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1호로 알려진 김인승(金麟昇)의 친일행적을 증명하는 관련 사료 6점이 공개됐다.

역사학자이자 중문학자인 성신여대 구양근(具良根) 교수는 1800년대 후반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지방의 조선 이주민 출신으로 강화도조약(1876년) 체결 당시 일본측 통역원으로 활동하면서 일본정부측에 각종 정보를 제공해 주는 등 친일행각을 벌인 김인승의 친일행적 사료 6점을 30일 공개했다.

이들 사료는 모두 일본 외교사료관에 보관돼 있는 것으로 김인승이 누구이며 어떤 경로를 통해 친일파로 활동하게 됐는지 등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1875년 일본 외무성 7등 출사(出仕) 세와키 히사토(瀨脇壽人)의 「블라디보스톡 견문잡기」는 최근 발간된 「한일관계사 연구」 제9집에 전문이 번역돼 실렸다.

具교수는 그동안 이들 사료를 토대로 지난 96년부터 두 차례 김인승의 친일행적을 일본과 국내에서 발표했으나 「…견문잡기」를 비롯한 그의 친일행적 원본은 공개되지 않았다.

이번에 전문이 공개된 「…견문잡기」는 일본이 운양호사건(1875년) 직전 세와키가 블라디보스톡에 러시아 무역소사무소를 설치하기 위해 이 지역을 돌아본 시찰결과를 일기형식으로 작성해 외무성에 보고한 것으로 여기에는 김인승에 대한 비교적 많은 정보가 들어있다.

이 견문록에 따르면 함경부 경흥부 서리 출신으로 한학에 조예가 깊은 김인승은 1869년경 북한지방을 휩쓴 대기근때 국경을 넘어 블라디보스톡 인근의 연해주 니콜리스크에 거주하고 있다가 때마침 이곳을 방문한 세와키의 눈에 들어 그와 함께 일본에 귀국했다.

세와키의 블라디보스톡 출장은 겉으로는 무역사무소 설치를 위한 것이었지만 외무성의 지시에 따라 실제로는 「조선실정을 정탐」하는 게 방문목적이었기 때문에 김인승은 그를 알게되면서 이미 친일파 1호라는 불명예스런 길로 들어선 셈이다.

세와키를 따라 일본에 들어간 뒤의 김인승의 행적은 외무성이 김인승을 외국고용인으로 임명한 것을 기록한 「김인승 고용장」과 「조선인 김인승에 대한 귀항건에 대한 상신」 등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이들 사료는 김인승이 세와키와 다른 외무부 관리 등의 도움으로 여러차례 시험을 거쳐 외무성 고용인이 됐으며 1875년 8월1일부터 10월31일까지 3개월 동안 일급(日給) 1원씩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만한 일로 그가 친일파 1호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강화도조약 당시에는 일본 전권공사 구로다 기요타카를 수행해 조선 관리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는지 18개조에 걸쳐 조언했으며 또 당시 일본측 교섭상대인 인천부사 윤협이 어떤 인물인 지를 알려주기도 했다.

이와함께 김인승은 도쿄에 머물면서 일본이 한국침략을 위해 이용한 「조선전도」와 「계림사략」 등을 만들때 깊숙히 개입해 조선의 각종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돌아올수 없는 친일파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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