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초에 친척들이 모두 모일 기회가 있었다. 서로 모른척 했었지만, 거기 모인 사오십대의 친척들 중 한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명퇴 또는 정리해고된 상태라는 것은 이미 친척들간의 은밀한 전화통화를 통해서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서로 그런 대화를 피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다보니까 자연스럽게 화제는 ‘구조조정’으로 집중되었고, 모두 막연한 무력감과 패배감속에 답답한 심정으로 헤어졌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지금 우리 사회의 어느 모임에 가더라도 구름이 짙게 깔려 있는 분위기는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연봉제, ‘전가의 보도’인가
최근 기업들이 너도 나도 연봉제를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와 같이 들먹이고 있는 상황은 구조조정의 태풍속에 근로자들이 느끼는 패배감 내지 무력감을 더욱 조장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물론 연봉제는 그 나름대로의 의의와 장점이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연봉제는 조심스럽게 잘 쓰지 않으면 본래의 취지와 효과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연봉제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93년 말 두산그룹이 과장급 이상 관리직에 도입한 이래 90년대 중반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점점 증가하고는 있지만, 아직 연봉제를 도입하고 있는 사업장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98년 경총의 실태조사에 의하면 15.3%, 민주노총이 산하노조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 의하면 사무관리직 2.7%, 판매서비스직 9.1%). 그러나 IMF 관리체제 이후 많은 기업들이 연봉제 도입을 계획하고 있으며, 언론, 금융분야 뿐만 아니라 공공부문의 경우에도 인력감축 및 민영화를 골자로 하는 구조조정과 병행하여 연봉제, 퇴직금제도 변경 등을 추진하고 있어서 연봉제는 금년도 노사관계의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그동안에는 사무관리직이나 판매서비스직에 한정적으로 도입되었으나, 이제는 제조업 생산직을 제외한 전 산업, 전 직종에 연봉제의 도입이 검토되고 있다.
*연공주의에서 성과주의로
연봉제는 개인의 능력, 실적, 공헌도 등을 평가하여 계약에 의하여 연간 임금액이 결정되는 능력중시형의 임금지급체계이며, 학력·근속연수 등의 속인적(屬人的) 요소 중심의 연공제에서 성과 중심의 성과주의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연봉제의 확산은 성과주의를 정착시킴으로써 기업의 채용관행의 변화와 함께 조직내 고용관행 내지 교섭관행의 변화를 가져 올 것이며, 따라서 근로자들의 근무태도나 업무수행의 자세도 바뀌게 될 것이다.
연봉제를 도입하는 경우 능력과 실적이 직접 임금에 연결되므로 근로자에게 능력·실적주의에 의한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인적 자원의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고, 우수한 인재의 확보·유지가 가능하며, 임금체계와 임금지급 구조를 단순화시켜 임금관리가 용이해지는 등의 장점이 있다.
그러나 연봉제는 상기한 장점 못지 않게 성과에 대한 평가기준의 공정성과 객관성이 담보되지 않을 경우 또 하나의 노동통제로 악용될 가능성과 함께 과도한 경쟁유발로 인한 조직시너지 효과 감소라는 문제점이 있다. 또한 연구직 등의 경우에 단기성과 위주의 업무수행은 조직이나 근로자 개인의 장기적인 경쟁력 확보에 역행하게 된다. 따라서 생산성 향상과 조직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가 오히려 조직내의 분위기를 경직시키고 소속감을 저하시켜 본래의 도입 취지와는 동떨어진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투명한 경영과 근로자의 신뢰
어쨌든 연봉제가 모든 기업의 주요 화두로 떠오른 이 시점에서 연봉제를 도입하는 경우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어떤 대상의 근로자에게, 어느 정도의 폭으로, 어떤 절차에 의하여 실시할 것인가, 근로기준법에 걸리는 사항은 무엇인가?」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반면, 근로자측에서는「연봉제가 임금 삭감이나 정리해고의 보조수단(즉, 무언의 해고 압력)으로 악용될 가능성과 사용자의 자의적인 평가」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노동조합들은 「연봉제를 고리로 하는 사용자측의 노무관리와 개별계약으로의 교섭관행 변화가 초래할 노조 약화」에 대한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연봉제라 할 때 용어에서 오는 느낌으로 순수연봉제를 떠올리게 되지만, 실제 우리나라에서 임원이 아닌 일반 근로자에게 순수연봉제를 적용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현재 연봉제를 실시하고 있는 기업들은 대부분 기본급과 제수당, 고정 상여금을 기본연봉으로 하고, 변동상여금에 해당되는 부분을 업적 연봉으로 나누어 지급하고 있으며, 연장근로수당, 연월차수당 등의 법정수당과 자격수당, 면허수당 등의 속인적 수당은 연봉에 포함시키지 않고 별도로 지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연월차휴가수당을 연봉에 포함시키는 것은 현행법상 허용되지 않는다.
근로기준법상 시간외 근로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는 관리·감독적 지위에 있는 근로자, 재량근로대상 근로자, 외판사원 등에 대하여는 일단 연봉제의 도입이 용이할 것이나, 어떤 경우에도 연봉제를 도입하기 위하여는 취업규칙이나 단체협약의 변경 등 근로조건의 변경절차를 거쳐야 한다. 또한 년 단위의 인건비 총액을 연봉으로 계산하여 관리를 간소화하고자 하는 연봉제의 취지와 퇴직금제도 사이에 충돌이 있을 수 있으나, 근로자의 요구가 있는 경우에는 노사합의에 의한 퇴직금 중간정산제를 활용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연봉제의 도입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노동법 적용상의 문제보다,’공정한 평가(evaluation)와 보상(reward)의 연계’와 ‘열린 경영’이라고 생각된다.
IMF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리 기업이 경쟁력 제고를 위하여 인적자원 관리의 혁신 및 선진화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봉제 도입의 목표를 생산성 향상과 근로자의 능력개발 등 기업과 근로자의 장기적인 경쟁력 제고에 두기 보다는 단순히 인건비 절감만을 목적으로 하거나 노무관리의 강화나 조기퇴직, 정리해고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경우에는 ‘인적 자원의 동기부여’라는 본래의 목표를 훼손하게 되고 노사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노사간의 성실한 협의를 기반으로 하는 임금체계 개편, 실적과 능력에 대한 평가의 균등성과 공평성, 평가 결과에 승복할 수 있는 조직문화와 활발한 의사소통, 경영정보 공개 등 투명한 경영이 전제되어야 근로자측의 신뢰와 수용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노조도 능력과 숙련 향상에 주목해야
실제로 현재 우리 사업장에서 가감의 폭이 큰 연봉제의 도입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고 하더라도, 연봉제라는 제도 자체가 가져 올 관행 및 의식의 변화로 인한 파급효과는 매우 클 것이다.
연봉제를 도입하기만 하면 생산성 향상과 경쟁력 제고가 저절로 이루어지고 노무관리가 용이해질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무턱대고 이를 도입하려고 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구조조정의 태풍 속에서 긴장상태에 있는 근로자들은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 것이다. 아울러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도 절실한 공동체적 연대감은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근로자나 노동조합도 지금 당장의 문제로 고용유지가 최대의 화두이기는 하나, 연봉제를 무조건 자본측의 통제수단으로만 생각하고 불신할 것이 아니라 차제에 스스로의 능력과 숙련 향상을 위한 교육훈련에 노조 활동의 역점을 두는 적극적인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1999.01.08
김소영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매일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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