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 데니소프(59) 평양 주재 러시아대사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로서 정책결정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이다. 러시아에서 ‘북한 인맥의 본산’이라고 인정받는 모스크바 국제관계 대학 출신으로 지난 96년 평양 주재 러시아 대사로 취임했다. 금창리 지하 시설을 둘러싼 한반도 위기설, 미·북한 협상, 4자 회담 등 한반도 문제가 또다시 국제적인 이슈로 부각되는 요즘, 데니소프 대사가 평양 현지에서 관찰한 북한 지도부의 입장을 <시사저널> 편집자문위원인 이창주 교수 (조지워싱턴 대학 유럽러시아연구소 교수·국제 정치)가 워싱턴에서 국제 전화를 걸어서 알아 보았다.

– 지난해 말부터 북한의 금창리 지하 시설에 대한 사찰 문제로 미·북한 관계가 갈등하고 있습니다. 한반도 긴장설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한 평양의 분위기는 어떠합니까?

= 한마디로 얘기한다면 미국이 요구하는 무조건적인 금창리 사찰을 평양 당국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은 분명합니다. 핵시설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이것은 김정일 정권의 생존권과도 같습니다. 그 이유는, 클린턴 행정부가 금창리 사찰 문제를 제기하고 미국 의회를 앞세워 강경 자세로 돌아선 배경에 대해 평양 당국이 강한 의혹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의 목표가 금창리 사찰보다는 김정일 정권을 흔들어 보려는 속셈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북한 군부를 초강경자세로 전환케 하고 있습니다.

– 94년 제네바 핵 협상 타결 이후 곡절이 몇번있었지만 미·북한 관계는 비교적 순탄했고 어느 정도 신뢰감도 있었다고 봅니다. 현실적 이해 관계를 따져 볼 때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끝까지 거절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미·북한 관계는 미국의 동북아 전략과 한반도에 대한 지속적인 영향력 유지라는 외교 목표와 이해 관계, 그리고 북한의 생존 및 국가발전 전략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점이 있었지만 비교적 긍정적인 전망이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평양에서는 대미협상 진행에 대해 불만이 제기되고 강·온 세력 간에 마찰이 일어나는 등 권력 구조 내에서 불협화음이 발생했습니다. 미국이 약속한 중유의 공급 부진, 경제 제재 완화 조처 불이행, 식량 지원 미흡, 경수로 건설 사업 지연 등 어느것 하나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북한이 처음에는 거부하다가 결국 4자 회담을 받아들인 것도 미국의 설득과 약속을 수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국이 제시한 약속이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평양의 판단입니다. 이런 판국에 금창리 사찰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북한은 이제 철저한 ‘기브 앤드 테이크’ 원칙과 대응 전략을 새로이 수립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미국이 금창리 문제를 다루면서 제2의 이라크 사태 가능성을 내비친 것에 대해 평양은 상당히 흥분해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현재 평양이 미국에 대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 최근 한반도의 새로운 긴장 분위기는 북한이 만들었다기보다는 미국이 구성한 시나리오에서 말미암은 것 같습니다. 확인되지도 않은 사안에 대해 공격적으로 대응해 북한 군부를 자극하고, 한국에 대해서는 대북 감정을 부추기면서 한반도 위기설을 흘리고 있는 미국의 저의가 의심스럽습니다. 미국이 노리는 대북전략의 핵심 목표는 김정일 정권 무력화라고 판단되는데, 여기에 일본의 군사적 야망이 가세하고 있습니다.

= 그같은 분석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도 미국의 대북 접근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주권 국가에 대해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사찰을 요구하는 것은 패권주의적 발상입니다. 러시아나 중국도 이에 공감합니다. 누구도 단언할 수는 없지만 평양 외교가는 금창리가 핵 관련 시설이 아니라는 북한의 주장에 더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파악하고 있는 미국이 왜 갑자기 강경 자세로 돌아서 공격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북한의 군사력은 이라크의 경우와 다르다고 봅니다. 솔직히 말해서 어느 누구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것이 오늘의 북한 군사력이며, 이것이 미·북한 협상을 성사시킨 배경입니다. 만일 미국이 군사 행동을 할 때 북한이 그 이상으로 군사적 대응을 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동북아는 물론 미국에도 치명적이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은 현단계에서 김정일 정권을 무력화하겠다는 목표를 수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북한의 군사력이 이라크와 다른 것처럼 북한의 사회·정치적 구조 또한 독특하며, 철옹성 같은 일사불란한 동원 체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북한 관계를 개선해 북한의 군사력을 억제하고, 신진 권력 엘리트들의 성장을 지원하며, 국제 사회 편입을 앞당기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권고

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자세가 미국의 국익에도 도움이 되며 주변국과의 마찰과 대립을 최소화하는 길입니다.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은 설득력도 없으며 오히려 북한의 군비 강화를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 미·북한 관계가 악화하면서 최근 북한에 대한 한·미·일 3국 공조 체제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러한 현상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봅니다. 특히 일본이 한국의 대북 감정과 미국의 강경 자세를 이용해 적극적으로 북한의 무장을 해제하고 자국의 방위력을 증강하려는 속셈을 보이고 있는 이때 3국 공조 체제의 성격과 방향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평양에서 보는 한·미·일 공조 체제는 북한과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미국의 채찍 정책이 제시될 때마다 등장하는 압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반도 문제는 이제 국제 문제입니다. 3국 공조 체제는 위기감을 조성할 뿐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에 기여할 수 없습니다. 북한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가 참여하지 않는 형태로는 냉전 시대와 비슷한 대립적 국제 관계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말하고 싶은 것은, 한국이 미·일의 대북 정책에 가담해 북한에 대한 제재나 고립 정책에 참여하는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적어도 한국의 대북 정책은 미국이나 일본 등과 분명히 달라야 하고 민족적인 고려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한국은 국제 사회를 향해 북한 제재만을 외치다가 아무런 호응도 받지 못한 채 남북관계를 최악의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김영삼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북한 제재에 협조해 달라고 되풀이하다 돌아간 것을 기억합니다. 당시 모스크바 외교가는 어떻게 같은 민족이 사는 나라를 죽이라는 얘기를 남의 나라에 와서 하고 다니냐며 비웃었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클린턴 행정부에 북한에 대한 지원과 경제 제재 완화를 요구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정책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김대중 정부는 햇볕 정책을 수립해 가능한 한 정치적 이해나 논리를 배제하고 민간 교류를 활성화하면서 이산 가족 상봉 등 민족 간의 인도적 관계 개선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금강산 관광은 햇볕 정책이 이루어낸 결과입니다. 이와 관련해 평양 입장은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것은 남북 관계에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며 상징성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비슷한 유형의 교류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도록 더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정치적으로는 북한이 한국 정부의 변화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번 베이징 회담에서 비료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김대중 정부가 정치적 인기를 얻기 위해 이산 가족 문제를 정치 쟁점화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또한 최근의 한·미·일 3국 공조체제에 대해서도 의혹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이 한국의 정경 분리 정책에 대해 믿음을 갖게 되고 순수한 경제 교류와 식량 지원이 이루어져 미·북한 관계가 발전하면 금년 하반기쯤 남북 정상 회담을 구체적으로 추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미국의 이해 관계와도 연관됩니다. 한국도 이제 정교한 북한 정책과 통일 목표를 수립할 시점입니다.

– 금창리 사찰 문제에서 비롯된 현재의 미·북한 관계가 최악의 상태까지 가지 않고 돌파구가 마련될 것으로 보입니다만

= 동감입니다. 아마 미국이 어떤 식으로든 당근을 제시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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