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문을 연 피노체트

가디언(Guardian) 98/11/8

칠레의 전(前)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오늘 스페인으로의 송환 기도에

맞서 싸울 것을 “진심으로” 다짐했다.

런던의 한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후 회복하는 동안, 그는 자신이 왜 체포되었

으며, 대량학살과 고문, 그리고 테러의 혐의로 스페인 당국으로부터 왜 송환요

구를 받고 있는 지에 대해 아내로부터 설명을 들으면서 스스로가 얼마나 “상처

받았고 그리고 당황했는지”를 설명했다.

체포된 후 처음 있은 오늘 진술에서, 피노체트는 이렇게 말했다. “외국 땅에

서의 공개재판은 정당한 것(justice)이아닙니다. 이건 분명히 영국식의 정의는

아닙니다.”

그는 덧붙였다. “난 평화로우며 그리고 칠레국민들과도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칠레 역사에 관한 최근의 기록은 “진실의 희화화”였으며 그는 “입증되지 않은

혐의로 자신을 기소하려는 외국인들이 꾸민 그럴싸한 시도”의 주인공이었다.

프랑코 독재시절이 현재에 와서는 “무시되고 있는” 스페인 바로 그곳에서의

화해(의 예;역자)를 지적하면서, 그리고 북아일랜드와 남아프리카를 거론하면서

그는 이런 모든 경우에서 “과거를 되돌이키지 않기 위해 현명한 결정이 내려졌

다”고 말했다.

“오래된 상처를 들춰내고, 옛날에 잊혀졌던 사실이 다시금 논쟁거리로 대두되

는 것은 아무런 이득이 될 수 없습니다.”

월요일 상원은 스페인으로부터 공식적인 송환 요청이 도착하기 전에 이 사건

에 관한 청문회를 재개할 것이다.

청문회의 셋째 날, 다섯 명의 상원 법률위원들은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등의

인권 단체를 대표한 국제법 전문가들과 피노체트 체제의 희생자들로부터 보다

많은 설명을 들을 예정이다.

82살의 장군은 자신이 수술 후 요양했던 북런던의 한 개인 병원에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진술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시민들은 조국의 과거와 화해했습니다.

그들이 나의 진정한 재판관입니다.”

“이 때문에 나는 대통령과 정부가 지원하는 이 송환요구에 맞서 진정으로 싸

울 생각입니다. 그리고, 사정이 허락한다면, 나는 가족들과 함께 칠레의 고향으

로 돌아가 여생을 평화롭게 보내고 싶습니다.”

칠레의 민주화는 “나에 반대한 행위들 때문에 손상되었습니다. 다른 곳처럼

칠레에서도 (이러한-역자) 보복성 조치(recrimination)는 화해의 적입니다.”

피노체트는 자신이 “아마도 엄밀히 말하자면 외무부의 한 손님으로서가 아니

라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고, 그들이 협력해주는 가운데” 영국에 칠레의 “특별

대사”로서 들어왔다고 말했다. 히스로공항에서 그는 영국정부대표로부터, 이전

에도 그랬던 것처럼, 공식적인 영접을 받았었다.

두 나라간의 역사적 동반관계를 언급하면서, 그는 칠레가 82년 포클랜드 전쟁

당시 영국을 얼마나 도왔었는가를 말했다. “오늘, 이 나라에 구속되어 있는 상

황에서, 나에 대한 지지를 표명해준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 특히 마가렛 새처

여사의 명예와 용기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의 말은 내게 굉장히 감동적

이었습니다.”

피노체트는 말하길, “난 항상 영국에 오는 걸 좋아합니다.”

“체포를 당했다는 사실은 영국에 대한 나의 믿음을 흔들어놨기 때문에 매우

슬픕니다. 이전에 나는, 영국은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는 나라라

는데 추호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권력을 장악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성을 강조하면서, 그는 식민지배

로부터 어렵게 이룬 70년대 초반의 남아메리카의 자유가 “소련에 의해 사주 당

하고, 돈을 받은 군사, 정치 세력들에 의해 파괴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들

의 명백한 의도는 국민들에게서 민주적 자유를 빼앗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1973년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하에서, 칠레는 극도의 인

플레이션과, 생필품 부족, 그리고 법과 질서의 붕괴로 인해 “절룩거리고” 있었

다. 소련이 사주한 봉기가 계획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칠레의 생존과 그리고 남아메리카에서의 자유의 보존을 위해서는

“맑스주의가 패배하고 아옌데 정권이 제거되는 것이” 관건이라고 믿었다. “나는

1973년 사태 이후 25년을 넘게 양심에 따라 살아왔습니다”라고 피노체트는 말했

다.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습니다. 내가 제안한 안전보장약속을 받아들이고 아

옌데가 자진해서 떠나주었으면 좋았을텐데 말이죠.”

“결국 그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자살을 택했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칠레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모든 개인들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는 맑시스트 정부가 제거되지 않는 한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

다.”

“난 나의 조국을 사랑합니다. 칠레의 국민을 사랑합니다. 난 칠레가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여행하며, 그들의 정치적 종교적 전망을 자

유롭게 추구하는 그런 나라가 된 것에 매우 자부심을 느낍니다.”

“우리는 1970년대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이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되돌이키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난 이 자유들이 실제로 되돌아 왔다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적 헌법을 회복하기 위해 국민투표가 실시됐던 것은 1980년 그의 정부 아

래에서였고, 이 헌법아래 88년 국민들은 “나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국민

들의 의사를 받아들였고, 43%의 지지를 얻은 상태에서, 물러났습니다.”

그 후 그의 두 명의 후계자인 파트리시오 아일윈과 에두아르도 프레이 행정부

로의 평화적인 정권이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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