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선언>의 도용 또는 표절시비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 문제는

재일동포 다큐멘터리 감독 양영희씨가 ‘<본명선언>이 자신의 다큐멘터리

<흔들리는 마음>과 거의 흡사하며 적절한 협의없이 도용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본명선언>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한국다큐멘터리에 수여되는 운파상까지 받은 작품이라 파장은

부산국제영화제와 독립영화진영 전체를 향해 번져나갔다.

<본명선언>의 ‘일부 도용 파문’이 처음 보도된 것은 10월16일자

<중앙일보>로, 10월18일 KBS <일요스페셜>에서 <흔들리는 마음>의 자료화면 분량을 삭제하고 재편집한

<본명선언>을 방영하기로 결정한 뒤였다. 홍형숙씨는 중앙일보의 보도에 대해 “도용사실을 시인한 적이 없으며

KBS 방영분에서 자료화면을 삭제한 것도 양영희씨가 요구해서가 아니라”며 기사정정을 요구했다. 10월19일

<중앙일보>는 <본명선언>이 표절작이라는 견해를 다시 한번 제시했다.

양쪽 주장이 맞서는 상황에서 10월19일 부산국제영화제가

‘<본명선언>이 표절이나 도용을 한 혐의가 없으며 두 작품을

공개시사하겠다’는 공식입장을 표명했고 10월21일

서울영상집단에서도 두 영화를 본 영화평론가, 영화과 교수

등의 견해를 들어 <본명선언>이 독창적인 작품임을 주장했다.

사태가 여기 이르자 독립영화진영을 아우르는 독립영화협회도

10월22일 공식입장을 표명했다. <중앙일보> 기사가 ‘한

작가를 철저하게 파괴할 수도 있는 폭력을 행사했다’며

공개사과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구두합의 vs 구성안 받은 적 없음

문제의 본질은 당연하게도 <본명선언>이 <흔들리는 마음>을 도용 또는 표절했느냐다. 명쾌한

해법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회의 주장대로 “당사자인 양영희와 홍형숙 감독,

영화관계자가 공개적인 비교시사회를 갖는 것”이겠지만 문제는 양영희씨가 북한 국적의

재일교포라는 사실 때문에 복잡해진다. 현재 미국 유학중인 양영희씨는 국적문제로 한국에

들어올 수 없는 형편이다.

양영희씨의 <흔들리는 마음>은 95년부터 7개월 이상 오사카의 야마가사키 고등학교에서 찍은

작품으로 96년 4월18일 일본

에 방영됐다. 홍형숙씨가 처음 양영희씨를 만난 것은 95년 10월
야마가타영화제에서다. 홍형숙씨는 96년 초 양영희씨의 <흔들리는 마음>을 봤고 홍형숙씨가 양영희씨의
개인사에 관심을 가지면서 두사람의 관계는 발전했다. 처음엔 양영희씨의 개인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계획했다가 96년 7월 <이름에 대하여>라는 가제로 야마가사키 고등학교의 본명선언에 대한 다큐멘터리
가구성안이 나왔다. 양쪽의 주장은 여기서부터 엇갈린다. 홍형숙 감독은 이때 양영희씨가 <흔들리는 마음>에서
자료화면 쓰는 것을 허락했으며 97년 3월 일본에서 만나 ‘8mm취재 양영희’라는 자막을 달기로
구두합의했다고 말하는 반면 양영희씨는 그같은 합의를 한 적이 없으며 <흔들리는 마음> 원본테이프 80개를
보낼 때까지도 <본명선언>이 어떻게 제작될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단 <본명선언>이 <흔들리는
마음>을 도용했는가의 문제는 문서화된 자료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양쪽 증언에만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단언하기 어렵다. 다만 양영희씨가 인정하는 두가지 사실, 97년 3월 <본명선언> 첫 촬영을 시작할 때 현지
통역일을 한 것과 97년 12월 홍형숙씨에게 원본테이프를 보낸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96년에서 97년까지
한번도 문서화된 구성안을 보내온 적이 없다”는 양영희씨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또한
<본명선언>이 <흔들리는 마음>에서와 같은 학교, 같은 선생님, 같은 문제를 다룬다는 이유로 표절이라고
단정하는 건 무리가 있다. ‘<흔들리는 마음>이 취재보도물 형식인 반면 <본명선언>은 개인적인 체험물
형식’이라는 남인영(민예총 문예아카데미 다큐멘터리 강좌 강사)씨의 견해는 설득력 있다. 두 영화는 형식적
차이가 비교적 분명해서 <흔들리는 마음>을 모방한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독립영화진영과 해외다큐멘터리작가를 흔든 사건

지금까지 상황을 종합해보면 논쟁의 불씨는 타인의 영화에서 일부분을 인용하는 문제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데서 온 걸로 보인다. 실제 <본명선언>이 <흔들리는 마음>을 인용한 방식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처음 내레이션으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양영희씨가 보여준 비디오였다고 진술하고
양영희씨의 모습을 두 장면 비춰준 다음 엔딩자막에 ‘8mm취재 양영희’라고 한 것이 전부다. 당사자들의
충분한 설명을 듣지 않은 상태에서 보면 양영희씨가 <본명선언>의 스탭 중 한명인 걸로 보이며 자료화면도
흑백으로 처리됐을 뿐 <흔들리는 마음>에서 인용한 것이라는 표시가 없다. 홍형숙씨는 ‘8mm취재 양영희’라는
자막에 합의했다고 말하지만 완성본이 나오기 전에 이뤄진 합의라는 걸 고려하면 불충분했다. 설사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고 결론나더라도 도의적인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 문제다.

현재 서울영상집단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회가 제안한 비교시사회에 동의했지만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는
불투명하다. <흔들리는 마음>의 자막처리문제, 양영희씨 또는 그 대리인의 입국문제 등 여러가지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번 사건은 척박한 독립영화 환경에서 지난 10년 이상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온
홍형숙씨와 재외한인으로 외롭게 비디오저널리스트 활동을 한 양영희씨 모두에게 큰 마음의 상처를 줬다.
시비를 가릴 때까지 시간도 길겠지만 상처가 아무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남동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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