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무장관 지명자 파월에게 보내는 질의서
[더 네이션] 1/8 데이비트 콘
조지 W. 부시 신임 대통령의 국무장관 지명자인 콜린 파월은 수많은 사람들이
찬양한 개인사(個人史)로 인해 국가적 우상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가 장관직을
인준받기 위해 국회에 출석하게 되면 상원의원들은 그에게 비굴한 아첨을 늘어놓
을 것이다. 그러나 이 퇴역 장성은 아무 간섭도 받지 않는 청문회를 받을 자격이
없다. 정책 문제에 있어 그는 (군대가 파견될 경우 상대가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의
무력사용을 채택한다는) 소위 파월 독트린과 걸프전 초기 미국의 개입에 대해 회
의적인 태도를 취했던 점, 두 개의 지역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끔 하
는 국방예산을 주장한 점 등에 관해 설명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될 것이다. 상원의
원들은 이러한 문제를 각각 끄집어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영웅 파월의 이미지
에 물음표를 달 수 있는- 파월의 과거 행적에 관한 무례한 질문들 또한 제기되어
야만 한다.
미라이 1968년 7월, 파월은 베트남에 파병되어 아메리칼사단의 선임 참모로 임
명되었다. 이 사단 소속부대들은 1968년 3월 16일 미라이의 부락에서 3백 명 이상
의 민간인을 학살했으나 이 사건은 보고되지 않았다. 파월이 사단본부 작전 참모
로 승격된 같은 해 12월, 그는 탐 글렌이라는 제대 병사의 편지를 전달받았다. 이
편지에서 글렌은 민간인에게 잔혹행위를 하고 죄수를 고문했으며 “아무런 도발도
없었고 정당한 이유도 없었는데도… 민간인들을 향해” 총격을 가한 미군의 만행
에 대해 고발하고 있었다. [뉴 리퍼블릭]에서 1995년에 보도한 바에 의하면 파월
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조사하도록 명령을 받았으나 미라이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파월은 몇몇 장교를 인터뷰하고 글렌의 주장은 허위에 불과하다고 보고서
를 작성하였다. 파월은 1995년 출판한 회고록인 {한 미국인의 여정}에서 이러한
조사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1969년 3월에 한 육군 감사관이 그의 집무실을
방문해서 1968년 3월의 적군 살상 기록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 그는 당시 사건을
기
억해냈다. 파월은 3월 16일에 대해 매우 많은 숫자-128명-를 불러주었으며 이는
감사관의 녹음기에 기록되었다.(미라이 학살 주장에 대해 조사하고 있던 감사관은
대량학살은 없었다고 보고하였다.) 파월은 자서전에서 감사관이 자신의 “호기심”
을 일깨워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 문제를 추적하지 않았다. 왜 안
했을까? 또 앞선 조사 과정에서 왜 치밀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을까? 왜 그는 글렌
에게서 더 많은 정보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1969년 11월 미라이 사건이 터져
나왔을 때 그는 왜 동료 장교들이 그에게 거짓 증언한 건 아닌지 조사받지 않았을
까? 게다가 이러
한 경험으로부터 관료조직 내부에서 조사를 수행하는 일에 관해 그는 어떠한 교
훈을 얻었을까?
인권 침해 1980년대에 파월은 로널드 레이건의 국가안보팀에서 일했다. 1983년
에서 86년 사이에 그는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의 특수군사고문이었으며 86년
말에서 87년 사이에는 국가안보고문 부관이었고 그 후에는 국가안보고문을 역임했
다. 레이건 시대를 통틀어 행정부는 노골적인 인권 침해와 범죄에 관여한 과테말
라와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등지의 군부-와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를 지원하였
다. 인권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행위를 공표했지만 레이건 행정부는 이들의
주장을 간단히 기각시켜 버렸다. 파월은 자신의 저서에서 와인버거 밑에서 복무하
는 동안 자신이 콘트라 반군에 대한 “행정부 내 주요한 옹호자”가 되었다고 밝히
고 있다. 몇몇 콘트라 반군 지도자들의 부패를 언급하면서 파월은 “동서 양극화라
는 과거 시절에 우리는 우리편과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에는 무엇으로 부패하거나 인권을 침해하는 해외 세력을 지원하는 워싱턴을 정당
화시킬 수 있을까? 파월은 콘트라 반군이나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중미 군대들
이 저지른 인권 침해에 관심이나 갖고 있었을까?
이란/콘트라 1987년 로렌스 월쉬 특별검사가 와인버거 국방장관에게 이란/콘트
라 스캔들에 관한 기록을 넘겨달라고 요청하였다. 와인버거는 유죄를 피해가는 상
당량의 자료를 제출하였다. 같은 해 의회 조사단이 파월에게 이란/콘트라 스캔들
에 관해 질문하고 와인버거가 일기를 쓰는지를 물었다. 파월은 선서를 한 증언 자
리에서 “장관은 제가 알기로는 일기를 쓰지 않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1991년 월
쉬는 와인버거가 수천 쪽에 달하는 일기를 작성해온 사실을 발견하였다. 여기에는
그의 이란/콘트라 사건 증언과 모순되는 자료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배심은 이러
한 기록을 은닉한 죄로 와인버거를 기소하였다. 와인버거의 변호인단은 파월에게
와인버거가 이 일기를 월쉬가 찾지 못하도록 비밀스럽게 다루지 않았다고 증언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파월은 “저는 와인버거의 책상에서 가로 5인치 세로 7인치 정
도 되는 작은 노트를 보았습니다. 그는 이 노트에 하루 동안 있었던 여러 가지 전
화통화나 일들을 요약해서 적어놓곤 했습니다. 저는 그게 그저 개인적인 일기장이
라고 보았습니다”라고 기꺼이 진술하였다. 이 선서 진술서는 1987년에 파월이 한
증언과 모순된다. 월쉬는 최종보고서에서 파월의 1987년 증언이 “최소한 오해를
야기하는 것”이며 “와인버거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이라고 결론지었다. 그
러나 월쉬는 파월을 기소하지 않기로 했다. 회고록에서 파월은 1987년에 조사단에
답변한 내용은 와인버거가 노트를 갖고 있지만 1991년에 그 내용을 보기 전까진
그게 일기장인지 몰랐다는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87년에 파월은 와인
버거가 특별한 노트를 갖고 있다고 진술한 적이 없다. 또한 월쉬는 파월이 와인버
거가 매일매일 일기를 쓰는 데 실제로 조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를 제시한 바 있
다. 결국 왜 파월은 1987년에는 91년과 달리 일기에 관한 정확한 내용을 조사단에
진술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저서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파월은 조사단이 “계속 질
문을 던짐으로써” 자신을 “압박”해오기를 기다렸지만 조사단이 더 이상 묻지 않았
기 때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절대 자발적으로 하지 않는다 – 이게 의회
와의 공조에 관한 그의 견해인가?
정당한 대의 작전 1989년 12월,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파월은 미국의 파나마 침
공을 감독하였다. 미국 군대가 마약 독재자이자 한때 미국을 위한 정보제공자였던
마누엘 노리에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파나마시티의 빈민지역인 엘초리요를 휩쓸
어버렸고 많은 민간인들이 전투에서 체포되었다. 미 국방성은 처음에는 민간인의
사상을 “부수적인 데미지”라고 모호하게 표현하였다. -노리에가가 붙잡힌 다음인-
2주 후에 국방성은 201명의 파나마 민간인(과 23명의 미군)이 사망했다고 발표하
였다. 몇 달 후 인권단체인 아메리카스 워치는 미군이 민간인에 대한 피해를 최소
화하지 않음으로써 제네바협정을 위반했다는 내용을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이 보
고서는 “미군 사령부는 또한 민간인 사상자에 대한 파악과 대책 마련에 관한 의무
규정을 어겼다”고 지적하고 있다. 인권을 위한 의사회의 조사에 따르면 침공 과정
에서 최소한 300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작전 기간 동안 3천 명의 파나마인이 중
상을 입었으며 만 5천 명(이 중 3천 명만이 미국의 원조를 받았다)이 난민이 되었
다고 한다. 파월은 자신의 저서에서 정당한 대의 작전이 “필요한 모든 무력을 행
사하고 불가피하게 사태가 확대되는 것에 대해 변명하지 말라”라는 파월 독트린을
확증하는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그의 군대는 왜 민간인 사상자에 대해 철저하
게 파악하지 않고 난민과 부상자를 돕지 않았을까? 그는 파월 독트린과 제네바협
정을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을까?
걸프전 증후군 걸프전은 파월을 인기스타로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사막의 폭풍
이 지나간 몇 년 후 수천 명의 참전군인들이 여러 질병을 앓고 있다. 1999년말 현
재 69만 7천 명의 걸프전 군인 가운데 18만 4천 명이 재향군인사무국에 신체장애
민원을 제기했으며 그 중 13만 6천 명이 질병 사실을 입증받았다. 재향군인사무국
은 걸프전 참전군인들이 피로와 신경인지 장애, 근골격계 장애 등 실체가 파악되
지 않은 만성적 증상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국방성은 10만 명의 미군
이 저준위 신경가스에 노출된 적이 있다고 시인하였다. 참전군인 대변자들은 걸프
전 증후군에 관한 직무유기(MIA)를 저지르고 있다고 파월을 비난하였다. “4, 5년
전에 걸프전 참전군인들은 재향군인사무국에서 외면당하고 있었습니다”. 전국걸프
전자료센터의 사무국장이자 그 자신이 건장한 걸프전 탱크부대원이었던 찰스 쉬한
-마일스의 말이다. “당신들은 군 지도자들이 이에 관해 뭔가 할 말이 있을 거라고
기대할지도 모르지요. 파월이나 슈워츠코프, 체니 등이 우리에게 보여준 거라곤
침묵뿐입니다. 우리는 파월에게 도와달라고 몇번 편지를 썼지만 답장 한번 못 받
았습니다. 이건 정말 실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연구 결과 걸프전 참전군인들이
신경가스 노출로 인해 질병에 걸렸음이 밝혀진 1998년에 한 한 인터뷰에서 파월은
걸프전 복무와 질병 사이의 연관관계를 부인하였다. 왜 그는 걸프전 증후군을 인
정하길 꺼렸던 것일까? 왜 그는 자신을 위해 싸운 병사들을 말로나마 지원하지 않
았을까?
병든 참전군인들을 외면하고, 의회 조사단을 호도하고, 민간인 사망자 파악을
다른 사람들에게 미루고, 인권 침해를 무시하고 도외시한 외교정책 기구에 참여하
고, 군대의 잔학행위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지 않고… 이 모든 사실은 콜린 파월
에게는 영예가 아니다. 전혀 영웅적이지 않은 파월의 불유쾌한 과거사에 관해 상
원의원들이 결연한 걸음을 내딛지는 않을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이 현실화된 증
거라고 추앙받곤 하는- 파월의 출세는 인기스타-권력의 광휘가 가장 효과적인 위
장이라는, 유력한 정치 현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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