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대규모 시위 뒤에 숨겨진 사회적 모순

세계사회주의웹사이트 7/16 우테 라이스너

이란에서 벌어진 일주일 간의 학생시위는 내전적 상황으로 받아들여졌다. 화요일부터 내무부 장관의 사퇴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수많은 도시에서 재개되면서, 지배층에서는 친정부 지지세력들의 관제시위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수만 명이 참가한 관제시위에서, 국가안전위원회 부의장인 하산 라니위니는 시위를 조직한 자들에게 최고 사형에 이르는 제재를 가할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경고했다.

15일, 비밀경찰과 비정규군의 지원을 받은 경찰은 시위에 참가한 수천 명의 시위대를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몇일간 계속된 이번 시위에는 학생들 뿐만 아니라 여러 층의 민중들이 참가하여 연대를 표시하였다. 목격자와 참가자에 따르면 보안군을 피해 달아나는 시위대들은 주변 가옥들에서 숨을 곳과 도움을 제공받았다고 한다.

이번에 촉발된 시위는 이란사회가 앓고 있는 심각한 사회적 모순들에서 비롯되었다. 학생들의 행동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표현하고 정치적 상황의 개선을 약속함으로써 이번 시위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해 보려던 지배층의 속셈은 붕괴되고 말았다.

이번 시위는 뚜렷한 정치적 방향을 갖고 있지 못했다. 평온을 되찾을 것을 요구하는 하타미 대통령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표명하며 ‘타협’을 선호했던 학생들과 후퇴할 것을 준비하지 않았던 ‘급진파’ 사이에는 빠르게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믿을 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급진적 학생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투옥된 학생들 전원 석방, 시위대를 잔인하게 진압했던 모든 책임자의 처벌과 같이 정당하지만 단기적인 주장들에 국한시키고 있다. 단지 몇몇 진영에서만 종교지도자들과 하타미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몇 년간 이란 내부에서는 지배권력 간의 왕성한 투쟁이 진행되어 왔으며 주로 이란 최고 지도자인 아야톨라 하메네이를 정점으로 하는 승려들과 미국 및 유럽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하타미 대통령의 ‘개혁파’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하타미는 1997년 5월 선거에서의 눈부신 승리를 바탕으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그는 여러 야당의 활동과 신문의 발행을 허가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배들을 고용하여 반대파들에 대한 탄압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지난 며칠간 다양한 층의 민중들이 참가했던 이번 시위는 하타미의 “민주적 추진”이라는 것의 본질과 한계를 명백히 보여주었다.

시위의 초기 단계에서 학생들은 자신들이 민주주의와 자유의 수호신으로 존경하던 하타미의 확대사진을 들고 행진하였다. 그러나 하타미 자신은 학생들과 함께 하지 않았으며 바리케이드 반대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화요일 저녁 방영된 텔레비젼 뉴스에서 하타미는 학생들이 정부를 음해하려고 하는 골치 덩어리라고 표현했다. 하타미에 따르면, 시위의 배후에는 이란의 안전을 위협하는 폭력 세력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일정 기간 정부의 다양한 분파들은 거리에서 민중들을 쓸어내고자 할 것이다. 7월 14일 독일 「도이치차이퉁」논평에서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이란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학생시위를 촉매로 하여 시위가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부족하다.

현재 수백 만의 이란인들은 실업과 저임금에 놓여있다. 그들은 이란 체제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더 나은 삶을 바라고 있다. 수백만의 이란인들은 두세 개의 직업을 가지고 하루 16시간 이상 노동하며 겨우 가족의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대학졸업자들은 직업을 갖고 있지 못하며 젊은이들에게는 서구 대중문화와 마약, 성기구라는 위험한 장난감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모든 상황들이 융합된다면, 그때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이란 정권은 지금까지는 부분적으로만 존재해 왔던 정치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정치구조의 발전을 더 이상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7월 12일자 「디 벨트」에서는 사회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출산 통제에도 불구하고 2025년에는 6천 8백만의 이란 인구가 지금의 두배에 이를 것이다. 현재 이란 인구의 60%는 20세 이하이며 실업율은 공식적으로 14%이고 80만의 젊은이들이 매년 구직전선으로 뛰어들고 있다. 구매율은 혁명 당시의 1/3에 불과하며 빈곤은 계속해서 확대되고 있다.”

하타미는 이란을 미국과 유럽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개방하는 “점진적 민주화”라는 전략으로 경제적 위기에 대응해 왔다.

1979년부터 독일 함부르크의 이슬람 문화센터의 의장이었던 하타미는 영어와 독일어에 유창하다. 2년전 대통령선거에 당선된 이후 그는 줄곧 미국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혁명 이후 최초로 미국 뉴스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하타미는 지난 해 비밀경찰에 의해 자행된 야당 활동가와 신문기자에 대한 잔인한 살해사건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며 많은 인기를 얻었고 2년 전에는 지방선거에 앞서 비밀경찰의 활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장관을 해임하기도 했다. 이는 지난 선거에서 그의 지지자들이 보여주었던 70%라는 높은 득표율의 주요 원인이었다.

그러나 하타미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지배블럭 내부의 분파싸움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책략이었음을 밝혀준 것은 최근의 사건들만이 아니다.

미의회외무위원회에 제출하기 위해서 제작된 “이란 브리프” 라는 보고서 (http://www.iran.org/tib/)에 따르면, 살해사건과 관련한 일련의 조사들이 아야톨라 하메네이의

주변에 집중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타미는 살해사건의 은폐를 대가로 하메네이가 자신을 ‘강경파’로부터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란 브리프”에 따르면, 하타미는 또한 자신의 최측근인 후세인 무사비가 지휘하는 ‘최고경제위원회’가 다양한 세력들을 포괄하여 경제정책의 방향을 주도해야 한다고 요구했는데 이로 인해 의회는 경제정책에 간섭할 모든 권한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재무부 역시 하메네이의 노선과 테헤란 상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란 경제를 조직하고 있는 본자드 모스타파잔 재단에 대한 통제권을 양도해야 했다.

이러한 분파들 간의 계속되는 분쟁은 “민주적 개혁세력”과 “광신적인 회교주의자”들의 세력다툼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 하타미와 하메네이는 민주주의나 종교 따위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이들 간의 분쟁은 소련의 붕괴와 심각한 경제 사회적 위기라는 전환된 지정학적 상황 아래에서 나타나는 이란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방향성을 드러낸다.

하타미가 주장하는 “이란의 개방”은 중동지역의 안정을 위해서 이란과의 제한적인 협력을 추구할 것을 주장하는 미국정부의 변화된 입장과 일치한다.

이러한 정책은 민주적 권리와는 양립할 수 없다. 민중들의 정치 사회적 열망은 억압받는 민중들이 단결하는 사회주의적 프로그램으로 성취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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