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균열을 드러낸 선거
아담 하니에, 주간녹색좌파 5/26
라말라 – 5월17일 이스라엘에서 진행된 선거는 현재 재직 중인 벤야민 네타냐후와 리쿠드당에 대한 에후드 바락과 노동당의 승리로 끝났다. 총리 선거에서 바락은 56%, 네타냐후는 44%를 얻었다. 크네세트 의회 선거에서 노동당은 27석을, 리쿠드는 19석을 얻었다. 총 121석 중 나머지 의석은 13개의 다른 정당에게 돌아갔다.
선거 결과는 전세계와 중동의 환호를 얻었다.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은 바락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평화 협정을 완성하기 위한 길이 열렸다”고 말했다.
요르단의 압둘라 국왕도 이에 동조하면서 “우리는 매우 낙관적이다. 우리는 많은 현안들에 관해 자리를 함께 할 것이며 평화를 진전시키는 데에 있어서도 매우 낙관적이다”라고 말했다.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락의 전직 최고 보좌관인 타세엔 바쉬르는 “바락은 새로운 평화의 기운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이스라엘은 아랍 세계와 더욱 친밀해질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현실은 낙관론과는 거리가 멀다. 선거를 통해 이스라엘 정치를 지배하게 된 세 가지 요소들-(1967년 이스라엘이 점령한) 서안과 가자 지구, 이스라엘 사회 내 종교와 세속의 분리, 이스라엘 내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의 역할-이 분명해졌다.
오슬로 협정
선거는 오슬로 협정 기한 종료일인 5월4일을 2주 정도 경과하여 열렸다. 1993년 협정은 예루살렘의 지위와 이스라엘의 서안과 가자 지구 정착을 결정하는 것 그리고 1948년 추방된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복귀를 의미했다. 오슬로 협정은 본질적으로 팔레스타
인과 이스라엘 간 최종 국경 협상에 대한 합의였다.
오슬로 협정은 재빨리 “협정 내용을 현실화”하기 시작한 이스라엘 노동당 정부 통치하에 승인되었다. 노동당은 방대한 토지 몰수와 정착지 건설 계획을 시작했고 이스라엘 내부 도시와 서안 내 이스라엘인들의 정착지를 연결하는 도로망을 건설했다. 이것은 리쿠드에 의해 계속되었다.
선거 운동 내용은 오슬로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을 지켰다. 그 이유는 두 주요 정당의 거의 동일한 입장 때문이었다. 양측은 이스라엘인 정착지 다수와 예루살렘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는 한편, 서안의 40%를 준팔레스타인 지배에 넘긴다는 사실을 믿고 있
다.
바락은 당선 연설에서 네 가지-1967년 국경으로 후퇴하지 않을 것,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임, 정착지는 이스라엘 주권 아래 남을 것임, 요르단강 서부에 외국 군대 주둔은 없을 것임-를 강조하며 선거 운동 메시지를 되새겼다.
이러한 입장은 리쿠드와 별다른 차별점이 없다. 노동당은 팔레스타인 독립체를 형성하고 있는 지역들을 모으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이 “주(州)”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할 것이다.
선거 다음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군대의 충돌 현장이었던 예루살렘 동쪽에 두 개의 정착지를 건설하기 시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틀 후 이스라엘 군대는 헤브론에 있는 세 개의 저수지를 헐어버렸다. 같은 날, 세 명의 팔레스타인 기자들이 서안 북쪽 마을에서 군대가 팔레스타인인의 올리브 나무를 파헤치는 것을 촬영하다가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 심한 폭행을 당했다.
팔레스타인, 당국, 아랍 국가들 그리고 미 제국주의의 소극적 지지자를 연상시키는 평화의 당으로서의 노동당의 외관은 리쿠드로서는 그렇게 조용히 수행하기 힘든 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핑계를 제공한다.
종교와 세속
종교와 세속간의 분쟁이 전체 선거 운동을 지배했다. 극단적인 정통주의 정당인 샤스당은 지도자인 아리에 데리가 뇌물 수수와 부패에 대해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1996년 10석에서 더 늘어난) 17석을 차지했다. 에후드 바락이 “결속과 분열의 종식”이라
는 자신의 선거 운동 메시지를 반복할 때 수천의 노동당 지지자들은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샤스당과는 함께 할 수 없다.” 샤스당는 유럽 국가 출신의 유대인(아슈케나지)에 반대하고 에티오피아와 아랍 국가 출신 유대인들(미즈라치)을 대변한다. 아슈케나지들은 건국 초기부터 이스라엘 사회를 지배해 왔으며 그들의 전통적인 당은 노동당이었다.
몇몇 소수 정당은 샤스당과 사회에 대한 종교적 통제를 반대하는 강령에 기초하여 의석을 얻었다. TV 토크쇼 진행자 토미 리피드가 이끄는 새로운 정당 시누이는 샤스에 격렬히 반대하여 6석을 얻었다. 세속의 대표이자 아슈케나지이며 시오니즘 좌파인 메레츠는 10석을 얻었다. 새로 들어온 러시아 이민자들을 대표하는 신당, 이스라엘 발리야는 6석을 얻었다. 이스라엘 발리야는 샤스당의 내무부 장악에 선거 운동의 초점을 두었다.
샤스 지지율 상승은 리쿠드의 손실에 힘입은 바가 크다. 1996년 네타냐후는 노동당 정부의 경제 계획 아래 고통받았던 가난한 미즈라치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3년 후 리쿠드의 민영화와 경제 감축 계획도 노동당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종교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은 시오니즘 내부의 근본적인 모순을 반영한다. 시오니즘은 유태인들이 민족적인 집단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전세계에서 유태인들이 보이는 일반적인 모습은 종교적 전통에 기초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존재함에 있어 종교가 차지하는 중심성으로 말미암아 종교를 믿는 유대인과 정통파의 분파는 상당한 권력을 쥐게 되었다. 최종 분석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토대와 1948년 70만 팔레스타인 인들을 추방한 것은 유태인은 “하느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종교적인 주장이 그 바탕이 되었다. 그러한 모순은 바락이 선거 직후에 취한 행동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자칭 무신론자인 그는 먼저 예루살렘 서벽에 참배했다. 이스라엘 일간지 예디옷 아라놋에 따르면 바락은 “나는 서안과 가자 지구를 포함하는 성서 속의 이스라엘 땅에 대해 강한 유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고 한다.
시오니즘은 1948년 그곳에 정착한 다른 민족 집단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 집단을 형성하려고 시도했었다. 이러한 민족 정체성은 유태교의 신화적인 형태, 헤브루 언어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상징과 물리적 공간의 전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촌락은 파괴되는 동시에 새로 건설되고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야파는 자파가 되었다. 아스켈란은 아슈켈론, 미산은 벳 셰한이 되었다. 이것의 목적은 팔레스타인의 존재를 뿌리째 없애고 민족성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이스라엘 내 정통 유태인들은 자신이 유태교의 순수한 대표자라고 주장하며 그들의 생활 방식을 이스라엘 사회의 다른 분야에도 강제하려고 한다.이것은 유대교의 다른 분파간에 갈등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비종교인들에게 곤란한 문제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유대교들도 있으며 비종교적이기도 하다-둘을 동시에 충족할 수는 없다. (대부분이 비종교적인) 이스라엘 민족성을 창조함에 있어 시오니즘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은 바로 시오니즘이 종교와 분리될 수 없는 관련이 있다는 점과 갈등관계에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계급적 차원도 지닌다. 정통파는 이스라엘 사회 다른 세력들에 비해 훨씬높은 출생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사회-경제적으로 낮은 지위를 차지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빈곤하고 과밀집 상황에서 생활하는 경향이 있으며 철저히 생존에만 매
달려 있다.
비종교적인 이스라엘 인들은 기업 엘리트와 텔 아비브와 같이 부유한 중산층 지역을 지배하고 있다. 그들은 피부색이 압도적으로 희고 남성이며 유럽 또는 미국을 출신 배경으로 한다. 샤스당은 본질적으로 계층 문제에 종교적인 해결을 제시한다. 샤스당
은 미즈라치 유대인들에게 “당신의 문제는 반종교적인 아슈케나지 엘리트들이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우리가 정통 유대교를 신봉할수록 우리가 처한 상황은 개선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의 투표
선거를 통해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인들 간의 뿌리깊은 분열이 증명되었다. 최초로 팔레스타인 후보인 아즈미 비샤라가 총리에 입후보했다.비샤라는 철학 교수이며 앗-타자모 정당의 수뇌이다. 앗-타자모는 1996년 “유명 인사와 점령지 좌파와 긴밀한 제휴 관계에 있는 팔레스타인 인들의 무장 운동인 이브나 알 발라드의 51인 그룹”에서 결성되었다. 1996년 선거에서 앗-타자모는 하다쉬(이스라엘 공산당)과 함께 뛰었으며 5석을 획득했다.
그 이후 앗-타자모는 하다쉬와 멀어졌다. 카리스마적이고 언변에 능한 비샤라는 비록 그가 의도한 바와 모순적인 메시지를 전하기는 했어도 “두(二)민족 국가”를 옹호했다. 이 기간 동안 좌익적 견지에서 비샤라에 반대했던 이브나 알 발라드 소집단들이 그랬던 것처럼, 51인 그룹도 앗-타자모를 떠났다.
다른 주요 팔레스타인 정당인 아랍후보연합(UAL)은 이슬람주의 운동을 대표한다. 1996년 UAL은 4석을 획득했다. 1999년 51인 그룹은 하다쉬의 분파들이 그랬던 것처럼 UAL과 손을 잡았다. 아랍민주당으로 뛰면서 이 연립 정당은 5석을 획득했다.
비샤라의 출마는 거대한 분열을 야기했다. 하다쉬와 아랍민주당은 “무슨 일이 있어도 네타냐후를 패배시킬 것”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유권자들에게 바락을 지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은 비샤라의 관여가 시오니즘에게 지지를 보내게 된다는 이유로 비샤라에 반대했다.
비샤라의 모순적인 지위는 PLO 의장 아라파트의 보수적인 조언자이자 오슬로 협정의 강력한 지지자인 아메드 티비와의 공조에서도 드러난다.그러나 앗-타자모는 아즈미 비샤라의 리더쉽보다 더 광범위하다. 그 운동은 이스라엘 정치를 다루는데 어떠한 환상도 품고 있지 않은 젊고 급진적인 좌파를 포함하고 있다.
선거 전날 비샤라는 사퇴했다. 그가 바락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것은 거절했어도 사람들은 비샤라가 주로 팔레스타인 죄수들, 팔레스타인 부락에 기금을 대는 수준 그리고 다른 현안과 관련하여 노동당과 어떤 거래를 약속한 것으로 믿고 있다.
앗-타자모는 의회에서 2석을 얻었는데 이는 활동가들이 벌인 운동의 승리로 보여진다. 팔레스타인의 중요 도시인 아카에서 앗-타자모는 1998년 지방자치선거때보다 300% 증가된 득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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