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맞는 1998년 12월 현재 국내 ‘인권시계’는 몇 시를 가리키고 있을까. 인권법 제정이 눈앞에 닥쳐있는 아직까지도 국내 인권시계는 여전히‘한밤중’에 멈춰 있다는 것이 상당수 인권운동가들의 시각이다. 정부의‘인권보호’의지가 빈약하다는 지적과 함께 국민들의 ‘인권의식’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있다. 부랑자 복지시설인 ‘양지마을’에서 수용자들에 대한 강제노역과 구타가 빈번하게 행해지고, 군대와 교도소에서의 의문사가 시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선 학교에서는‘왕따’라는 이름으로 집단 따돌림 현상이 일상화하고 있으며 경찰의 총기오발로 인한 시민의 피해도 잇따르고 있다. 인권침해와 차별행위가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 국내 법률에 규정돼 있는 범죄 가운데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는 80개나 있다. 더욱이 지난해 12월30일 23명의 사형수에 대해 일괄적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집행대기중인 사형수만 해도 40여명이나 된다. 세계적인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는 사형제도의 유무, 최근 사형을 집행했는지 여부, 집단 사형집행 여부 등을 인권진단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따라서 세가지 사항 모두를 ‘갖추고’(?) 있는 우리는 국제앰네스티로부터 매년 ‘치욕적인’지적을 받고 있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공개처형 제도가 있는 중국보다는 낫지만 아직도 카자흐스탄 등의 인권후진국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이 국제앰네스티의 진단이다.

국내 인권단체들은 여전히 정치적 신념 때문에 갇혀 있는 ‘양심수’가 있고, 국가보안법도 효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공권력에 의한 폭력까지 그치지 않고 있다는 점등을 들며 ‘인권시계’가 멈추어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환경’ 자체가 인권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특히 어릴 때부터 ‘일등주의’‘무한경쟁’의 논리를 배우며 자란 청소년들의 인권수준이란 불을 보듯 뻔하다는 것이다. “‘왕따’는 우리 사회 인권의식의 대표적인 단면입니다. 다수에 의한 소수의 권리침해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어떻게 우리 아이들이 친구 의자에 압정을 놓을 생각을 하게 됐는지 답답할 따름입니다” 한 인권운동가의 얘기다. 인권보호를 위한 법이나 제도의 확립도 중요하지만 청소년에 대한 인권교육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사회의‘인권의식’은 터무니없이 낮다. 인권법이 아니더라도 인권침해나 차별행위에 대해 처벌하는 법률이 있지만 실제 처벌 사례는 드물다. 피해자들 역시 적극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찾지 않는다. 서울지검 남부지청 김기현 검사는 11월25일 ‘아내 주거지인 안방 출입을 금지한다’는 법원 명령을 어긴 박모씨(48)를 가정폭력범죄 처벌에 관한 특례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지난 7월 가정폭력범죄 처벌에 관한 특례법이 발효됐지만 법원의 임시조치를 지키지 않아 구속된 사례는 이 한가지에 불과하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가정폭력을 ‘남의 일’로 여기는 풍토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매맞는 아내’ ‘학대받는 아동’에 대해 사회 구성원들이 인권침해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가정사’로 치부하는 탓이기도 하다. 11월초 미국 위스콘신주 법원은 고양이 5마리를 때려죽인 30대 남자에게 10년형을 선고했다. 너무 지나친 형벌이 아니냐는 주장은 동물에게도 학대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에‘길’을 내줘야 했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서구적 잣대로 우리의 인권수준을 진단하는 것이 무리이기는 하지만 최소한 인권을 ‘생명권’에 한정짓더라도 우리의 인권수준은 비참한 실정이라는 것이 많은 인권운동가들의 목소리이다.

당국의 인권의식을 엿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잇따르고 있는 총기오발 사고. 경찰은 탈옥수 신창원의 검거를 위해 총기사용 수칙을 대폭 완화했지만 결과적으로 무고한 시민을 포함, 10여명의 다른 ‘피해자’를 양산하는데 그쳤다. 경찰이 ‘도둑 열 명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시민이 안전해야 한다’는 진리를 미처 깨닫지 못한 까닭이다. 천주교 인권위원회와 인권운동사랑방 등 10개 인권단체로 이뤄진 한국인권 단체협의회(상임대표 김정숙)가 10월22일 총기사고를 일으킨 경찰관 11명을 서울지검에 고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인권단체협의회는 고발장에서 “최근 경찰의 총기 사용은 최소한도의 범위를 벗어나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며 “총기를 남용해 피해자가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히는 등 경찰관직무집행법 위반 및 직권 남용 혐의가 있다”고 밝혔다.총기사고가 중요한 반(反)인권 범죄라는 것이다. 요즘 서울의 일선 경찰서 형사계에서 경찰이 피의자들에게 육체적 제재를 가하거나 욕을 하면서 ‘군기’를 잡는 모습을 보기는 그리 쉽지 않다. 오히려 술취한 피의자들이 경찰에게 시비거는 광경이 더 쉽게 눈에 띈다. 경찰 검찰 안기부에 의한 가혹수사 시비 또한 눈에 띄게 줄고 있다. 바람직한 변화 상이다.

정부는 인권법을 제정하고 국가인권위원회를 설치, 인권보장에 힘을 쏟겠다고 다짐한다. 논란이 되고는 있지만 장애인 인권선언, 학생인권선언, 수형자인권선언 등을 통해 인권보장의 의지를 국내외에 과시하겠다는 계획도 진행중이다.‘인권대통령’을 표방한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달라진 변화의 모습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권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높다. 인권단체에는 매달 수백 건의 상담이 쏟아진다. 가정문제 노동문제 형사문제 성범죄 아동학대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한다. 유엔인권위는 2년에 한번씩 회원국으로부터 인권개선사항에 대한 보고를 받는다. 인권협약상의 규약을 준수하고 있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다. 경제 사회 문화 시민 정치 등 5개 권리 범주의 16개 조항에 대해 각국 정부는 성실히 답할 의무가 있다. 불성실한 답변을 하게 되면 해당국 민간단체에서 반박보고서를 제출, 국제사회로부터 톡톡히 망신을 당한다. 인권운동가들은 인권수준이 하루아침에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사회 구성원들의 인권의식이 달라지지 않는 한 인권수준의 개선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인권교육의 필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부터라도 사람을 사람으로 볼 수 있는 인권교육을 반드시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다. 교과서에 세계인권선언문 한 줄 없는 것이 우리 인권교육의 현실이다. 이는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맞는 98년12월, 한국 인권의 현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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