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메랑의 진실

– 평화연대 3호 초점 중 中 <길없는 거리, 일상적 시선의 두려움>에 대한 반론

손호진 (sonhj96@hanmail.net)

석기시대에 만들어진 킬리라는 무기는 곡선 혹은 불규칙한 궤적을 그리며 목표물로 날아가는 거의 1회성에 가까운 무기였다. 하지만 이 킬리라는 무기가 가지는 불규칙한 비행 때문에 자신의 손에 익지 않은 자는 종종 킬리를 잃어버리거나 아님 무기 다루는 것을 연습하기가 아주 힘들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바로 부메랑이다. 가볍고 또한 치명적이지 않는데다 목표물을 선회하면서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기능까지 갖춘 간단하게 말하면 킬리의 연습용 기제였던 것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을 1차적으로 무기 혹은 기제들을 만들어 낼 때 자신의 안전을 보호하는 측면과 그 활용성을 좀더 세련되게 하려는 노력성까지 모두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정보와 통신의 기술을 말하면서 우리는 이 부메랑 효과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많이 연관시키게 된다. 오히려 가속력이 붙어버린 이 기제가 자신을 헤치는 것으로 간주하는 듯한 결론을 제시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부메랑이라는 것은 어디까지 개인의 역량문제이며 선택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Know Where.

정보와 통신 기술의 발달은 불과 몇 년 동안 놀랄 정도의 가속력이 붙은 발전을 거듭했다. 내년 11월이면 동영상 전송이 가능한 IMT2000 기술이 서비스되고, 모든 사무실 및 전기제품의 전선은 무선통신망에

의해 움직이는 관계로 이제 창고로 옮겨져야 할 신세가 되었다.

이런 정보와 통신 기술의 파급은 또한 너무 엄청난 것이어서, 산업, 경제, 의료 나아가 정치와 문화에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사례는 어디에서든지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사례들이 가능해진 원인을 3가지로 말하면 우선, 정보의 데이터베이스화와 두 번째로 정보의 복사와 전이의 용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검색기술의 발전이라고 하겠다.

즉, 일례로 유전자 조작을 연구하는 학자는 자신의 데이터베이스에 그 만의 지식체계와 산물들을 저장한다. 이는 누구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신의 학문과 연구를 스스로 체계화하고 정리하고자 하는 목적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체계들은 곧 정보망을 타고 여러 가지 검색 기술들로 인해 공학을 전공하는 사람에게로 유통되게 된다. 그는 이 유전학에 관한 기술을 자신의 테크놀러지에 적용되거나 아님 불완전한 것은 다시 유전학자에게도 피드백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간은 진보와 기술적 발전은 물론 그 기술의 한계성을 뛰어넘거나 오류의 검증을 받게 된다. 즉 하나의 목표물에 다가가기 위한 실행착오는 줄이고 또한 연습하고자 하는 것이 부메랑이 발명된 과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이제 지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가 아니라, 어느 곳에서 이루어지는 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유물과 국가

유물의 발전은 생산성을 증대시키고, 다시 이는 빈부의 격차와 함께 계급이라는 산물을 파생시켰다. 그리고 시장(market)이 생겨나고 도시가 형성되고 그것은 다시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 논의되어야 할 계급론적인 국가관은 잠시 생략하면 이는 명확한 연관성을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 국가라는 개념적 해석을 여러 부분에서 몇 가지의 방안으로 시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법과 질서를 지키는 야경국가의 역할. 또는 빈부의 격차를 줄이는 조정자로서의 역할. 혹은 유통과 생산을 제어하는 개념의 역할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전반적인 국가의 역할론에서 커뮤니케이션은 빠질 수 없는 부분인 것처럼 보인다. 기록하고 다시 알려주는 단계들의 연속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조직을 구성하게 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에 의해서고

또한 위해서 이다. 이는 오늘날을 통해서 볼 때 더욱 명확해 질 수 있

다. 국가의 정보망을 통해 어디에 정보와 자원이 있고, 또한 어디에 인력과 지식이 있는가를 보다 포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사적인 존재나 혹은 단체의 성격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약간의 강제와 또한 제약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다. 오늘날 말하는 국가권력은 이런 부분에서 재해석되어져야 할 필요성이 충분히 있다고 보여진다.

전자주민카드의 치욕?

전자주민카드는 이런 면에서 어찌 보면 각 개인을 코드화해서 정보의 형태로 데이터베이스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요즘과 같은 고질적인 실업 속에서 국가는 개인을 좀더 기능화 시키거나 또는 그 사람의 능력에 맞는 적절한 일자리는 소개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발상이 너무나 현학적이며 오히려 만화적이라고까지 반론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구 총조사 혹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주민등록번호 등은 이미 이런 것들을 수행해오고 있는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즉 시대가 발전하고 현상이 바뀐다면 그것을 돌려놓기보다는 새로운 국면에 적응해 나갈 필요가 있다. 오히려 정보와 통신의 발달로 우리는 조직적으로 국가권력이나 대규모의 권력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공개되는 정보의 소스들로 인해 경제적인 이익은 물론 거대 조직과 대응할 기술도 얻게 된 경우도 이런 것과 맥을 같이 해 봄직하다.

왜 논어인가?

물론 전자주민제는 물론 정보와 통신의 발달로 인해 제기되거나 예견되는 많은 문제점들을 알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기능화 되어간다는 점과 국가권력의 남용과 그 속에서 감시 받고 저항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로의 전락을 맛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같은 것은 스스로도 느낄만한 문제이다.

그렇다면 이것에 대한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오히려 이런 문제에 접하게 되면서 김용옥 선생의 열풍을 생각해 보게 된다. 즉 인간의 주체적인 문제에 대해서 말이다. 결국 정보와 통신의 발달이 인간을 개개인화 시키고 분절화 시키면서도 구조화 또는 기능화 시키는 현상 속에서 더욱 필요한 것이 어쩌면 자신에 대한 깊은 심려와 그리고 잠재의식의 개발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유교가 말하는 성 과 실의 문제인 것이다.

남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스스로 최선을 다하여 결국은 성(成)에 이른다. 라는 명제처럼 말이다. 정보를 다루는 최일선의 사람이나 혹은 그것에 영향받는 사람이나 모두 이러한 자신의 주체와 함께 스스

로의 윤리에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결국 지금까지 파급되는 모든 문제의 원인도 이런 스스로의 주체를 깨버리거나 또는 속이는 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불법적 정보의 유통과 함께 감시하는 권력자. 그것에 맞서는 크래커들처럼 말이다. 다소 현학적인 논리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과거 공산이라는 유토피아적 발상의 요건이 되었던 것 중에 하나도 인민들의 완전한 도덕성 이라는 전제였던 것처럼 앞으로 도래하게 될 새로운 유토피아적인 환경에서도 전제되어야 할 것이 바로 이러한 주체의 자존문제가 될 것이라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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