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냉전의 비밀: 세균전의 최초 희생자들

「르몽드 디쁠로마띠끄」 99/7 스티븐 엔디코트·에드워드 헤이거만

미국과 영국은 사담 후세인이 생화학 무기 프로그램을 은폐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라크에 계속해서 폭격을 가하고 있다. 워싱턴 대외정책의 공표된 목적 중 하나는 대량살상 무기의 확산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기밀해제된 문서들은 미국이 세균전을 군사정책에 편입시킨 최초의 국가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한국전쟁 동안 세균무기가 사용되었음을, 적어도 실험되었음을 보여주는 징후들이 존재한다.

“저는 세균전 주장을 검토해보고자 1952년 중국으로 갔습니다… 그 결과는 중국 관료들이 자신들이 결정적 증거를 확보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돌아온 거였지요. 오스트레일리아 외무부의 상임수석 후임자인 앨런 와트는 제가 귀국하자마자 제 공개성명에 근거하여 워싱턴에 회신을 요망하는 서한을 보냈고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세균무기를 사용했지만 단지 실험 목적으로만 이용했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1997년 4월 12일 스티븐 엔디코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전 외무부 상임수석인 존 버튼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지 2주 후인 1950년 10월 27일, 미 국방장관 조지 마셜은 전면전으로의 확산이 우려되는 가운데 대규모 세균전 프로그램을 승인하였다. 1951년 12월 21일 국방장관 서리 로버트 러비트는 합동참모부(JCS)를 독촉하여 “예측가능한 빠른 시간 안에 실질적 준비를 달성하고… 긴급 전쟁 계획을 지도함과 동시에 생화학 무기의 이용을 위한 병참 계획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1952년 2월 2일 합동참모부는 “한시의 지체도 없는 강력한 공세 능력”과 “이용된 전례가 없는 효과적인 모든 전쟁 수행 수단”을 강구하도록 명령하였다. 합동참모부는 세균전에 관한 아무런 정책도 없다는 것과 정부는 핵전쟁 정책의 전례를 비밀스럽게 따름으로써 대통령 승인을 조건으로 하는 세균전 무기 사용을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성공하였다.<후주1>

미 정부의 공세 정책-미국 정부는 현재까지도 이를 부인하고 있다-의 지원을 받은 합동참모부는 세균전을 핵전쟁과 동일한 최고의 전략적 범주에 위치지웠으며, 정부는 자금을 쏟아부어 군사시설과 민간시설 모두를 최대한 활용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미국은 세균전의 잠재력이 1930년대에 현실화된 이래 1950∼52년간에 이러한 유형의 전쟁을 현대 무기 체제와 분쇄 프로그램의 틀 안에 정책으로 편입시킨 최초의 국가였다.

대부분 미 공군 전문가인 군사연구자들과 일군의 민간 하청업자들은 고엽제 무기와 동시에 대인 무기에 역점을 두었다. 이들은 하나의 대인 약품과 탄약을 표준화한 후에는 일련의 첨단 제품 목록의 생산준비에 다시 착수하곤 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또한 생물 깃털폭탄<후주2>의 일종으로 심리전 삐라 폭탄을 채택하고 표준화하였다. 곡물 고사 인자를 함유한 고엽제 무기와 마찬가지로 이 깃털폭탄 또한 야전 적군의 “보급 및 장비”에 대한 대인 무기로 간주되었다. 군수품 개발은 호흡기관을 통해 영향을 미치는 연무제에 중점을 두었고, 음식물을 통해 감염되는 지상 오염 방출 체제에도 작용하였다. 캐나다와 영국, 미국 사이의 삼자합의 아래 캐나다측 프로그램과 협의하면서 미국은 병독 매개 곤충과 이들의 전달수단을 개발하기 위해 작업하였다.

비밀 무기 프로그램에 관한 제한된 기록은 국방성 세균전위원회가 1950년 후반 데트릭 주둔본부의 특별작전사단이 “세균전 약품의 비밀 살포를 위한 수단과 기제를 고안하는 데서 보여준 창발성과 상상력, 대담성”을 칭찬했음을 폭로하고 있다. 비밀유지 능력은 가장 쉽게 가능했고, 자연적 질병 발발과 구별하기 어려운 세균전 형태로 간주되었다. 문서들을 한번 훑어보기만 해도 대(對)동물 약품에 대한 폭넓은 관심과 더불어 콜레라, 이질, 보툴리누스균 등을 대인용으로 사용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세균전 분쇄 프로그램은 애초에 1954년 7월 1일로 예정된 전면전 계획을 위한 표준 무기 체계에 중점을 두는 한편, 즉각적인 비상사태 대처 능력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우리가 아는 한, 미국은 1952년 3월, 부대 편성과 병참 지원을 갖춘 세균전 작전 수행 능력을 지닌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표준 무기 체제의 특수기능은 아직 자리잡히지 않았지만 필요하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세균무기와 핵무기를 배합한 전략 계획과 적군의 농작물을 파괴할 계획 등과 더불어 상세한 공군 대적(對敵) 계획이 적절히 준비되어 있었다. 야전 능력 외에도 아시아에서의 비밀 세균전을 위한 작전 기반시설이 공군의 심리전(心理戰)사단(PWD)에 깊숙히 매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1953년 중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들로 인해 합동참모부는 장기 계획으로 진행시키기 위해 분쇄 프로그램을 취소하였다.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위기라는 추동력과 윤리적 억제가 제거된 새로운 과학기술이 세균무기가 전쟁에서 효과가 있는지를 한국에서 실험하도록 만들었는가? 이전에 외국 및 대부분의 중국 역사가들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중국 국가기록보관소와 중국군 기록보관소의 문서들은 그것이 사실이었다고 드러내고 있다. 마오쩌똥과 쩌우언라이, 고위 군지도부, 당간부 사이에 교환된 비밀 서한들은 중국 지도부가 미국의 세균전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쩌우언라이는 1950년 유엔군이 압록강에서 후퇴할 당시 세균전을 수행하였다는 의혹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바 있다. 많은 망설임 끝에 1952년 2월 중순 그와 마오는 결국 중국군과 함께 복무하고 있던 북한군 의료단이 수집한 증거를 통해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베이징에서의 실험을 통해 미국이 페스트와 콜레라를 퍼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페스트는 중국 동북부 일부 지역의 풍토병이긴 했지만 한국에서는 1912년 이래 한번도 발병한 적이 없었고, 콜레라 또한 1946년 남한에서 발병한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없었다. 의료계 인사들은 이들 병의 발견에 앞선 수개월간 군이나 인접 주민들 사이에서 어떠한 전염병 사례도 발견된 적이 없음을 입증하였다. 또한 질병을 옮기는 설치(楔齒)류도 발견된 적이 없었다.

중국 정부는 각군을 통해 수집한 이러한 증거를 발표하여 1952년 2월말에 유엔에 미국이 세균전을 수행하고 있다고 제소하였다. 이들 증거에 대한 가장 널리 유포된 기각은 아마 미국 정부가 부추긴 세 명의 캐나다 과학자가 작성한 보고서였을 것이다. 이들 세 명중 어느 누구도 미국 정부의 세균전 연구반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캐나다 외무부 또한 이 증거를 당시 캐나다의 세균전 실험실 총책임자이자 병독 매개 곤충 전문가인 GB 리드 교수에게 보냈다는 사실은 최근까지 기밀사항이었다. 리드는 몇 가지 예외가 있긴 하지만 이 증거가 근거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외무장관 레스터 피어슨에게 이 제소의 과학적 측면에 대한 공개적 논의를 피하라고 조언하였다.

중국 랴오닝성의 공공보건 종사자들이 작성한 의료보고서들-현재 중국 국가기록보관소에 있지만 이전에는 학자들이 볼 수 없었다-을 보면 한국에서 보고된 것과 유사한 패턴들이 드러나는데, 미군 비행기의 관찰과 더불어 파리, 벼룩, 모기 등의 이상 과다와 이 지역에 흔치않은, 추위에 대한 저항력이 매우 큰 일부 곤충이 보고되어 있다. 랴오닝성에는 어떠한 대규모 유행성 전염병도 없었고 국지적 발병은 통제되었으며 질병의 패턴에 관한 훌륭한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공공보건 전문가들은 질병의 이상 발발을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심각한 것 중 하나는 한국과 인접한 랴오닝성 내 중국 산업중심부 세 개 도시에서 1952년 3월 내내 급성 독성뇌염이 발병한 것이었다. 진드기를 통해 확산된 뇌염은 동북부 외딴 삼림지역에서는 흔치않은 일이었지만, 서구에서 교육받은 의료학자이자 셴양 국립의과대학 병리학과장인 의사가 이끈 병리학 그룹은 이 특수한 형태의 뇌염이 동북 지역에서 알려진 것과는 다른 종류이고 곤충에 물린 상처가 원인이 아니며 소화기나 호흡기 계통을 통해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결론지었다. 앞서 언급한 기록들에 따르면 다른 의료팀들도 몇몇 경우, 특히 페스트와 탄저병, 콜레라, 뇌염 등과 관련해서는 세균전의 증거가 있다고 결론내렸음을 알 수 있다.

마오는 세균전이 그다지 효과적이진 않았다고 주장하였고, 공공문서들 또한 수백 명의 군 사상자와 2천 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인 사망을 기록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한국전의 실험 결과가 1953년에 분쇄 프로그램을 중단한 미국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다.

랴오닝성의 증거는 당시 미국의 능력과 일치한다. 가장 흔한 이상 질병은 페스트와 탄저병이었는데 이는 미국의 세균전 프로그램에서 1순위를 차지한 연구주제였다. 콜레라의 이상 발병 또한 이를 유망한 질병으로 선별해낸 비밀 무기 프로그램과 일치한다. 또한 미국과 캐나다의 프로그램 모두 뇌염을 연구하고 있었다.<후주3> 호흡기를 통한 확산에 관한 중국측의 의혹은 분무기를 통해 산포된 인자(因子)의 보고가 그러한 것처럼 연무제 개발 사실과 일치한다.

가장 가시적인 증거는 곤충을 통한 것이다. 1963년, 데트릭 주둔본부의 곤충학국 및 생물실험실의 책임자였던 데일 W. 젠킨스 박사가 “미국은 1953년 이전에 세균전을 위한 절지동물 사용의 잠재력을 조사한 적이 없다”며 이를 공개적으로 부인한 바 있지만, 기록은 그들이 이를 행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젠킨스 자신도 여기에 참여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자신의 프로젝트 외에도 젠킨스는 캐나다 북부 지역 현장에서 곤충에 관한 대규모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는데, 이 지역의 곤충은 -중국 현지 곤충은 살아남기 힘든 추위에- 중국에서 보고된 것과 동일한 범위였다.

미국과 캐나다의 작업은 감염된 곤충 미끼와 종이박스를 비롯한, 감염 곤충의 살포를 입증하는 중국측 증거와 일치한다. 중국이 자신의 증거에 포함시킨 원통 모양의 상자와 최근 기밀해제된 1953년의 화학 병과(兵科) 기록에 있는 세균폭탄 사진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 삐라 살포기가 세균폭탄으로 사용되었다는 중국의 증거는 우리가 “깃털폭탄”에 관해 알고 있는 것과 일치한다.

중국과 북한측 문제제기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기 위해 사용된 주장 중 하나는, 이것이 소련이 하바로프스크에서 1949년에 열린 재판에서 공개한 이차대전 당시의 일본의 능력에 관한 정보로부터 날조된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참여자들인, 시로 이시이 장군이 이끈 악명높은 731부대는 전범으로 재판받았다. 일본의 세균전 프로그램과 (이시이 장군을 비롯한) 책임자 일부를 미국이 비밀스럽게 인계받았다는 사실이 1980년에 확증<후주4>된 이후 미국은 또다른 방어선을 채택하였다. 미국은 일본인들로부터 거의 아무 것도 얻지 못했으며, 병독 매개 곤충과 관련해서는 다른 방향의 연구를 하였고 그나마 한국전 종전 이전에는 이에 착수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미국과 중국에서 최근 기밀해제된 문서들을 통해 거짓임이 드러났다.

소련 기록보관소에서 최근 알 수 없는 경로로 입수된 12개의 문서는 한국전 당시 미국에 제기된 세균전 의혹이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선정적 신문과 잡지의 표제를 장식한 바 있다. 이 문서들은 일반적인 학술적 상식으로는 공식 문서가 아니며 수고(手稿)로 작성되어 있다.

출처가 확실하다 하더라도 이 문서들은 결정적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들 문서는 라브렌티 베리아와 세멘 이그나티에프 휘하에 있던 경쟁하는 국가 치안부들의 수장 사이에 권력투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베리아는 스탈린 사후 이들 문서의 공개를 활용하여 이것이 소련의 신뢰성에 대한 위협을 드러낸다고 자신의 라이벌을 숙청하고자 하였다. 이그나티에프는 자신을 방어하면서 자신은 이 문서들을 신뢰하지 않으며 이를 스탈린에게 보여주었다고 말하였다. 스탈린은 이 문서들을 간단히 처리해 버렸다고 한다. 소련 지도부는 베리아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그나티에프를 해고하고 그를 공산당에서 축출하였다. 베리아를 지지한 직후의 일이었다. 베리아와 이그나티에프 모두 한국에 자신의 요원을 갖고 있었다. 베리아는 세균전 주장이 날조된 것이라는 자기 요원의 보고서를 이용한 반면, 이그나티에프는 소련의학아카데미의 부위원장이자 모스크바 국립대학 생물학 교수인 자신의 요원 주코프 바레즈니코프 교수의 말을 믿었다. 바레즈니코프는 또한 중국이 세균전 증거 조사를 위해 초청한 조셉 니담이 이끄는 국제과학위원회(ISC)의 회원이기도 하였다. 그는 중국측 제소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국제과학위원회 보고서에 서명하였다. 소련 정부 또한 1969년까지는 세균전 주장을 확인하였다.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최악이었던 시기이자 워싱턴과 모스크바 사이의 화해기였던 1969년 소련은 자신의 입장을 번복하였고, 양국 지도자들은 그 결과 1972년의 세균전협약을 준비하였다.

중국측 문서들로부터 두 가지 결론이 도출되며 이는 미국 기록문서에 의해 확증된다. 미국은 작전수행 능력과 더불어 최초 세균무기 체제를 개발함으로써 현대 병기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그리고 미국은 이들 무기를 한국에서 실험하였다.

* 스티븐 엔디코트와 에드워드 헤이거만은 토론토 요크대학 교수이자 {미국과 세균전: 냉전 초기와 한국의 비밀(Stephen Endicott and Edward Hagerman, The United States and biological warfare. Secrets from the early cold war and Korea, Indiana University Press, Bloomington and Indianapolis, 1998)}의 공저자이다.

<후주1> 1950년 2월 1일자로 되어있는 한 문서에서 국가안보위원회(NSC)는 전투용 개스의 사용을 보복조처로서만 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주창했지만, 1953년 4월 7일(NSC 147)에는 동일한 제한조치가 세균전에만 권고되었다. 이 문서는 다시 NSC 62 문서를 참조하고 있는데 이는 그러나 세균전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후주2> 깃털로 채운 폭탄으로 가볍기 때문에 세균이나 삐라를 광범위한 지역에 퍼뜨리기 용이한 특수 폭탄. (옮긴이)

<후주3> 미국의 프로그램에서 발견되지 않은 세균전과 관련된 유일한 질병은 천연두이다. 그러나 중국측 주장에는 천연두도 포함되어 있다. 현재 우리는 데트릭 주둔본부의 특수작전사단이 수행한 작업에서 부분적 서술만을 찾아낼 수 있다.

<후주4> 앙트완 알프의 “일본 전쟁의 범죄와 민중의 기억”(Antoine Halff, “Crimes de guerre japonais et m moires populaires”, Le Monde diplomatique, November 1995)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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