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정세동향] 12월 26일자 주간네트워크에 실린 글입니다
휘날리는 눈 속의 금융노동자 파업, 그리고 그 정당성
신 동 민(한국노총 정책기획국장)
지난 7월 11일, 지리한 장마비가 내리는 가운데 3만여 명의 금융노동자들
은 연세대 노천강당과 대운동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관치금융 청산!”을
외치며 금융권 역사상 초유의 총파업에 돌입했다. 그로부터 채 6개월도 지
나지 않은 지금, 금융노동자들은 다시금 분노의 함성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
었다.
금융노동자의 파업은 비와 관련이 많다. 7.11에 이어 12.22 파업에도 겨
울철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비가 내렸다. 서울에는 비 소식이 없었지만,
국민·주택은행 노조원들이 집결한 일산 국민은행연수원에서는 엄청난 비가
내린 것이다. 이틀 뒤인 12월 24일에는 눈이 펑펑 내렸다. 화이트 크리스마
스를 야외에서, 비닐천막에서 농성을 하며 맞이한 것이다.
21일 저녁부터 집결한 조합원들은 크리스마스인 25일 벌써 5일째 집을 떠
나서 힘든 노숙생활로 지새우고 있다. 파업 하루 이틀째의 고비와 연휴기간
의 또 한 차례의 고비, 그리고 수차에 걸친 공권력 투입기도 등등.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휘날리는 눈 속에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진행된 장
기자랑행사, 공권력에 의해 식사를 한 끼 거르는 바람에, 그 돈으로 불우이
웃돕기 성금 모금, 신부님과 목사님의 초빙으로 미사와 예배의 진행, 어린
자녀부터 애인, 부모에 이르기까지 수천 명에 가까운 가족들의 파업현장 방
문행사 등 즐겁고도 눈물겨운 장면이 연달아 연출되었다.
국민·주택은행 금융노동자들이 이토록 고난의 길을 가게 된 연유는 무
엇인가?
금융노동자의 7월 파업은 7.11 노정합의로 일단락이 되었으며, 그 다음날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이행이 담보되었다. 그 주된 내용으로는
관치금융 청산을 위한 국무총리 훈령 제정, 정부가 은행에 지급해야할 책임
이 있는 부분에 대한 조속한 처리 등과, 이 밖에도 2단계 금융개혁에 있어
서 정부주도의 강제적인 합병은 없다는 것과 금융기관 조직 및 인원감축에
대해서는 노사간의 단체협약을 존중하겠다는 약속이 있었다. 또한, 공적자
금투입은행의 금융지주회사 자회사 방식을 통해 정상화를 추진한다는 내용
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중 금융지주회사와 관련하여서는 이 글의 논지와
거리가 있으므로 논외로 하기로 한다.)
우량금융기관으로 국내 개인고객시장에 몰두하고 있는 국민은행과 주택은
행의 합병은 사실상 정부주도의 강제합병으로 불과 1∼2개월 전에만 하더라
도 양자간의 합병의 가능성을 당해 은행장조차도 부인하고 있었던 실정이
다. 그러기에 12월초부터 모락모락 피어난 양자간의 합병 조짐은 금융노동
자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강제적 합병과 관련하여, 금융노동자 주장의 정당
성을 입증하는 몇 가지 사유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정부가 7.11 노정합의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스스로 약속파기를 했
다는 점이다. 7.11 노정합의의 주된 내용중의 하나는 ‘정부주도의 강제적
인 합병은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은 정부가 금융개
혁의 방향으로 평소에 주장하던 세계 100대 은행 내의 대형은행에는 부합할
지 몰라도, 인원감축, 점포폐쇄 등의 조치가 없다면 시너지 효과가 거의 없
을 동일한 개인고객 중심의 은행이라는 점이다. 또한, 기업문화에 있어서도
상이점이 많아서 직원들의 융화에도 문제가 크리라 보여지는 합병조합이다.
이러한 은행들이 갑자기 천생연분을 만난 듯이 서로 구애를 하고 합병을
하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정부의
엄청난 압력을 받았다는 정황이 여러 군데에서 드러난다. 실은 국민은행,
주택은행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은행들이 정부로부터 합병 추진의 압력을
받았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러한 정부의 구체적인 합병유도는 신
문지상을 통해 명확히 확인된다. 지난 11월 25일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은
은행장들과의 조찬간담회를 통해 말로만 합병을 추진하겠다고 하지 말고 직
접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며, 주택은행장과 국민은행장에게는 현재의 영
업형태만으로는 우량은행 간판을 유지하는데 한계가 있다며 직접 행동에 나
설 것을 주문했다.(한국경제신문 11월 27일자) 이것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또한, 거의 대다수의 금융권 노조위원장들은 당해 은행장을 통해 정
부로부터 다양한 합병압력을 받고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국민·주
택은행의 합병은 스스로의 뜻과는 다른, 정부의 압력에 의한 합병이라는 결
론이다.
둘째, 7.11 노정합의는 금융노조와 정부와의 협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노사정위원회라는 제도적 틀 속에서 보고되고 이행이 담보된 것이다. 노사
정위원회는 노동계, 경영계 뿐 아니라 5개 주요 부처의 장관이 위원으로 되
어 있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여부에 대해서도 7.11 노정합의의 선
상에서 12월 중순 이후 노사정위원회가 개최되어 이의 이행여부(즉 강제합
병여부)에 대한 수많은 논란이 있었으며(3차례에 걸친 금융특위와 1차례의
상무위원회와 본위원회), 12월 21일부터 22일 새벽 2시까지 이어진 노사정
위원회에서도 ‘7.11 노정합의 정신을 존중하여 노사간에 자율적인 협의에
맡긴다’고 결론을 내고 노사 자율협상에 맡긴 것이다. 이후 금융노조는 인
내를 가지고 노사정위원회 결과에 따라 노사간의 자율협상을 위해 국민은행
장과 주택은행장에게 금융노조위원장과 양 지부위원장이 참석하는 5자 회담
을 제안하였으나, 결국 회동이 성사되지 않고 같은 날 오후 5시 국민은행장
과 주택은행장은 합병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화 시켰다.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재경부장관과 금융감독위원장도 노사
간의 자율협의에 동의한 실정인데, 해당 은행장이 이를 무시하고 일방적으
로 합병을 강행한 것이다.
셋째, 양 은행의 기존 단체협약에는 합병과 관련해서는 ‘노사간에 충분하
고도 성실하게 협의’ 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이 조항도 마찬가지로 휴지
조각이 된 것이다. 특히 금년 초 국민은행장이 낙하산 인사로 내려올 때 국
민은행 직원들의 정서가 합병을 강제하기 위해 관료출신이 은행장으로 임명
되었다고 반발하였고, 이 결과 향후 합병과 관련한 논의는 사실상 합의에
가까운 수준의 협의를 하도록 노사합의서를 작성하였으나, 이 또한 무의미
한 합의서가 된 것이다.
넷째, 7.11 노정합의 무시, 12.22 노사정위원회 합의사항의 무시, 단체협
약의 무시 등 문제점과 더불어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역시 이러한 합병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컨설팅사인 Bain & Company
에 따르면 은행간 합병 중 성공하는 경우는 25%에 불과하다는 보고가 있다.
기업금융과 개인금융의 융합도 아니고, 국내영업과 해외(외환)영업의 융합
도 아닌, 단순히 개인금융시장을 석권하는 두 공룡을 합쳐 놓는 것은 외형
상 정부가 구상하는 세계 100대 은행으로 구현될 수는 있겠지만 실제적인
효과측면에서는 극히 부정적이다. 중국인민은행은 규모 면에서 세계 6위이
지만 누구도 경쟁력 있는 은행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김정태 주택은행장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국민은행과의 합병에 대해 “업무상 중첩되는 부분이
많고, 외국의 경우에도 규모나 성격이 같은 은행간 합병이 성공한 예가 없
다”고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양 은행의 합병이 효
과가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현재 정부가 구상하는 제2차 금융개혁은 내년 2월이라는 시한에 쫓겨 방
향성을 잃어버리고 표류하고 있다. 정부는 이렇듯 중차대한 금융개혁을 무
원칙하게 추진해서는 안될 것이며, 더군다나 만만한 은행장이 있다고 벼락
치기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더욱 위험한 행동이다.
전력노조 파업실패 이후 힘을 얻은 정부는 구조조정의 칼날을 더욱 높이
치켜들고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물결 하에 추진되는 무원칙한 구조조정
방식은 결과적으로 한국경제를 더욱 수렁에 몰아넣고, 민중의 삶을 더욱 피
폐화 시킬 것이다.
국민·주택은행 노동자를 비롯한 금융노동자는 비록 깨어지고, 짓밟힐지
라도 옳지 않은 구조조정 방향에 대한 분연히 일어섰다. 언제 어떻게 공권
력에 의해 깨어질지라도, 잘못된 구조조정의 방향을 전환하는 그 날까지,
신자유주의 파도가 쓰러지는 그 때까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끊임없이
도전하고 또 항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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