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한 해만큼 성담론이 풍성했던 해도 없을 것이다.

연초 ‘비아그라’로 시작해 연말 구성애의 ‘아·우·성’ 선풍으로 매듭지어진 것은 올 한 해를 특징짓는 중요한 사회문화 코드다. 특히 여성 스스로 자신의 성문제를 주인의식을 가지고 얘기하기 시작했다는 것, 이것은 남성들에게 충격을 선사했음에 틀림없다.

어느정도 흥행에 성공한 <처녀들의 저녁식사>, <정사>,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등은 미약하나마 여성에게 연령과 결혼 유무를 떠난 성적 자유를 암시함으로써 가부장적 성편견의 금기를 깨는 작용을 했다. 남자들은 이제 더이상 자신들만이 여자의 성을 안주삼아 즐기는 특권계층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

여성들의 주체적 성담론이 대중화되기까지 90년대 초반부터 끊임없이 고민해온 여성들의 노력이 있었다.

‘성·감·대’, ‘섹스 다이어리’로 성경험 일상화

93년 초부터 ‘성·감·대’(성문제를 공감하는 사람들의 연대모임)에 참여해온 김의자씨는 최근 5년만에 열린 자신들의 첫 워크숍이 한 일간지에 ‘처녀들이 성을 말한다’는 식으로 게재되자 회원들이 무척 곤혹스러워하고 있다고 전한다. 자신들의 모임이 성격상 상품화될 수도 있다고 막연히 느꼈던 위험을 실감했기 때문. 평소 자신의 모임활동을 두고 주변인들이 “여자에게 왜 성이 그토록 중요하냐?”, “성폭력과 성교육 면에서 성문제를 주로 접근하는데, 왜 하필 여성의 쾌락 면에서 접근하느냐?” 등의 의아함을 표할 때 절로 움츠러든다고 한다.

김씨는 “우리의 성을 얘기할 때 가장 힘든 것은 이제까지의 가부장제 문화에 익숙해져 나도 모르게 ‘알아서 기게 되는’자기검열이다”라고 말한다. 주 1회 모임 때마다 자신의 ‘섹스 다이어리’를 공개해 성을 논할 때 빠지기 쉬운 추상성과 모호성을 탈피하고자 할 때도 이 자기검열은 엄연히 존재한다. 가령, TV나 영화 속에서 성행위 장면을 보게 될 때 성욕구를 느끼는가, 혐오감인가 호의인가, 또 지하철에서 남자들은 여자를 보면 성충동을 느낀다고 하는데 나는 남자들을 보고 유사한 반응을 하는가 등을 적어나가는데, 회원들 모두 정말 ‘까놓고’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추적하기란 쉽지 않다는 고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성을 계속 ‘얘기’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선 40, 50대가 돼도 여자들은 눈치를 보아가며 성을 얘기해야 된다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자라며 ‘성적 인간’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되면서 이를 공개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결국 나의 해방, 나아가 여성해방으로 이어질 것이란 확신” 때문이다. 이들은 이 목표를 위해 자신들의 모임을 항상 열어놓고 타조직과 연대하며, 이왕 성문제가 어떤 식으로든 상품화될 운명이라면 이를 주도하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왜 성?!’,기혼녀들이 성문화 전복에 앞장설 것 제안

96년 봄부터 시작, 올 여름부터 본격화된 성문제 연구모임 ‘왜 성?!’은 이화여대 여성학과 대학원 선후배 8명이 격주에 한 번 모여 운영하고 있다. 회원 김현정씨는 “우리의 성을 ‘어떻게’ 말하느냐가 가장 큰 고민이다. 현재는 개개인의 성경험을 서로 읽고 해석해주는 데도 힘이 든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성을 말할 땐 위험과 쾌락이 공존하는 딜레마를 절감하게 된다고 말한다. 즉 “여성의 사회진출이 증가하고 점점 강력한 존재로 부상하면서 여성이 주체가 된 성담론이 활성화된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엔 여성을 기존 가부장제 틀 속에 묶어두려는 반동 역시 강력하다”는 것.

남성의 성기삽입 위주의 성문화 코드와 다른 코드로 말하기도 쉽지 않다.

<이프>, 여성의 오르가즘, 자위, 외도 등

금기시된 성담론 공론화

성문화에 대해 남성의 단선적 해석을 벗어난 여성 스스로의 ‘다양한’ 해석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김씨는 “여성이 쾌락을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혁신적인 변화지만, 단지 이 주제만 따로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국의 사회 문화 상황을 배경으로 놓고 여성의 쾌락추구와 이에 떨어질 임신, 낙태 등 여성 스스로의 책임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 김씨는 “고정된 성관계에 묶인 기혼녀들이 더욱 더 적극적으로 또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성경험을 말해야 한다. 이를 통해 가부장제 획일화된 성문화를 전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제안한다.

여성의 공개화된 성담론에서 지난 여름 창간호를 낸 페미니스트 계간지

<이프>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창간호부터 최근호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자위, 엄마의 외도, 남자의 성경험, 여성의 오르가즘 등 기존 성문화의 금기들을 과감히 다루어 공론화시켜 왔다. 방식도 만화, 수다 등 다양하다. 이들이 성문화를 다루는 방식은 확실히 다른 여성지들과 차별화된다. 한 여성주의 문화 심포지움에서 류숙렬 편집위원은 “우리의 창간 기본개념은‘여성의 욕망을 아는’ 것이다. 오랫동안 남성 욕망의 대상에 불과했던 여자들이 주인이 되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는 법을 배워나가는데 입이 되고자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여자의 성, 아는 것이 힘’ 인식, 성담론-여성운동 연계 모색해야

일부에선 여성들의 성담론이 성개방 풍조와 맞물려 자칫 성적 타락을 가져올 수 있다고 반론한다. 그나마 성문제에 관한한 우위를 지켜왔던 남성들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의식도 섞여 있다. 특히 역사상 세기말 현상 중 하나로 19세기 말 등장했던 데카당티즘(퇴폐주의)의 재현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데카당티즘이 일상의 ‘권태’에 못이긴 남성들의 몸부림에서 비롯됐다면, 현재 20세기 말에 진행중인 여성들의 성담론 물꼬는 훨씬 건전하다.

대안적 학습방식으로 잘 알려진 강남여중 도덕교사 백신 영애씨는 말한다.

“우리 아이들의 성의식은 해가 다르게 놀랍게 변화해갑니다. 자신들의 신체발달에 걸맞는 성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외치는가 하면, 남성 성문화의 신화와 이중성을 파헤쳐나가는 데 열렬한 관심을 보입니다. 얘들이 매매춘문화에 젖어들기 쉽다고 말들 하지만, 이는 여성으로서의 주체적 성교육을 받지 못한 채 ‘몰라서’ 그런 겁니다. 이 경우 ‘아는 것이 바로 힘’이겠죠. 우리 아이들부터라도 성적 주체성이 뚜렷한 성교육을 합리적으로 시키는 것이 부조리한 성문화를 없애는 첫 걸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박이 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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