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 잡아먹는 ‘종퇴보험’
생보사쪽서 일방적 해지 기업 대출금과 바꿔먹기 증가…횡포 막을 장치가 없다
퇴직금의 안정적 지급을 보장하기 위해 도입된 종업원퇴직적립보험(종퇴보험) 제도가 오히려 퇴직금을 ‘잡아먹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생명보험사가 종퇴보험을 일방적으로 해지해 종퇴보험금을 기업에 빌려준 대출금을 회수하는 사례가 위험수위를 넘고 있기 때문이다.
종퇴보험은 퇴직금을 제대로 적립하지 않아 발생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기업에 세제감면 혜택을 주는 대신 퇴직금의 사외적립을 유도한다는 취지에서 개발된 보험상품이다. 퇴직금 추계액의 50%를 넘지 않은 범위에서 종퇴보험에 가입해 보험료를 내는 방식으로 퇴직금을 사외적립하면, 기업은 이에 대해 100% 손비 처리를 받을 수 있다.
해지동의서도 위조
종업원 300인 이상 대기업의 대부분이 종퇴보험에 가입하는 더욱 큰 동기는 따로 있다. 생보사로부터 대출을 쉽게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생기고 있다. 생보사들이 기업에 대출하면서 종퇴보험을 언제든 일방 해지할 수 있다는 해지동의서를 기업쪽에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기업이 경영난을 겪을 경우 종퇴보험을 해지해 대출금과 상계 처리하기 위해서다. 종퇴보험이 사실상 기업 대출의 ‘담보’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종퇴보험 약관에는 중도 해지 때에는 반드시 노동조합이나 노사협의회 등 노동자를 대표할 수 있는 기관의 동의를 받도록 돼 있다. 하지만 제대로 지켜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예 노동자들의 해지동의서를 갖추지 않거나, 생보사와 기업이 이를 거짓으로 꾸미는 일도 다반사다. 일부 기업에서는 자금사정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회사나, 생보사쪽의 대출금 회수 압력에 못 이겨 노조위원장이 직권으로 동의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이유에서 발생한 종퇴보험을 둘러싼 분쟁은 IMF사태 이후 폭증했다. 지난해 종퇴보험 관련 분쟁은 97년 14건에서 163건으로 149건이 늘어났다. 이에 비해 전체 보험 관련 분쟁은 97년 1614건에서 지난해 1806건으로 192건 느는 데 그쳤다. 전체 보험 관련 분쟁의 약 80%가 종퇴보험을 둘러싼 분쟁이었던 셈이다(표 참조).
현재 법정관리중인 영진약품(주)(종업원 315명)은 생보사가 해지동의서를 위조한 대표적 예이다. 지난해 8월 금호생명·대한생명은 노조가 동의가 있었던 것처럼 서류를 꾸며 종퇴보험을 일방 해지하고 대출금과 상계 처리해버렸다. 노조는 현재 민사소송을 준비하고 있지만 소송비용만도 2천만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이를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금융감독원은 ‘일이 터진 뒤’ 생보사에 계약을 원상회복하도록 행정지도를 펴고 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생보사들이 법의 허점을 파고들어 ‘시간끌기’ 작전을 펴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금융감독원으로부터 행정명령을 받은 한국생명이 대표적인 예다.
겉으론 처벌조항 강력하지만…
한국생명은 범세공신(주)(종업원 170명)의 종퇴보험을 노동자들의 동의없이 해약한 혐의로 지난해 9월 금융감독원으로부터 보험금을 원상회복하도록 통보받았다. 하지만 같은해 11월 범세공신을 상대로 ‘채무부존재확인소송’을 내놓고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 한국생명은 수산그룹 3개 기업(중공업·특장·정밀)의 종퇴보험에 대해서도 변칙 해약을 해 말썽을 빚었는데,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몇개월에 걸친 공동투쟁에 결국 굴복해 지난해 1월 종퇴보험을 원상회복시켰다.
겉으로는 현행법의 처벌조항은 강력한 편이다. 행정지도를 따르지 않으면 생보사 임원이 해임될 수도 있다. 하지만 ‘금융감독기구의 설치 등에 관한 법률’ 제53조와 금융감독원 내규에는 ‘소송중인 사건은 간여할 수 없다’고 돼 있다. 생보사가 법원에 소송을 낼 경우 더이상 행정지도를 펼 수 없는 것이다. 최근 정부에 종퇴보험 제도개선 건의서를 낸 한국노총 유정엽 연구원은 “노동자 대표의 동의를 얻지 않고 해약할 경우 강력한 처벌조항을 두고, 생보사가 금융감독원의 행정명령에 불복해 소송을 내더라도 일단 종퇴보험을 원상회복시켜 노동자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