을 만큼 구미에 맞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서구는 단지 밀로세비치 체제의 지극히 반동적인 성격 때문에 유고슬라비아의 정치적
상황을 어느 정도 조작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1980년대 부상한 여타 인종-민족주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대세르비아 국수주의는 인종 분포에 따른 유고슬라비아의 분열과 서구 자본의 경제적 틈입을 향한 길을 텄으며, 발칸 지역의 다양한 인종 집단간의 혈 충돌이 뒤이었다.
그러나 밀로세비치 체제가 얼마나 타도되어야 마땅한 체제였든지 간에, 이러한 붕괴의 방식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발칸의 진정한 민주적, 사회적 재생은 서구 열강의 정치적 보호와 그들 편에 선 토착 매국노들의 입김 아래선 결코 달성되지 않는다. 오직 이 지역 노동 계급의 단결과 자주적인 정치적 동원에 의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10월 5일 응원부대처럼 행동했던 언론은 이렇게 진정으로 민주적인 대중 동원에는 적대감만을 보이게 될 것이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