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토 폭격과 경제 붕괴
르몽드 디쁠로마띠끄 4월호, 토마스 호프눙
나토 공습이 초기에 가져온 효과는 세르비아인들의 민족주의 감성을 일으켰다는 것인데, 세르비아인 모두가 민족의 ‘역사적 심장부’인 코소보 문제를 둘러싸고 단결했기 때문이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세르비아 내에서 알바니아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 지역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도약대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심각한 위기에 빠져있다. 공습 이전에도 세르비아는 이미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고 빈곤과 부패로 얼룩진 경제는 위기 상태였다. 이 정권이 가까스로 생존하게 된다면 그것은 책략에 능한 밀로셰비치의 기술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의심가는 반대파들을 배제시키는 동시에 규합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정치에 넌더리가 난 국민들에게 있어 주요 관심사는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다
베오그라드의 주요 도로 중 하나인 -수많은 사람들이 뒤죽박죽 모여 부서진 건물에 등을 기대 담배를 물고 있는- 혁명대로(Revolution Boulevard)는 지나가는 외국인들에게 ‘환전합니다, 환전합니다’라며 소리죽여 말건네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심각한 경제 위기 상황에서, 알려진 것처럼 ‘현금 상인’들은 값비싼 독일 마르크를 사고 팔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은행에서는 6 디나르[유고슬라비아 화폐단위]가 1 마르크로 고정되어 있지만 혁명대로에서는 단 일주일 사이에 8에서 9 디나르까지 올랐다.
같은 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또다른 생존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길을 따라 주차해 놓은 자스타파 승용차 트렁크를 열어놓고 뒤범벅된 속옷, 접착제, 초콜렛, 밀수 담배 등을 팔고 있다. 마르크를 바꾸기 위해 정기적으로 그 거리로 나가는 베오그라드의 한 주민에 따르면 노점상들 중에는 연금 수령자 뿐만 아니라 교사, 기술자, 그리고 심지어 군인들도 있다고 한다.
10여 년 전만 해도 베오그라드 주민들은 생계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유고슬라비아 다른 지역처럼 수도 베오그라드는 마샬 티토가 오랫동안 가까스로 억눌러왔던 민족주의적 열병으로 웅웅거리고 있었다. 1989년 1월 28일-라자르 왕자가 검은새(Blackbird)전장에서 오스만 황제인 무라드의 군대에 의해 패한지 600년이 되는 날-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프리슈티나(코소보 주도) 교외에 백만명이 넘는 군중을 끌어 모았다. 복수의 시간-혹은 그렇게 믿는-이 온 것이다. 밀로셰비치는 꼼짝하지 않고 서있는 군중들에게 “세르비아는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고 있고 비록 배제하지는 않지만 이 전쟁에 반드시 군대를 사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제를 은폐하려는 정부의 시도들
10년 후, 수많은 세르비아인들은 자신들이 고국의 ‘요람’으로 여기는 코소보를 단념하는 듯 보인다. 2월 말,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가 랑불레에서 협상을 하고 있었을 때, 민족주의 정당들은 연방 의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면서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하려 했다. 그것은 거의 노력할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따분한 날에 단지 몇십 명의 사람들이 “슬로보[밀로셰비치의 애칭]여 코소보를 손에 넣어라”라고 소리를 치며, 실제로는 확신하지도 않는 반응을 했을 뿐이었다. 지나가는 행인은 노골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민족주의는 더 이상 최후의 수단이 아니지만 전쟁에 의해 가속화될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밀로셰비치의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지배는 이전 보다 훨씬 강화된 듯이 보인다. 밀로셰비치는 자기 맘대로 이 나라를 통치할만한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있다. 베오그라드인권센터 대표이자 현 체제에 대한 극렬한 반대자이기도 한 보진 디미트리예비치는 이러한 상황에 놀라워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지도자가 계속해서 연승할 때 지지하지만 세르비아에서는 그렇지 않다. 크로아티아나 사라예보 어디에도 더 이상 세르비아인들은 없다. 우리는 금방이라도 코소보를 잃을 처지에 있지만 밀로셰비치는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다”. 이 지역 분석가들이 국민들의 최근 분위기를 설명하는 데 가장 흔히 쓰는 단어는 무관심이다. 유고슬라비아의 유일한 독립 언론사인 베타(Beta)지의 주필 라도미르 디클리치는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이러한 상황을 개인적으로 타개해 나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인터내셔널뉴스 제52호 1999년 4월 15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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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前) 유고중앙은행 총재였던 드라고슬라프 아브라모비치는 최근, 독립 주간지 브레메( Vreme)지에서 불길한 세르비아 경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세르비아 기업의 80%가 적자를 보고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한달 평균 임금이 152 마르크(약 81달러)로 떨어졌는데 이는 크로아티아의 757 마르크와 슬로베니아의 1,040 마르크와 비교할 때 엄청나게 낮은 수치이다. 중앙은행의 지급 준비금은 5천만 달러로 떨어졌고 그만큼 이 위기의 사회적 효과가 발휘되고 있다. 공식적인 수치에 따르면 노동인구의 27%가 실업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한다. 아브라모비치에 따르면 연금 생활자들의 사망률은 최근 몇 년 동안 두배가 되었다. 또 그는 베오그라드 적십자사의 통계를 인용하면서 70세 이상의 베오그라드 인구 22만 명이 최근 빈곤 상태에서 홀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파국에 가까워진 경제는 전통 시장의 상실, 구조 개혁의 결핍, 그리고 1992년부터(분리주의자인 보스니아내 세르비아 지도자들의 지원으로) 국제 사회가 유고슬라비아에 부과한 제재 조치에 의해 최종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사회학자인 밀로 페트로비치는 “밀로셰비치가 현시기 재앙의 책임을 서방에만 돌리는 동안 제재 조치는 이미 다른 지역에서도 목격된 바있는 왜곡된 효과를 초래하고 있다. 국민들은 암시장에 의지하거나 매매할 만한 모든 상품들을 불법적으로 거래하면서 생존해 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이미 붕괴 직전에 있는 유고의 경제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인가? 드라고슬라프 아브라모비치는 몇 달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방이 코소보에 대한 협상을 대가로 밀로셰비치에게 차관을 주진 않는 한”이라고 이 경제 위기를 현 정권 붕괴의 가장 좋은 호기로 여기고 있는 베타지의 주필 디클리치는 덧붙인다. 데이턴 협정이 체결되었을 당시 국제적인 제재가 부분적으로 풀렸고 유고슬라비아 당국은 통신회사인 세르비아텔레콤을 그리스-이탈리아 컨소시엄에 매각해 그 과정에서 1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일 기회를 잡았다. 아브라모비치는 유고 당국이 지금까지 시민들이 가구까지 내다파는 것은 용케 막아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상점에 가면 식료품이 있다고 국민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설득시킴으로써 사회적 봉기를 막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난 겨울 세르비아 도시에서 설탕과 석유 공급량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리고 수많은 항의 시위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텔레비젼 뉴스 보도는 코소보 위기-이전의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분쟁(1991-95)과 함께-에 초점을 맞추면서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은폐하고 있다. 코소보가 다수의 알바니아계로 넘어가고 나토가 공습을 한다면 누가 감히 정부의 경제 정책을 비난하거나 파업을 조직할 것인가? 디미트리예비치는 “코소보 문제가 해결될 때에만 사람들이 허위적인 생활을 청산하고 현실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고 당국은 감히 거리낌없이 말하는 극소수의 독립적인 국내 언론을 억 압하기 위해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지난 10월 세르비아 의회는 ‘패배주의’와 ‘유언비어 유포자’에 대해 엄중한 벌금을 가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일간지 드네니 텔레그라프(Dneni Telegraf)지는 천문학적인 벌금이 부과되어 결국 문을 닫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 신문의 소유주인 슬라브코 쿠루비야는 굴복하지 않았다. 현재 이 신문은 인접해 있는 몬테네그로에서 (몇달 동안 공개적으로 밀로셰비치와 대립하고 있는) 몬테네그로 당국의 지원 하에 발행되고 있다. 매일 밤 이 신문은 비밀리에 세르비아로 운송되어 베오그라드에서 은밀히 판매되고 있다. 다른 독립 출판물들의 발행도 어느 경우에나 매우 제한적이며 그와 같은 운명을 피하기 위해 자기검열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연방 정부가 국제적인 압력에 굴복, 법률 제정을 약속했던 새롭고 더 많은 자유를, 전쟁이 가져다 주지는 않을 것이다.
퇴락한 반대세력들
세르비아는 경제 붕괴로부터 어떻게 빠져 나올 것인가? 반대세력들은 당연히 몇 가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겠지만 텔레비젼 시청자들은 그들의 생각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밀로셰비치는 유고슬라비아 국민들의 주요 정보원인 시청각 매체를 장악하고 있고 이는 모든 논쟁에서 밀로셰비치가 빠져나가도록 만든다”고 조란 진지치가 당수로 있는 민주당(DS)의 젊은 경제고문인 슬로보단 프리키치는 말한다. 그러나 반대파가 자신의 견해를 선전할 방송 기회를 가진다 해도 주의를 끌 보장이 없으며, 이는 자신들의 베오그라드 근거지에서조차도 요즘 대중적인 신뢰가 급격히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6-97년 겨울 동안 세르비아부활운동(SPO)과 시민동맹(Civic Alliance), 그리고 민주당으로 구성된 자예드노(Zajedno)동맹은 유고슬라비아에 크나큰 희망의 물결을 가져다 주었다. 세 달 동안 연일 계속된 시위는 당국에 충격을 주었고 당국은 베오그라드를 포함에 약 15개의 도심과 도시에서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르비아는 그 당시 진정한 국민의 힘을 보여주었다”고 밀로 페트로비치는 회상한다. “그러나 국민들의 심오한 염원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전례 없는 동원에 대한 신속한 대응이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오히려 진지치와 드라스코비치의 내부 경쟁은 동맹이 해체된 원인이 되었다.
진지치가 자예드노동맹은 “어려운” 기반에서 형성되었다고 재빨리 변명한지 2년, 그는 여론에서 명백히 밀리고 있다. 한편 드라스코비치는 야당에서 나와 지난 12월 외교를 책임지는 연방 부총리직을 수락했다. 이것은 그의 선거구 주민들에게 하나의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드라스코비치는 어떤 반대도 무시하고 있다. “나는 체제를 수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정부에 참여한 것이다. 나는 유고슬라비아가 유럽으로 개방되는 과정에 가속도를 붙이기 위해 이 직무를 수락했다”. 베오그라드에서는 누구도 이를 믿으려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처음 출세 가도로 달릴 때부터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에서 감히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최고의 책략가 기질을 보여주었다. “밀로셰비치의 가장 큰 자산 중의 하나는 자신보다 약한 적수를 고르는 능력이다”라고 초기부터 그를 반대해온 사회학자 네보야 포포프는 말한다.
결과적으로 유고슬라비아는 분명 이전보다 약해졌지만 밀로셰비치 정권이 이렇게 안정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아무도 그에게 대항할 수 없는 듯 하다. 비록 최근 변를 위한 동맹(Alliance for Change)을 통한 재결성 시도들이 있지만 반대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밀로셰비치가 그의 주변에 용케 만들어놓은 거대한 동맹과 비교할 때 그렇게 확신에 차있는 것 같지는 않다. 두 개의 친정부 정당-세르비아사회당(SPS)과 밀로셰비치의 처 미리야나 마르코비치가 이끌고 있는 유고슬라비아좌파연합(JUL)-은 물론 보이슬라프 세셀지의 세르비아급진당(극우당), 그리고 최근에는 브치 다르스코비치의 SPO가 밀로셰비치와 동맹관계에 있다.
“밀로셰비치가 그의 꼭두각시인 세셀지에 대한 배후 조종을 그만두긴 했지만 그에게는 드라스코비치라는 또다른 꼭두각시가 있다” 라도미르 디클리치는 말한다. 대통령은 불협화음을 내는 “동맹 세력들” 사이의 분쟁을 언제나 중재하는 이상적인 지위에 있다. 이것은 그를 이 세력들의 보증인으로 보이도록 하며 이를 통해 그는 중재자를 찾는 국민들을 안심시킬 수 있다. 국정 운영에 대한 밀로셰비치의 단단한 전술 장악력이 그의 인기가 급락하는 것을 저지할 것인지의 여부는 여전히 두고 볼 일이다. 부정 선거의 전통이 여전함에도 불구하고 투표 결과 그의 당은 느리지만 확실히 지지기반을 잃어가고 있다. 1990년 SPS는 250개의 의석 중 190석을 차지했다. 1993년에는 단지 123개의 의석만을 얻었다. 지난 1997년 9월에 있었던 선거에서 JUL과 연합한 SPS는 더욱 악화돼 단지 110개의 의석만을 차지했다. 밀로셰비치는 자신의 당이 약화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까? 최근 숙청의 물결이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해 준다.
작년 가을 연방군의 합참의장인 몸칠로 페리시치 장군과 공군 및 방공(DCA) 사령관 류비사 벨리코비치가 파면되었다. 군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믿을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그 두 사람은 실수를 했는데, 나토의 항공기가 코소보 상공을 날도록 허용하고 DCA 동원 체제를 해제시킨다는 98년 10월 나토와의 협상에 불만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분석가들은 페리시치 장군이 나토 최고 사령관인 미국의 웨슬리 클라크 장군과 코소보에 대한 일련의 양자간 논의를 거치면서 쌓아올린 ‘신뢰’ 관계 때문에 버림받았을 것으로 믿고 있다.
밀로셰비치는 권력에 대한 장악력이 강화되자 더 나아간 조치는 중도에서 단념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부하 중 한 명인 국가안보기관의 수장 지비카 스타니시치를 해임했다. 그는 1996-7년 겨울 민주화 시위를 막고, 개혁주의 성향의 밀로 유카노비치 몬테네그로 대통령의 정치기반을 동요시키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는 데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그는 코소보에 사용된 전략을 너그럽게 봐주지 않았다. 네보샤 포포프에 따르면, “밀로셰비치는 전형적인 스탈린주의 게임을 벌이고 있다. 그는 이 놀이에 참여한 주요 선수들이 자신에게 충성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선수들을 갈아치우고 있다. 새로 기용된 관료들은 그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믿으며 더욱 헌신한다”.
권력의 회랑에서는 포위되고 있다는 의식이 점점 명백해지고 있다. 밀로세비치는 지금 (티토가 한때 거주했던) 제진예(Dedinje)에 있는 관저에 틀어 박혀 거의 얼굴을 내밀지 않고 있다. 그는 참호로 둘러싸인 궁전에서 왕처럼 행세하고 있다. 텔레비젼 출연도 거의 손가락으로 셀 정도이다. 그것은 마치 ‘외부의 적들’로부터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 민족의 ‘반역자들’이 획책한 음모를 비난하면서 정부가 자기의 게임에서 아웃당한 꼴과 같다.
횡령과 표 매수
현 정권의 관료들 내부의 분위기에 관해서는 거의 어떤 정보도 새어나오지 않고 있다. 군사 전문가 미로슬라프 하지치가 썼듯이 “연방군은 세르비아 사회의 거울”이지만 내부 동향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그에 따르면 연방군은 냉담하고 총체적으로 혼란에 빠져있다. 임금은 체불되어 있고 군대는 현 정권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코소보 탄압의 최선두에 있는 특수 경찰에게 장비와 임금을 포함해 우선적인 특혜를 주기 때문이다. 1992년에 사임한 부크 오프라도비치 장관은 유고슬라비아 붕괴로 군대가 얼마나 극심하게 고통 당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군부대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그리고 보스니아에서 신속히 떠나야만 했다. 수많은 군인들이 나머지 유고의 영토 내에 있는 저질의 임시 막사에 새집을 지었다. “군대는 확실히 불만에 쌓여있지만 밀로셰비치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대기하고 기다리는 나폴레옹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국제법 전문가 콘스탄틴 오브라도비치는 말한다.
지난 10월 밀로셰비치는 자신의 당인 SPS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했다. 이 움직임의 일환으로 온건파로 알려진 부통령 밀로라드 부첼리치를 해임시켰다. “지금 수많은 정부 고위 관료들이 밀로셰비치의 정책으로 인해 이 나라가 침몰하고 있다며 개인적으로 불만스러워하고 자신들을 따돌리는 것에 대해 욕지거리를 하고 있다”고 서방 외교가들은 말한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정책이 변화하길 바란다 할지라도 대통령이 바뀌길 바라진 않는다”.
어떻든 간에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은 많은 관찰자들이 효과적인 방어물이라 생각하는 만만치 않은 기제를 적절한 곳에 배치해 두었다. 라도미르 디클리치에 따르면 “밀로셰비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탐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주요한 협력자들이 거리낌없이 부를 얻고 그들 스스로 타협하도록 하고 있다”. 세르비아에서 정계와 재계 사이의 경계선은 모호지는 경향이 있다. 일 예로 세르비아 총리 미르코 마르야노비치(SPS)는 에너지 회사 프로그레스(Progres)의 전무 이사이다. 부총리 드라간 토미치는 농가공식품과 가구 제조업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회사인 심프(Simp)를 경영하고 있다. 그와 이름이 같은 국회 의장 드라간 토미치는 유고페트롤의 대표이다. 무임소(無任所) 장관 보골류프 카리치는 그의 형제와 함께 은행, 텔레비젼 채널(BK), 토목회사, 심지어 대학까지 가지고 있는 재계의 왕국을 거느리고 있다. 그리고 유고의 주요 기업가 대부분은 밀로셰비치의 처가 당수로 있는 JUL의 당원이다. “대통령은 그들이 최근 몇 년간 끌어올린 착복물들에 대한 세세한 파일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떠돌고 있다”고 사회학자 두산 야니치는 말한다.
티토 시대의 유산과 경제 봉쇄의 결과로 만연하고 있는 부정부패는 세르비아 사회 전체 사회로 스며들고 있으며 대통령 주변의 엘리트들 중 극소수만이 이익을 누리고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제도권과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없애고 있다. 서방 관찰자들에 따르면 야당조차도 이런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있다. 1997년 진치치의 DS와 드라스코비치의 SPO에 의해 왜곡된 지방자치제로, 새로운 지방의회 의원들은 적절한 승인 절차도 밟지 않고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집을 짓도록 강요하고 있다. 일정한 돈의 대가로 그 당에 들어가면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두 눈감아 버린다.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또는 생존 본능 으로 인해 국민들은 점점 더 국가를 외면하고 있다”고 은퇴한 프랑스어 교사인 슬로보단 비타노비치는 말했다.
대학 소요
정치에 대한 혐오증은 특히 학생들 사이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학기가 시작된 이래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권리를 방어하기 위해 모였다. 지난 봄 정부는 1996-97년간 벌어진 일련의 시위들을 무력화하기 위해 새로운 법을 의회에서 통과시켰으나 이 법은 또다시 위기를 촉발시켰다. 대학법안에 따라 정부는 친정부적 정당 의원들로만 구성된 운영위원회가 추천하는 대학 총장과 학장을 직접 지명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강사는 새로운 고용법안을 서명함으로서 정권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도록 요구받는다. 대부분은 일자리(그리고 160 달러뿐이 안되는 얄팍한 월급)를 잃을까 두려워하며 서명을 했지만 이를 거부한 약 100여명은 해임되었다.
1998년 학기 초, 정부 법령과 극우정당 SRS에 의해 지명된 신임 학장 라드밀로 마로예비치는 어문학부를 맡았다. “나는 우리의 국가와 우리의 문화가 내부로부터 점령당하고 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 생각한다”라고 독립 라디오 방송인 B92에서 말했고 일부 학생들이 ‘적’의 끄나풀로 활동했다고 비난했다. 밀로셰비치는 그후 즉시 그의 학부에 있는 크로아티아 문학 과목을 금지시켰다. 서구의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러시아, 폴란드 학문이 프랑스와 영어에 비해 우선시되었다. 마침내 고용 계약을 거부한 이탈리아어 강사 중 절반이 그 자리에서 해고되었다.
1998년 11월 학생위원회는 세가지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부분 총파업을 벌였다. 그 세가지 요구란 밀로셰비치의 사임, 대학에 대한 이전 규정으로의 복원, 그리고 해고된 강사 복직이었다. 2월 몇 주 동안 지속된 권력 투쟁 이후 마로예비치는 갑자기 모스크바로 전근 발령을 받았다. 몇 주 후 정부는 그의 후임자가 JUL 출신의 강사가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전투에 진력이 난 수많은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갔다.
대학 외부에 있는 정권에 대항하는 계속적인 투쟁들이 발생했었던가? 이 운동의 지도부 중 한 명이었던 티아나 요바노비치는 “학생들은 어떤 정당도 맘에 들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며 우리 자신의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어문학부에 새롭게 생긴 독립적인 강사노조의 위원장 나다 페트로비치에게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있을 뿐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준비가 안되어 있다. 당신이 열악한 상태로 있으면 있을수록 용기를 얻기란 더욱 힘들어진다”.
코소보는 담배연기 가득한 인문대학의 복도나 혁명대로의 거리로부터 수백만 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듯 보인다. 티아나 요바노비치는 학생들이 협상에 의한 해결을 원한다는 것만을 인정할 것이다. 정치에 대한 혐오, 갈가리 찢긴 그들의 요구, 그리고 생존을 위한 나날의 싸움으로 인해, 밀로셰비치가 -최소한 당분간이라도- 모든 형태의 도전을 용케 혁파했다는 것은 전혀 놀란 만한 일이 아니다. 콘스탄틴 오브라도비치가 지적한 대로, 밀로셰비치는 5세기에 걸친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반세기 가까운 티토주의 시대, 10년간의 민족 공산주의가 세르비아 국민들에게 주입한 권위에 대한 존경을 향유하고 있다.
(시민동맹의) 페시치 여사와 유사하게, 밀로셰비치 역시 민주반대파의 잔존물인 전쟁의 가치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자신의 성공 기회를 빈틈없이 보면서 그는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 “의회정부가 유고슬라비아에 새로운 사상이었던 1930년대에 한 야당 지도자는 자기 당의 지방선거 성적이 신통치 않다고 불평했다. 갑자기 그는 카페에서 마음이 맞는 친구를 발견했다. ‘야, 너 분명 우리 당에 투표했지?’ ‘아니’, 그 친구의 대답이었다. ‘왜 우릴 찍지 않았니?’ ‘네가 권력을 잡으면 그 때 찍어줄게’, 그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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