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일부터 ‘숨겨진 살인자’로 불리는 대인지뢰의 생산과 사용 등을 포괄적으로 금지하는 ‘대인지뢰의 사용, 금지 및 폐기 등에 관한 협약’(오타와협약)이 공식 발효된다. 하지만 100만여개에 이르는 지뢰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는 여전히 이 협약의 무풍지대에 속한다. 한국 정부가 이 협약에 가입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가입하지 않을 방침임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오타와협약 발효와 함께 ‘지뢰밭’ 한반도엔 국제적인 따가운 시선이 쏠리고 있다. 한반도의 지뢰가 제거되지 않고서는 오타와협약이 온전히 빛을 발할 수 없다는게 국제사회의 인식이기 때문이다.
지뢰 고수 미국도 여론에 태도 바꿔
노르웨이 캐나다 등 대다수 국가들과 전세계 1200여개의 지뢰금지 운동단체들은 협약 공식발효를 기점으로 한반도 지뢰제거 운동을 본격화할 방침이다. 국제적인 지뢰금지운동으로 노벨평화상을 탄 조디 윌리엄스(48·여·미국)는 이르면 10월께 판문점을 통해 남북한을 동시에 오가며 양쪽 당국에 한반도에서의 지뢰 제거를 공 식 촉구한다는 활동계획을 세워놓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제사회는 이미 미국 주도의 ‘특정통상무기 사용금지 및 제한조 약’(CWW)에 규정된 ‘제한적인 재래식 대인지뢰의 사용금지조항 ’을 뛰어넘어, 대인지뢰 사용을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오타와협약 을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추세다. 이는 이 협약에 서명한 나라가 133개국이며 이중 국회 비준을 이미 마친 나라가 57개국에 이른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국내에서 지뢰 제거를 추진하는 민간단체인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집행위원장 조재국)에 따르면, 일 본 정부는 앞으로 5년간 100억엔(약 1천억원)의 기금으로 지뢰 제 거 및 피해자 보상을 돕는 ‘(지뢰)희생자 제로프로그램’을 펴겠다고 공언했으며 캐나다 정부도 7천만달러(약 840억원)를 지뢰금 지운동에 쓰겠다고 약속했다. 오타와협약의 비서명국가인 러시아 와 우크라이나까지도 조만간 지뢰 생산을 중단하고, 쌓아둔 지뢰를 파기하겠다고 밝혔다.
지뢰 제거의 가장 큰 걸림돌로 눈총을 받고 있는 미국 정부의 미묘한 입장 변화도 눈길을 끈다. 대인지뢰의 최대 수출국이기도 한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애초엔 “전쟁이 발발하면 미군의 생명 을 1차적으로 보호해 줄” 지뢰를 한반도에서 없앨 뜻이 전혀 없음을 밝혔다. 그래서 북한의 군사위협이 상존하는 한반도에서는 예외를 인정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세계 60여개국에 1억개 가량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대인지뢰 피해자가 해마다 2만6천여명에 이르고 이중 83%가 민간인이라는 대인지뢰 반대운동단체들의 주 장이 설득력을 얻고, 지뢰로 팔다리가 잘려나간 어린이들의 처참 한 사진 등이 여론을 환기시키면서 미국 정부는 곤혹스러운 처지 에 빠졌다. 고민 끝에 미국 정부가 최근 내놓은 것이 ‘디마인 2 010 프로그램’이다. 2010년까지 지구상에서 지뢰를 영원히 추방 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미 정부는 오는 2003년까지 미국의 모든 대인지뢰 사용을 금지시키되, 한반도만 예외로 2006년까지 지뢰를 없애겠다고 밝혔다. 또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은 지난해 말 대인지뢰 제거 등을 위해 해마다 10억달러를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군사적 효용성 주장도 차츰 설 자리 좁아져
전세계가 이렇게 움직이는데도 지뢰의 최대 피해자인 한국 정부는 지뢰제거와 관련한 어떤 구체적인 프로그램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 지뢰 제거는 국가보안법 철폐만큼이나 건드리기 힘 든 성역이다. 이미 묻혀있는 100여만개의 지뢰는 놓아둔 채, 추가 생산이나 수출을 하지 않고 지뢰피해자를 위한 기금 출연을 고려하는 정도다.
주무부서인 국방부는 “북한의 남침위협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있는 우리나라로선 방어를 위한 지뢰 사용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 다. 전쟁 억제와 유사시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지뢰가 유효하다는 판단인 것이다. 지난 96년 한반도 방어계획을 검토하기 위한 한미연합사 모의전쟁게임에서 지뢰를 사용하지 않았을 경우 매일 수천명의 군과 민간인 살상자가 추가로 발생한 것도 지뢰 유용론 을 내세우는 근거다.
그러나 많은 군사전문가들은 이런 주장이 날이 갈수록 설득력을 잃고 있다고 반박한다. 북한군이 침투해 들어오리라고 예상되는 길목에 지뢰를 묻어둬야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엔 허점이 많 다는 것이다. 전 한미연합사 야전군사령관 제임스 홀링워스 장군 은 “대인지뢰가 실제로 북한군 공격 때 오히려 아군의 자유스러운 기동을 방해할 것”이라면서 “지뢰를 통한 남침 지연전략은 나중에 미군과 한국 민간인들을 대규모로 희생시킬 수도 있다”고 말한다. 또 지금과 같은 첨단무기 시대에는 북한군의 초기 공격 을 지연시킬 수 있는 다양한 신무기를 개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공격 경고체제도 크게 개선할 수 있어 갈수록 지뢰의 군사적 효용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오타와협약에 가입하면 남북대치 상황에서 우리쪽만 일방적으로 지뢰 제거를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에 대해서도 지뢰반대운동단체들은 매설지뢰 제거시한을 들어 반박한다. 오타와협약은 매설지뢰를 협약 발효 후 최장 10년 이내에 폐기하도록 규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불가피한 경우에는 가입국이 이 기간을 10년까지 추가 연장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협약 가입뒤 남북 군축 등 추진해야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 김창수 정책홍보책임자는 “정부가 일단 협약에 가입한 뒤 남북 군축협상을 추진하는 게 바람직한 방안”이라며 “최악의 경우 북한이 지뢰 제거에 소극적 태도를 보여 남한 만 지뢰를 제거하는 상황에 처하더라도 2010년쯤엔 이미 지뢰를 대체할 신무기 개발이 이뤄져 지뢰는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금강산관광 뱃길이 활짝 열린 현실은 비무장지대 의 평화적 이용과 육로를 통한 남북 교류가 먼 훗날의 일이 아님 을 우리에게 새삼 일깨워줬다. 이제 정부도 냉전의 산물인 지뢰를 제거하는 작업에 좀더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
임을출 기자
◇ 어디에? 몇개가? 아무도 모른다
한반도에 묻혀 있는 정확한 지뢰의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지난 해 1월 임복진 의원(국민회의)은 육군본부 자료를 인용해 “비무장지대의 지뢰매설지역은 2억9760만평으로 여의도 면적의 334배에 이르며 탐지가 불가능한 대인지뢰만 100만개가 땅 속에 묻혀 있어 이를 제거하는 데만 10억달러가 든다”고 밝혔다. 이보다 구체 적인 자료는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남한쪽이 매설한 지뢰 대 부분은 미국에서 수입한 것이다. 북한이 뿌린 지뢰 숫자를 점치기 는 더욱 어렵다. 다만 남쪽과 비슷한 숫자의 지뢰가 비무장지대를 비롯한 주요 해안지역에 묻혀 있을 것으로 막연하게 추정될 뿐이 다.
남한쪽의 지뢰는 주로 비무장지대에 한정돼 매설돼 있다. 하지만 “한반도의 지뢰는 제한된 지역에서 엄격한 통제 아래 사용되기 때문에 민간인들의 피해가 없다”는 한국과 미군 당국의 주장을 지뢰금지운동 단체들은 일축한다. 실제로 지뢰로 인한 민간인 피 해가 속속 보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20여개 단체로 구성된 한국대 인지뢰대책회의의 조재국 집행위원장은 “지뢰피해자들의 정확한 실상 파악을 위해 자체조사를 벌인 결과, 민간인통제선 내 비무 장지대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지뢰로 인해 목숨을 잃거나 치명적 상처를 입은 사례가 많았다”며 “한국전쟁 이후 민간인 피해자 가 적어도 1천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이나 미국은 지뢰피해자를 위한 막대한 기금을 내놓기도 하 는데 대표적인 지뢰피해국인 우리 정부는 자국민의 피해자 숫자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비무장지대 안에서 뿐 아니라 밖에서의 피해자도 적지 않다. 지난 해 여름 경기북부지역의 집중호우로 발목지뢰만 300여발이 유실돼 민간인 여러명이 발가락이 잘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지난 96년 7월 말에도 경기도 연천지역 집중호우 때 지뢰 등 폭발물의 상당량이 유실됐으나 아직 회수되지 못한 채 하천주변 등에 묻혀 있는 실정이다.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가 자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경기도 옹진군 백령면, 연천군 백학면과 신서면,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등은 지뢰사망자를 위한 위령제를 따로 지낸 적이 있 을 정도로 민간인 피해자가 많다고 한다. 우리 국방부와 미군 당 국은 그동안 비무장지대 외에는 지뢰가 없다고 공식적으로 밝혀왔지만, 후방지역의 15개 방공포 기지와 그 주변에도 10만여개의 지뢰가 묻혀 있다는 게 대책회의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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