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바브웨 새로운 노동자 정당에 던져진 도전들

주간녹색좌파(Green Left Weekly) 3/31

하라레 — 짐바브웨 노동총동맹(ZCTU)의 모건 츠방기라이 사무총장은 3월 1일의 성명에서 동맹 지도부가 노동자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정치조직”의 건설을 위임했다고 밝혔다. 이 성명은 이 남아프리카 나라 전역에 생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ZCTU 지도부와 시민 사회 단체 대표자들은 2월말 회합을 갖고 “강력하고 민주적이며 대중적으로 조직된 민중 운동체”의 필요성을 확인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국가적 부실과 날로 악화되어 가는 경제적 상황하에서 짐바브웨 천 이백만 인구의 60% 이상이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다. 엄청난 불평등은 놀라울 정도이며, 격차는 계속 벌어지고 있다. 1980년 독립 이후 짐바브웨에 남은 8만 백인 정착자들과 금융, 상업, 정치 분야에 포진한 한 줌의 흑인 엘리트들이 그 주된 수혜 계층이다.

노동자 정당의 태동을 향한 첫 단계는 주요한 좌파 네트워크인 제헌의회(의장: 츠방기라이)나 소규모 정치정당인 짐바브웨 민주연합(ZUD) 등과의 협의일 것이다. ZUD의 지도자 마가렛 동고는 2000년 2월의 대선에서 75세의 로버트 무가베 현대통령에 도전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츠방기라이는, 당 건설을 위해 자신은 ZCTU의 직책을 사임할 것이라고 밝혔다. ZCTU의 의장인 깁슨 시반다 역시 새로운 당에 좀 더 무게를 실어주기 위해 물러날 것으로 보인다.

1980년 이래 짐바브웨에는 여러 야당이 존재해왔다. 이 중 어느 정당도 무가베에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특히 두 민족 해방운동 조직을 하나로 만든 1987년의 통일협정은 이러한 경향을 심화시켰다. 통합된 한 조직은 무가베의 짐바브웨 아프리카인 전국연합(ZANU)으로 쇼나족 내에서 광범한 지지를 받았으며, 1970년대의 해방전쟁 기간에는 중국의 원조를 받았다. 다른 한 조직은 곧 물러날 부통령 조슈아 응코모의 짐바브웨 아프리카인 인민연합(ZAPU)으로 지지기반은 응데벨레족이었으며,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

이 통합으로 짐바브웨 아프리카인 전국연합-애국전선(ZANU-PF)이 탄생했다.

여타 정당들은 ZANU-PF의 “사회주의적” 수사와 지도부의 부르주아화에 편승하여 우파적 입지를 확보하려 시도했었다.

모호한 좌파 색채

무가베의 반대자들은 모두 실패했으며 현재 ZANU-PF는 의석의 97%를 점하고 있다. 1990년 이후의 두 번의 선거는 정치적 무관심으로 특징지워진다. 1980년과 1985년의 선거는 90% 이상의 투표율을 보였지만, 이때에는 겨우 50%를 약간 웃돌았을 뿐이다.

1998년 무가베가 사회주의의 부활과 국제적 금융기관에 대한 여러 차례의 비난을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좌파로서 그의 평판은 모호하기만 하다. 1980년대 그의 정부는 경제적 개입을 거의 행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핵심 기업들에 대한 백인들의 소유권과 통제를 허용하여, 로디지아(소수 백인 정권 시절 짐바브웨의 국명) 당시 보수파 이안 스미스 치하와 실질적인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좌익 야당 세력이 등장할 때마다 무가베는 언제나 좌파 색채를 띤 구호 등으로 공격했다. 그는 한때 항의하는 학생들을 아파르트헤이트의 대리인이라 부르기도 했다.

짐바브웨 경제가 침체하기 시작하면서 ZANU-PF는 세계은행의 파멸적인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부과를 승인했다. 5년 이상 부과된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 한때 견고했던 짐바브웨의 제조업 생산고의 40%가 감소했으며, 노동자의 생활수준 역시 같은 정도로 하락했다. 또한 이전 시기 인상적이었던 보건 및 교육 분야의 성취도 물거품이 되었다.

무가베의 통치에 대한 일련의 대중적 도전들은 통일된 진보적 정치정당의 등장을 좀 더 현실적으로 만들고 있다.

이런 도전의 움직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여성들을 매춘 혐의자로 몰아 무작위로 체포하던 1980년대 중반에 출발하여 수적으로는 소규모이지만 매우 선진적인 여성주의 운동 그룹이 있으며, 1980년대 후반이래 여러 차례의 학생 봉기도 있었다. 무가베의 악명 높은 동성애 혐오에 용감히 저항해 온 동성애자 권리 운동은 소수이기는 하지만 제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1996년에 ZANU의 응데벨레족들에 대한 1980년대의 탄압을 상기시킨 바 있는 인권 그룹들은 점점 더 자신감을 얻어가고 있다. 무토지 농민들의 조직은 지난 2년간 상업적 농장들에 무단 침입하며 정부의 탄압을 기꺼이 감내하고 있다. 도시의 민간 단체들은 지역 행정 서비스 질의 하락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올해 초에는 수도 위생 상태의 악화로 도시 지역에 콜레라가 발생, 100여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1997년에는 민족 해방전쟁 참전 군인들이 거리를 점거하기도 했으며, 노동 조합 운동은 그 생명력을 되찾아가고 있다.

파업의 고조

비록 잘 조직되지도 않았으며 무가베의 노동장관들의 입김으로 분열되어 있기는 하지만, ZCTU는 1996년에서 98년 사이 몰아쳤던 극적인 파업들의 득을 보았으며, 츠방기라이와 시반다는 순식간에 의회의 나머지 의석을 장악한 지도자가 되었다. 무가베는 다양한 형태의 회유와 탄압으로 응답했다. 해방전쟁 참전 군인들은 상당한 정도의 연금 지불로 회유되었고, 무가베는 광범위한 토지 개혁 프로그램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언제나 반대자들의 뒤편에서는 서구 정부들과 국제적 금융기관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1997년 말 노동자들의 첫번째 대규모적인 작업장 이탈이 있은 후 츠방기라이는 폭력 조직의 구타를 당했다. 1998년 3월에는 ZCTU의 주요한 지역 사무실이 방화범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1998년 말 무가베는 명백히 헌법에 위배되는 대통령령을 발동시켜 파업을 금지시켰다.

1월 한 신문이 실패로 끝난 것으로 전해진 군부 내 반대파의 쿠데타를 보도한 후 무가베는 국방장관 모벤 마하치의 결정을 승인, 마크 차분두카와 레이 초토, 두 저널리스트를 불법적으로 구금하고 고문했으며 신문 발행인인 클라이브 윌슨을 잠시 감금시켰다.

재난이 계속되면서 분열된 야당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잠재성은 점점 더 현실화되고 있다. 시민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 경제 위기의 진행(특히 1997년 11월과 1998년 8월에 있었던 투기자들에 의한 두 번의 통화 위기에 뒤이어 해고의 파도가 다시 몰아쳤으며, 물가는 큰 폭으로 상승했다), 부패에 대한 점증하는 반감(ZANU-PF의 핵심 후원자였던 로저 보카는 그의 은행-담배 제국이 파산한 후 미화 50만불에 이르는 위조 국채를 발행하여 짐바브웨로부터 달아날 때까지 정부의 구제 금융을 받았다) 등이 그런 가능성을 심화시켰다. 또한 무가베는 지난 10월 롤랑 카빌라의 콩고민주공화국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6,000명의 군인을 파견하는, 극도로 평판이 좋지 않은 결정을 내렸다. 이 군인들의 대부분은 현재 시체 자루에 담긴채 돌아오고 있다. 이 파병은 부분적으로는 자신의 측근이 한 콩고 민주공화국 투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새로운 당과 그 연합 세력은 정권을 장악하기에-만약 무가베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허용한다면 말이다-충분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확실한 상황들

하지만 여전히 사태는 불확실하다. 1980년대에 농촌 지역에 건설한 병원과 학교들 덕분에 ZANU-PF는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농민들로부터 특별한 충성을 유지해 왔다. 올해의 많은 비는 다음 경작 시기에 앞선 식품 구호와 종자 꾸러미의 형태로 이런 후원 관계를 지속시킬 기회를 더 제공해줄 지도 모른다.

반면 치솟는 인플레이션과 생필품에 대한 가격통제의 철폐를 요구하는 국제통화기금의 압력, 그리고 내년 초 농촌 지역에 부과될 새로운 부가가치세는 그런 충성을 침식해나갈 것이다.

츠방기라이의 더 큰 걱정거리는 명확한 권한과 조직적 기반을 가진 저항 활동가들의 층위가 상대적으로 얇다는 것이다. 하라레에 있는 정치적 반대자들과 비정부기구 간부들의 대부분은 소부르주아 출신이다. 이들은 ZANU-PF의 통치에 대한 폭넓은 비판을 잘 정교화시켜 왔다.

대기업들로부터의 재정적 지원이 예상되는 가운데 반대 진영 내 자유주의적 분파는 선거시의 대중적 연합을 위한 노력뿐만 아니라 1979년의 랭카스터 의회 헌법을 개정하기 위한 발안에 있어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이것은 그리 전례 없는 일도 아닐 것이다. 이웃 잠비아의 경우 노조 지도자인 프레데릭 칠루바는 보수 세력(미 정부를 포함)들의 지원 속에 성장해 왔으며, 재정적으로도 충분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 칠루바는 1991년의 선거에서 1964년이래 통치해왔던 오랜 민족주의자인 케네스 카운다에 쉽사리 승리했다.

칠루바는 곧 인기없는 경제 정책을 채택, 잠비아의 백만 공식부문 노동자 일자리의 75%를 줄여버렸다. 카운다의 당에 대한 지지는 급속히 되살아났다. 칠루바가 문제성있는 헌법 개정을 통해 카운다가 다시 후보로 나서는 것을 금지시키지 않았더라면 1996년 선거에서 카운다는 압도적 다수표로 당선되었을 지도 모른다.

츠방기라이가 십년 전 ZCTU의 직책을 맡았을 때, 그는 “신좌파” 사회주의자였다. 그의 초기 지도력의 많은 부분은 효과가 없긴 했지만 구조조정에 대한 활발한 공격을 수행하는 데에 바쳐졌다.

1990년대 동안 해고가 급증하면서 극도의 가입율 저하에 고통받아왔던 ZCTU는 몇몇 분야(주택, 보건 의료, 연금, 사회 보장)에서 대기업과 “합의주의적” 관계를 맺는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결코 오만한 여당과의 바람직한 “사회적 계약”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동맹 집행부가 새로운 정당지지를 선언하자 츠방기라이 역시 ZCTU가 삼자간 경제정책위원회로부터 탈퇴한다는 것을 천명했다.

하지만 구조조정에 대한 ZCTU의 기술적 비판들의 많은 부분이 이미 사라졌고, 1996년의 대안적 경제정책 문건은 심지어 정통적 전략들을 “필요하지만 불충분한” 것으로 평가했다.

짐바브웨에 요구되는 것은 경제정책의 변화이다. 현재의 역관계에 대한 도전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할 것이다; 자본 통제의 부과,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의 대규모 채무에 대한 거부-그 구조 조정 처방은 짐바브웨의 경제 난국을 악화시켰다, 무역 자유화 조치의 취소(특히 남아프리카가 지역내 공정한 무역보다는 유럽연합에 자유무역관계를 제공해줄 뿐이라는 점에서), 경직된 통화 정책의 유연화, 지금까지 소홀히 해왔던 기본 하부구조와 공공작업, 주택, 사회 서비스 등을 돌보기 위한 정부 지출과 투자의 획기적인 재조정.

목소리 큰 자유주의자들과 대기업들의 압력 속에서 도시 및 농촌 지역의 가난한 대중을 강력히 옹호하는 강령을 만드는 것은 츠방기라이의 용기에 대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새 정당이 충분히 민주적인 지도자들과 활동가들, 기술자들을 빠른 시일 내에 끌어 모을 수 있을 것인가 역시 큰 논란 거리이다. 하지만 시간과 에너지는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츠방기라이나 시반다, ZCTU가 급진적인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위한 입장을 취하도록 만드는, 기층으로부터의 상당한 압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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