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처한 메히꼬 학생들의 영웅적 투쟁

「주간녹색좌파」11/3 필 허스

메히꼬시티 – 지난 10월 2일, 적색과 흑색의 깃발과 체 게바라의 초상화를 내건 버스들이 학생들을 태우고 1968년 삼문화광장의 학생학살을 기념하는 시위를 향해 내달렸다. 1968년 운동의 노익장들이 앞장선 이번 시위에서 6만여 명의 학생과 지지자들은 세계 최장의 도심로인 반란개혁로 위쪽의 대학캠퍼스에서 광장의 횃불의식에 이르기까지 15킬로미터를 행진하였다. 5주 전인 8월 28일에는 3만여 학생들이 전력노동자들의 민영화 반대 투쟁을 지지하며 행진을 벌인 바 있다.

(그 사이에 벌어진 여러 차례의 소규모 시위를 비롯한) 이러한 결집을 볼 때 수업료 인상에 맞선 메히꼬 국립자치대학(UNAM; 이하 우남대학) 학생들의 6개월 간의 동맹휴업이 좋은 결실을 거두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역도 가능하다. 1990년대 전세계 학생투쟁 중 가장 주요한 것이었던 이 동맹휴업은 현재 커다란 난관에 봉착해있으며 패배를 각오하고 있다.

올해 초 프란시스꼬 바르네스 데 가스트로 총장은 모든 학생들에게 60 내지 80달러의 수업료를 부과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는 공립대학에 대한 정부보조금을 삭감하라는 IMF의 오랜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25만 명의 학생과 야심적인 연구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는 우남대학은 메히꼬 공공교육이라는 왕관의 보석과 같은 존재이다. 대학의 연간 운영비는 1억 달러에 달하지만 극빈층 출신도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학생들이 내는 수업료는 1페소짜리 동전 하나에 불과하다. 새롭게 인상된 수업료는 분명 빈민 가정 출신 학생들을 대학으로부터 배제시킬 것이다.

아울러, 우남대학 학생들과 사빠띠스따 지도자인 마르꼬스 부사령관은 처음부터 수업료 인상이 라틴아메리카 최대의 교육기관을 민영화하기 위한 준비라고 주장한 바 있다.

2월 26일 수업료 인상에 반대하는 최초의 시위가 만 5천 명이 참가한 가운데 벌어졌을 때, 이 투쟁의 규모가 이토록 커질 것이라고 예상한 이는 드물었다. 그러나 “사빠따는 우리가 공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싸웠다”(이는 그들이 무상교육을 1910∼20년 메히꼬혁명의 근본적 성과라고 보았음을 의미한다)고 학생들이 연호했을 때 그들이 얼마나 깊이 공감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3월과 4월 초에 8만 명의 학생들이 매주 시위를 벌였고 상징적인 장소인 철학부의 체 게바라 강당에서는 학생조정위원회 회의가 끊임없이 열렸다. 학생들은 수업료 인상이 철회되지 않을 경우 4월 19일을 동맹휴업 개시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동맹휴업이 시작되는 첫 날 대부분의 학부가 놀라운 성과를 낳았으며 (끝없는 집회만이 아니라) 식사준비에서부터 선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에 관해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한편 메히꼬 학생들에게는 굉장히 새로운 일이 벌어졌는데 바로 여성이 중심적 역할을 맡게 된 것이었다. 대부분의 학부에서 학생 지도부의 다수가 여학생이었다.

단결된 투쟁

동맹휴업평의회라고 새로이 명명된 학생 지도부는 순풍에 돛단 듯 활동을 전개하였다. 민중조직과 전투적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비롯한 대중적 지지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대학의 교원외 직원노조인 STUNAM도 학생들을 지지하는 목소리에 동참했다. 사빠띠스따의 지도자인 마르꼬스 부사령관은 바르네스 총장을 논박하고 학생들을 지지하는 내용을 담은 성명서를 거의 매일 발표하였다.

동맹휴업 4일째에는 10만여 명의 학생들이 메히꼬시티의 역사적 중심부에 있는 메히꼬 최대의 집회장소인 소깔로광장에서 집회를 열기도 하였다.

4월 말의 어느 날 원주민 권리에 관한 전국 국민투표를 선전하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수십 명의 복면한 사빠띠스따들이 메히꼬시티에 도착했다. 우남대학 학생들은 이들을 열광적으로 환영하였다. 학생과 전력노동자, 그리고 치아빠스로부터 온 상징적 대표단이 함께한 대규모 메이데이 행진은 신자유주의에 맞선 단결된 투쟁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제도혁명당(PRI) 정부는 이제 자신이 수세적 위치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5월에는 바르네스 총장에게 양보조처를 취하라고 명령하였다. 우선, 바르네스는 대학운영위원회에 수업료 인상 수준을 30% 인하하라고 권유하였다. 내년 학기에 수업료가 다시 상향조정될 가능성이 있고 학생들은 어쨌든 무상교육이라는 원칙을 지켜내고자 했기 때문에 이 조치는 투쟁을 종식시키도록 학생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둘째, 바르네스는 동맹휴업에 대해 가장 결정적인 조치를 취했다. 5월 말 대학운영위원회는 수업료 납부가 선택사항이 될 것이며 동맹휴업이 끝나더라도 결코 제재조치나 학생들의 희생이 없을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는 동맹휴업평의회에 심각한 전술적 문제를 야기했다. 가능한 하나의 안은 이 조치를 받아들이고 ‘수업료 안 내기’ 캠페인을 대규모로 벌이는 것이었다. 메히꼬와 같이 가난한 나라에서 이는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었다.

동맹휴업평의회는 다른 대안으로 자신이 공세적 입장에 있었으므로 ‘모든 수업료 철폐’라는 원칙에 기반하여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것으로 정당한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평의회는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평의회는 학교측의 제안을 거부하고 동맹휴업 종식의 조건으로 학생과 노동자, 교직원 간에 대학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상설적인 ‘공간’의 창출을 비롯한 여섯 가지 새로운 요구를 제시하였다. 이 요구는 대학 행정의 재구조화에까지 이르는 것이었다.

평의회는 결국 파업의 장기화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이와 같은 목표점의 변화는 덜 급진적인 학생 대다수를 동요시켰다. 이 선택으로 인해 평의회는 자신과 자신이 이끌고 있다고 가정된 학생 대중 사이에 괴리를 만드는 위험을 무릅쓰게 되었다.

바르네스의 제안을 거부한 후 친정부적인 뗄레비사와 아스떼까 방송을 비롯한 언론의 공세는 폭도를 린치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언론들은 동맹휴업 후 처음으로 학생 지도자들을 비타협적이고 불합리한 이들로 묘사할 수 있었다.

전술

동맹휴업 연장이라는 전술은 불행한 결과를 낳기 시작했다. 지난 6월 대학생들은 대학입학 시험장에 난입하여 이를 중단시켰고 결국 고등학생 및 그들의 학부모들과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했다. 이는 이중적인 불운이었다. 고등학교들이 우남대학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고등학생들이 동맹휴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의 대학 입학을 가로막은 동맹휴업 대학생들의 논리는 많은 고교생들을 지지대열에서 이탈시켰다.

7월과 8월에는 신규 학기 등록을 저지하려던 시도가 학생들 간의 험악한 충돌을 겪은 후 실패하였다. 등록한 학생들의 경우 대부분 수업료를 납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7월 28일, 학생들은 동맹휴업 100일째를 자축하였고 다시 한번 수만 명의 학생들이 러시아워에 개혁로를 통해 소깔로광장으로 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학부 총회와 동맹휴업평의회에서는 동맹휴업을 둘러싸고 이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전투적인 좌파조직들 사이의 분열이 커지는 결과를 낳았다.

시위가 벌어진 그 날 여덟 명의 퇴직 명예교수가 자신들의 평화안을 들고 찾아왔다. 이의 내용은 수업료 인상을 철회할 것과 향후 대학 운영을 논의하기 위한 대학 전체(교수, 학생, 노동자) 총회를 개최할 것 등이었다.

200명으로 구성된 대학운영위원회에서 절대다수가 이 안을 지지하였고 바르네스는 수세적 입장에 처했다. 여덟 명의 교수는 동맹휴업평의회에 초대받았지만 학생들의 요구를 모두 지지하지 않았다는 비난만을 들었다.

평의회는 명예교수들의 안을 거부함으로써 바르네스를 궁지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결국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또다른 기회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극좌주의

동맹휴업 초기부터 언론들은 주요 학생 지도자들이 “극단론자”들이라고 떠들어댔고, 불행하게도 자유주의 좌파 성향의 일간지인 「라 호르나다(La Jornada)」와 비슷한 경향의 주간지 「프로세소(Proceso)」 또한 이러한 반동적 공세에 일조하였다. 휴업에 참여한 학생들은 자신들을 도매금으로 불신받게 만들기 위한 이러한 주장을 비난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동맹휴업 지도부에는 극좌주의가 작동하고 있었다.

동맹휴업평의회의 정치적 지도력은 과학부와 철학부에 근거를 둔 ‘맑스레닌주의파’라는 비공식적인 동맹체가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에밀리아노 사빠따 혁명연합(UREZ)과 프란시스꼬 비야 민중전선(FPFV), 독립프롤레타리아운동(MPI) 등과 같은 극좌적 경향을 지지하고 동조하는 학생들이었다.

8월 초에는 극좌 그룹들의 또다른 동맹이 협상을 통한 동맹휴업 종식과 다른 수단을 통한 투쟁의 지속을 요구하는 리플렛을 뿌리기 시작하였다. 이 동맹은 혁명적 노동자 연합(URT)과 사회주의통일동맹(LUS), 혁명적 노동자당(PRT) 등의 트로츠키주의 및 ‘맑스레닌주의’ 그룹들이 형성한 것이었다.

후자의 동맹은 극좌파 전반의 분열을 표상하는 것이긴 했지만 대학 내에는 거의 성원이 없었다. 그러나 유명한 동맹휴업 지도자를 비롯한 40여 명의 성원을 지닌 트로츠키주의 조직인 사회주의 청년연맹(TJS)이 곧 여기에 결합하였다.

또한 8월과 9월에는 친쿠바적인 맑스레닌주의 그룹인 사회주의투쟁기류(CLS)가 마침내 극좌파와 단절하였다. 이들 그룹은 민주혁명당의 급진파와 함께 평의회의 ‘민주적 분파’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구도가 8, 9월에 평의회 내부에서 벌어진 몇몇 대규모 싸움의 배경이 되었다. 그 중 일부는 (불행하게도) 텔레비전에 방송되기까지 하였다. 동맹휴업을 무한히 지속하기를 원했던 주류 그룹들은 반대파에 대해 주먹질과 야유를 퍼붓고 회의를 질질 끄는 등의 수단에 호소하였다.

평의회 지도부의 행태에 대한 가장 체계적인 비판은 사회주의 청년연맹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이는 아마 이들이 다른 어떤 반대자들보다도 오래 극좌파에 충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주의 청년연맹은 극좌파의 방식이 스탈린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민주적 운영이라는 노동자 운동, 사회주의 운동의 기본적 규범을 깨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또한 극좌파들이 동맹휴업의 ‘전위’ 활동가와 (수동적이고 대학교육의 재개를 갈망하는) 학생 대중 사이의 균열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청년연맹 등의 반대파들은 불편할 수도 있는 진실을 인정해야 한다. 민주적 방식이건 아니건간에 평의회의 극좌파 지도부는 수천 명 학생들의 지지를 얻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는 메히꼬의 계급투쟁이 갖는 격렬성과 인구의 90% 이상인 빈곤층과 극소수의 호화 부유층 사이의 갭,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낳은 빈자와 억압받는 자들 사이에 퍼져있는 계급적 적대감의 심화에 의해서만 설명가능하다. 메히꼬에서는 ‘계급 대 계급’이라는 극좌주의가 중요한 사회적 기반을 갖고 있다.

억압

대학운영위원회의 공식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바르네스는 전면적인 승리를 원하고 있다. 이를 위해 그와 제도혁명당 정부는 운영위원회가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는 해결책으로 귀결될 수도 있는 협상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

학생들에 대한 일련의 억압적 행태들은 긴장을 고조시키고 협상을 가로막고 있다. 지난 달에는 동맹휴업 지도자인 리까르도 마르띠네스와 알레한드로 에체바리아가 이틀 동안 납치되어 구타당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그들의 생환을 요구하는 대규모 학생 시위가 벌어진 후 결국 풀려났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납치를 자행한 이들이 국가 기관원이라고 믿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학생들에 대한 ‘더러운 전쟁’의 시작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극좌파 지도자들은 쓸데없이 도발을 벌이고 있다. 10월 13일에 이들은 메히꼬시티의 주요 순환도로를 점거한 채 폭동진압 경찰과 불필요한 충돌을 야기했으며 이 사건으로 일부 학생들이 심하게 구타당하였다.

그로부터 5일 후에는 (학생이 한 명도 없는) 연구소들이 점거되었다. 대부분의 연구원들은 학생들에 공감하고 있었고 점거된 연구소 중에는 지진과 화산 폭발을 탐지하는 국립연구센터도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는 10월 18일 동맹휴업평의회 ‘민주적 분파’의 회의 개최를 낳았고 이 자리에서 극좌파의 시대에 뒤떨어진 활동에 대한 공개적인 비난이 이루어졌다. 평의회는 이제 두 개의 조직으로 분열될 현실적인 위험에 처해있다.

한편 학생들의 동맹휴업 참여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정부나 대학당국의 지원을 받는 반동적 학생들이 점거 건물 일부를 탈환하는 게 훨씬 쉽게 만들고 있다.

지난 10월 4일, 주캠퍼스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외딴 학교 하나가 반동적 학생과 대학 안전직원들에 의해 몇 시간 동안 탈취되었다. 이들은 주캠퍼스에서 소집된 평의회 지지자들에 의해 축출되었다. 이 시도는 일종의 경고이자 현재의 추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정부는 계속해서 무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해왔으며 1968년 대학살의 기억으로 인해 섣부른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어떠한 정부도 이러한 일을 반복하고는 그 대가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폭력 사태가 계속 증가하고 학생, 학부모, 대학 노동자 및 교수 대다수가 분노하게 되면 군대의 개입이 배제되지 않을 것이다. 에르네스또 세디요 대통령은 10월 25일에 홍수 피해 지역을 시찰하면서 필요할 경우 군대를 동원 학교 건물을 복원하고 ‘깨끗이 만들겠다’고 말하였다. 물론 그는 홍수 피해를 입은 학교들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였지만 모든 신문들은 그의 말을 군대가 우남대학에 진입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암시로 받아들였다.

동맹휴업평의회는 여전히 승리를 이끌 수 있지만 이는 평의회가 자신의 극좌적 비타협성을 포기하고 바르네스와 정부측에 협상을 거부할 명분을 주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학생들의 패배는 비단 민영화에 맞서 싸우는 전력노동자나 치아빠스의 사빠띠스따들(이들은 줄곧 학생들을 지지해왔다)에게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모든이들에 커다란 타격이 될 것이다.

메히꼬의 전투적 사회주의 세력들에게 이번 사태는 경종을 울려야 한다.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들은 상당한 실체를 갖고 있지만 수많은 경쟁 그룹들로 분열되어 있다. 또한 이들 중 다수는 극좌주의와 반(半)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 맑스주의 세력들의 이데올로기적, 조직적 혁신만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적 길로 향하는 대중투쟁을 효과적으로 이끌 정치적 지도부를 창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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