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지 무기무역에 대한 이야기:
재래식 무기거래의 변형된 동학,1991-2000
윌리암 D. 하퉁 (2000년 10월)ㅣ번역 : 손상열 (평화인권연대 활동가, alterite@jinbo.net)
1. 무기이전결정과정에 있어서의 변화된 맥락
1990년대는 국제무기무역의 동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던 세 가지 중요한 사건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소련의 몰락, 걸프전쟁, 그리고 UN의 소말리아 개입이라는…. 이 각각의 사건들은 국제 안보체제의 거대
한 구조적 변동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정부와 기업들, 그리고 국가영역 밖의 준(準)군사조직들의 무기수출입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전략적, 경제적, 정치적 동기들을 변형시켰다.
소련의 몰락
소련몰락(1991년 8월)은 1989년 11월 중동부 유럽에서의 소련군 철수 및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해체와 함께 시작된 일련의 과정을 마감하면서 냉전질서의 해체로 이어졌다. 냉전시기 미국은 여러 독재정권 및 독재자들(자리에의 모부투 세세 세코 Mobutu Sese Seko에서부터 이란의 샤 Shah와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Suharto에 이르는)을 지원하면서, 그것이 공산세력의 확산을 억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곤 했다. 그러나 미소간 대립이 종식됨에 따라 미국의 무기이전은 더 이상 공산세력의 확산을 억지한다는 명목으로 정당화될 수 없었다. 결국 이같은 무기판매 및 군사원조에 대한 차악론(次惡論 – 최선이 아니면 차악을 선택해야 한다는)이 현실성을 잃어버리게 되자, 미의회와 행정부는 그 동안 미국이 외교수단상의 일상적인 관행으로 사용해왔던 불법무기거래에 대해 재조사할 것을 요구받기에 이른다.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매년 100억불 내지 150억불에 달했던 소련의 저가할인 무기이전 또한 중단되었다. 냉전시기에 소련으로부터 헐값에 무기를 구입하던 고객들 중에는 아프가니스탄, 앙골라, 에티오피아, 인도,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쿠바 같은 나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련의 무기수출은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매년 150억불에서 200억불에 달했었지만,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그 규모가 20내지 40억불 가량으로 급격히 축소되었다. 소련의 무기수출이 축소됨에 따라 국제무기무역의 전체적인 수량 또한 많은 부분 축소되었다. 양적인 측면에서 따져봤을 때 현재 국제무기무역은 80년대 중반에 비해 절반 이하로 축소되어 있는 상태이다.
러시아의 정치·경제적 변동과 함께 국내의 무기구매량이 급격하게 축소되자, 러시아로서는 군수공장을 가동시키고 군수노동자들의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 현금구매자들이 절박하게 필요하였다. 결국 이 같은 새로운 ‘무기수출 중상주의’를 바탕으로 러시아는 AK-46 소총에서부터 핵 및 미사일 기술에 이르는 거의 모든 무기류(AK-46 소총에서부터 핵 및 미사일 기술에 이르는)를 긴장지장 및 일탈국가들(rogue state)을 대상으로 판매하게 되었으며, 여기에 대한 심각한 우려 또한 증폭되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소련의 몰락은, 또한 COCOM(다자간수출조정위원회:Coordinating Committee on Multilateral Export Controls)의 해체로 이어졌다. 냉전시기에 서방은 군사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기술이 사회주의권으로 이전되는 것을 억지하기 위해 COCOM을 활용해왔다. COCOM이 해체되기전까지, COCOM은 겸용기술(dual use technologies)과 관련해 가장 중요하고 포괄적인 수출 통제 메카니즘으로 기능했었다. 겸용기술이란 민수 및 군수에 동시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기술을 말한다. 겸용기술이 이전된다는 것은 소형무기로부터 주요 재래식 대량파괴무기에 이르는 거의 모든 무기시스템의 생산능력을 확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중동부 유럽 사회주의 및 舊소련의 몰락은 자유로운 금융시장과 국제무역을 특징으로 하는 “자유시장 근본주의(free market fundamentalism)”의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뒤에서 좀더 언급하겠지만, 국제무역 및 금융부문에 대한 자유시장원리의 관철은 특히 남반구의 가장 빈곤한 지역에 대한 무제한적인 전쟁과 약탈경제를 촉진시키는 심각한 결과를 낳게 된다.
국제무기수출정책에 대한 걸프전의 영향
걸프전은 국제무기시장을 구성하는 주요행위자들의 무역정책 및 행보에 있어 서로 모순적으로 보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실 걸프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反이라크 동맹의 주요국가들(미국, 영국, 프랑스 같은)은 이라크에 대해 현대식 무기와 군사무기를 이전해왔었다. 그러나 걸프전이 발발하면서 이라크가 적으로 돌변하자, 서방국가들은 자신들의 무기수출정책이 과거와 똑같은 방식으로 계속되어야 하는지 심각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1991년 3월 상하원 연설에서 미국의 부시대통령은 걸프전 승리를 자축하면서, 중동과 같은 긴장지역으로의 무기유출을 통제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선언하게 된다. 영국의 존 메이저 총리 또한 이라크를 무장시키는데 톡톡한 역할을 했던 영국의 외교정책에 유감을 표명하면서, UN 재래식 무기 등록제도를 설립하자는 제안에 힘을 싣겠다고 밝히기에 이른다. 여기서 UN 재래식 무기등록제도란 주요 무기의 수출입상황을 국제적으로 집계해, 특정 국가 혹은 지역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는 군비축적이 진행되는지 확인하고 감시하자라는 제안이다.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 – 프랑스는 걸프전 당시 자국 전투기를 출격시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쟁이전에 프랑스가 이라크 공군에게 공급했던 프랑스제 전투기와 자국의 전투기를 구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 또한 1991년 6월로 제안된 5대 무기 공급국간의 회동(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소련)을 프랑스가 주최하겠다고 공언했다. 이 회동은 중동 혹은 다른 긴장지역으로의 무기이전을 제한하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해 제안된 회동이었다.
무기이전을 통제하겠다는 이 같은 흐름과 함께, 서구의 국방장관들과 무기제조업자들은 무기판매의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한 공격적인 행보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 같은 행보는 한편으로는 걸프전을 통해 뛰어난 성능을 입증 받은 서구의 군장비들을 상품화하기 위한 의도에서 진행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확실성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탈냉전 세계 속에서 자신의 군사적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도로서 나타난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은 무기이전을 反이라크 연합의 동맹국들을 결속시키기 위한 주요한 수단으로 활용하게 되는데, 이는 무기이전을 활용해 우호국들을 획득하고 적대국들을 협박하는 냉전적 사고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걸프전에서 미군과 별무리 없이 통합적인 군사행동을 수행할 수 있었던(물론 당시 상황이 그랬었는지는 증명할 수 없다) 사우디아라비아 및 그 외의 다른 동맹국들의 모습은 ‘연합전쟁’의 세계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게 되었다. 연합전쟁이라는 방식으로 통해 미군은 운용방식이 동일한 미국제무기를 구비하고 있는 나라들과 더욱 효과적으로 군사행동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의 무기제조업자들을 무기수출을 촉진시키기 위해 “미국제 무기가 어떻게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었는가?”라는 홍보문구를 떠벌렸고, 그 결과 중동 및 아시아지역에서 인상적인 판매고를 기록했다. 걸프전으로부터 2년 뒤, 미국계 군수기업들은 중동 및 걸프만 지역에 대한 무기판매에서 매년 평균 10억불에 달하는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또한 1992년 미국 대선시기에 조지 부시는 두 가지 무기거래를 공식적으로 승인하기도 했다. 하나는 F-16 전투기 150대의 대만이전(90억 불 상당의 규모) 였으며, 다른 하나는 F-15 전투기 72대의 이스라엘 이전(60억 불 상당의 규모)이었다. 당시 선거운동을 진행하고 있던 부시는 이 사실을 이 전투기들을 생산하는 공단지역 내(텍사즈 주의 폭트워드와 미조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에서 발표했다. 그러자, 노동자들은 “우리의 일자리를 지켜준 부시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라고 쓰인 현수막을 내걸기도 하였다.
무기제조업자들은 또한 미국정부가 무기수출을 지원하는 보수금제도를 설립해야 한다고 열성적으로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해, 정부예산에 의해 개발되고 있는 주요군수품 및 그것을 수출하고 있는 군수기업들을 대상으로 정부가 보증하는 무기수출차관프로그램(편집자주:무기 도입국이 무기를 구입할 수 있도록 일종의 차관을 제공하는 것)을 실시하거나 각종 세금과 수수료를 감면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부시행정부시절 국방부산하에 있던 군수조절국이 방산무역센터 산하 방산무역 조정국으로 개편되면서, 행정부는 무기수출에 대한 감시와 규제를 완화하는 친 기업적 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수출 지향적 태도는 클린턴·고어 집권시기동안에 더욱 강화되었다. 실제로 클린턴, 고어, 그리고 당시 행정관료들은 각각 사우디아라비아, 아랍 에미레이트, 태국, 말레이시아,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칠레, 그리고 다른 주요한 무기수입국에 대한 미국의 무기판매를 촉진시켜
야 한다는 의향을 내비쳤었다.
경무기와 인도주의적 개입
1992년 11월 부시행정부는 난민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구호의 흐름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로 소말리아에 미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지금까지도 격렬하게 지속되고 있는 이른바 ‘인도주의적 개입’을 둘러싼 찬반논쟁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 시기를 특징짓는 뚜렷한 상징중의 하나로 우리는 대규모 해외취재단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소말리아에는 UN평화유지군 선발대의 도착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대규모 취재단이 우르르 몰려들었으며, 이 때문에 평화유지군보다 저널리스트들이 소말리아에 먼저 가있었다는 인상을 받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이 같은 걸프전 및 소말리아에 대한 감각적인 언론방송은 이른바 ‘CNN 효과’라는 것을 낳기에 이른다. 이 CNN 효과로 인해, 서구의 대중들 사이에선 먼 이국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과 야만을 지켜볼 수만은 없으며, 자국정부가 어떤 행동이든 – 그 행동이 효과적일 수 있는지, 아니면 상태만 악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사장된 채 – 취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게된다.
소말리아내전이후 경무기 (총, 수류탄, 개인장착용 로켓 등) 가 가진 문제 또한 조명 받기 시작했다. 현재 경무기는 세계적으로 급증하고 있는 인종 및 종교분쟁과정에서 가장 쉽게 사용되고 있는 무기이다. 이라크가 프랑스 및 소련제 전투기, 미국제 곡사포, 이태리제 전함, 독일과 영국 그리고 미국의 무기생산기술로 무장되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소말리아에는 오랜 시기에 걸친 강대국들의 침략의 결과, 그 역사적 유산으로 영국, 이태리, 소련제 경무기들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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