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24일 이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러시아군의 공격 아래 놓인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참혹한 상황에 대한 첫 보도가 전해지자, 국제 페미니스트 공동체는 즉각적으로 우크라이나 여성들을 지원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임을 강조했다. 전쟁 상황에서 가장 취약한 사회적 집단으로 여겨진 우크라이나 여성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계 각지의 페미니스트들이 우크라이나 페미니스트들과의 초국적 연대를 선언했는데, 클레어 헤밍스(Clare Hemmings)의 개념(‘감정적 연대: 페미니즘적 자기 성찰과 정치적 변혁’의 페미니즘 정치에서 감정과 연대의 관계 연구)을 적용해 볼 때 이를 ‘진정한 감정적 연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성(性) 억압적 정책’을 시행하는 국가가 ‘성평등적 정책’을 추진하는 국가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으로 규정하며, 따라서 이 전쟁이 우크라이나 페미니즘을 겨냥한 반(反)젠더 전쟁이고, 전쟁 속에서 우크라이나 페미니즘이 위협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도, 우크라이나 여성들을 향한 이러한 초국적 페미니스트들의 연대와 지지는 오해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페미니스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우크라이나 페미니스트들은 전쟁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여성과 페미니즘의 ‘취약성’을 강조하는 것이 피해자 담론의 재생산이며, 우크라이나 여성들을 고통받는 존재로 규정하는 서구의 시각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즉, 우크라이나 여성들을 어린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는 불행하고 무력한 난민으로 묘사하고, 그들에게 저항할 능력이 없다는 정체성을 덧씌우는 것이라는 비판이었다. 이는 서구의 ‘차별적 시각’이며, 나아가 우크라이나 여성들을 오리엔탈리즘적으로 대상화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 옥사나 자부즈코(Oksana Zabuzhko)는 2022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그가 특별히 많은 인터뷰 요청을 받았던 당시를 회상한다. 그는 독일의 페미니스트 기자들이 그에게 반복적으로 같은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이제 우크라이나에서 페미니즘은 끝난 것인가?”
이에 대해 자부즈코는 기자들에게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사진에는 젊고 아름다운 우크라이나 여성 군인들이 당당한 모습으로 행진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이들은 포로 교환을 통해 러시아군의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병사들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있는 것은 희생자도,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는 난민도 아니다. 조국이 자랑스러워할 ‘전사(戰士)’다.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행진이다.”
자부즈코에 따르면, 이처럼 행진하는 여성 군인의 사진을 보여주는 퍼포먼스적 제스처를 통해, 그는 서구 페미니스트들에게 우크라이나 페미니즘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쟁 속에서 ‘매우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를 서구에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입증했다. 그는 덧붙였다.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페미니즘이란 바로 우크라이나 군대에서 여성들이 하는 일이다. 그리고 전 세계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많은 우크라이나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은 자부즈코의 주장에 동의하며, 전쟁 속에서도 우크라이나 페미니즘이 자신감 있게 발전하고 있으며 ‘진보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페미니즘 연구>(Feministische Studien)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그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단순한 고통과 절망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우크라이나에서 성평등과 여성의 권한 강화를 위한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전쟁이 우크라이나 내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여성들에게 새로운 경력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먼저 우크라이나 페미니스트 연구자들, 특히 타마라 마르체뉴크(Tamara Martsenyuk)와 마리나 셰브초바(Maryna Shevtsova)에 따르면, 전쟁 이후 우크라이나의 법률 분야에서 상당한 긍정적 변화가 일어났으며, 법적 체계가 성평등 및 LGBTQ+ 권리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개정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사회학적 조사에 따르면 LGBTQ+ 커뮤니티에 대한 지지가 두 배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사회학자 올레나 스트렐니크(Olena Strelnyk)는 전쟁이 여성들의 경력 기회 확대에 기여했다고 분석한다. 전쟁은 여성들에게 더 많은 독립성과 자기실현의 기회를 제공한 반면, 우크라이나 남성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스트렐니크는 출국 금지, 강제 동원, 그리고 전선에서의 대규모 사망자 발생으로 인해 전쟁이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도전하는 요소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셋째이자 가장 중요한 점은, 마르체뉴크에 따르면 전쟁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인들이 반권위적이고 유럽 중심적인 국가 정체성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유럽적 가치’와 연결된 존엄성과 평등의 가치이며, 유럽과 ‘러스키 미르(Russkiy mir, 러시아 세계)’ 사이에서 ‘문명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정체성은 성평등과 LGBTQ+에 대한 관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결과 우크라이나 국민은 강한 국가 정체성을 가지면서도 성평등과 LGBTQ+ 권리를 지지하는 집단이 되었다고 마르체뉴크는 주장한다. 마르체뉴크는 이러한 민족주의와 젠더 관용의 ‘역설적 결합’이 서구 사회학 이론에서는 쉽게 조화될 수 없는 개념이라고 지적한다. "서구 사회학 이론에서 젠더, 민족주의, 전쟁은 쉽게 화해되지 않는 주제이지만, 우크라이나 전쟁과 특히 여성들의 전쟁 참여는 서구 페미니스트들에게 ‘젠더와 국가 형성, 또는 젠더와 전쟁의 관계’를 다시 생각할 필요성을 제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크라이나 페미니스트 연구자이자 활동가인 타마라 즐로비나(Tamara Zlobina)도 이에 동의하며, "우크라이나의 현실은 전쟁이 항상 보수화와 전통주의를 초래한다는 서구적 개념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우크라이나에서는 그 반대의 일이 벌어졌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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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반(反)민족주의 페미니스트, 트랜스 페미니스트, 비(非)민족주의 좌파들은 이러한 우크라이나 주류 페미니스트들의 낙관적인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페미니스트들과 민족주의적 시민사회가 전쟁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정부의 반민주적이고 차별적인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또한, 이들의 주장과 달리, 최근 몇 년간 우크라이나에서 실제로 성평등이 진전된 바가 없으며, 오히려 후퇴했다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 작가이자 공론장에서 활동하는 바이젠더 활동가 바딤 야코블레프(Vadym Yakovlev)는 "유로마이단(Euromaidan, 2013~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 및 정치적 운동) 이후 우크라이나 엘리트들은 ‘단일민족 국가’를 구축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러한 과정에서 민주적 제도가 약화되고 소수자, 특히 성소수자의 권리가 침해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여성들에게 새로운 경력 기회를 제공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관련하여, 반(反)민족주의 페미니스트들과 좌파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러한 기회가 대다수의 우크라이나 여성들에게 열리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직접적 수혜자인 우크라이나 엘리트들과 소위 ‘시민사회’의 대표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들 엘리트와 시민사회는 실제로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으며, 그들의 남성들 또한 징집을 면제받고 전쟁 참여를 기부금 모금이나 우크라이나군을 지원하는 문화 행사 조직으로 제한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반(反)민족주의 좌파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민족적 분열(서부의 우크라이나어권과 동부의 러시아어권)보다 더욱 근본적인 분열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계급 분열과 계급적 모순이다. 우크라이나 사회학자 볼로디미르 이슈첸코(Volodymir Ishchenko)는 이러한 계급 분열이 우크라이나 여성들의 전쟁 관련 활동에도 반영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즉, 우크라이나 정부 및 시민사회와 연계된 소수의 엘리트들은 특정한 형태의 ‘운동’을 전개하며, 이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비타협적인 탈공산화와 탈식민화를 지지하는” 형태를 띤다. 반면, 동부와 서부를 포함한 대다수의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다른 종류의 연대와 운동을 강요받고 있다. 그들의 목표는 강제 징집을 피하는 것이다. 이들은 아버지, 남편, 아들들이 군 복무 면제 특권을 가진 중산층(정부 관료, 경찰, 교수, 배우, 음악가, 운동선수 등)의 남성들과 달리 징집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에 맞서 싸우고 있다. 야코블레프(Yakovlev)는 이에 대해 “이러한 운동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파괴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서방에서도 강한 지지를 얻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우크라이나 여성들은 우크라이나 페미니스트 운동에 의해 배신당했다. 이 운동은 우크라이나의 군국주의, 민족주의, 권위주의와 협력하는 세력이 되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우크라이나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제기되는 이러한 논쟁적인 주장들과 서로 정반대되는 우크라이나의 성평등 및 페미니즘 상황에 대한 평가는 무엇을 시사하는가?
첫째, 현재의 우크라이나 페미니즘은 동질적인 운동이 아니며, 내부적으로 상당한 의견 차이와 모순이 존재한다. 즉, 우크라이나 페미니즘이 일방적으로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으며, 좌파적 의제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도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이러한 논쟁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우파의 반격과 ‘전멸적 전쟁’(에티엔 발리바르의 표현)이 페미니즘 운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시사한다. 현재 우파 세력들은 점점 더 광범위한 연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는 좌파와 소수자를 배제하는 ‘배타적 연대‘의 형태를 취하면서도, 다양한 정치적 요소들(‘진보적’ 의제 및 페미니즘 포함)까지 포섭하는 방식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는 과거 좌파가 전유했던 ‘포괄적 연대’의 초국적 형태를 우파가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 세계적으로 우파가 부상하는 상황에서 오늘날 좌파 이론가들이 직면한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왜 좌파는 점점 더 우파에 패배하고 있는가? 왜 우파의 연대는 강해지고, 좌파의 연대는 약해지고 있는가? 어떻게 우파는 전 세계적으로 반격에 성공하고 있으며, 심지어 신(新)파시즘과 신(新)나치즘의 재정당화와 합법화까지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리고 좌파와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반동 세력의 공격이 갈수록 거세지는 상황에서 이에 맞서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미 1980년대 중반,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와 샹탈 무페(Chantal Mouffe)는 그들의 저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급진적 민주주의를 향하여⟫(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 Towards a Radical Democratic Politics)에서 좌파가 효과적인 정치 전략을 수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논의했다. 그들은 소련식 사회주의의 쇠퇴를 분석하며, 현대 정치에서 헤게모니는 결국 ‘포퓰리즘’을 통해서만 구축될 수 있으며, 이는 ‘정치적 감정’과 ‘탈본질주의적 정체성 정치’의 극대화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대중 정치적 동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이러한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정치에서 감정적 차원의 중요성이 점점 더 강조되고 있으며, 라클라우와 무페의 주장이 점점 더 많은 사례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윌리엄 코놀리(William Connolly)는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 동안, 현대 미국 정치가 포퓰리즘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그 안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성공한 것이 바로 ‘트럼프주의’라고 분석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트럼프주의는 ① 대중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동원하는 능력과 ②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의 선동적 수사를 정교하게 활용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반면, 좌파 지식인들은 정치에서 수사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며,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의 수사적 전술에 맞서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트럼프주의에 지속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코놀리에 따르면 좌파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다원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민주주의’ 내에서 일정 정도의 포퓰리즘 요소를 포함해야 하며, 특히 정치적 감정을 효과적으로 동원하는 소통 방식과 선동 전략을 민주주의 내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결국, 좌파가 우파의 감정적 동원 전략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접근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현재의 우파 반격을 막아내는 것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오늘날 웬디 브라운(Wendy Brown)은 윌리엄 코놀리의 주장을 이어받아, 좌파가 우파와의 정치적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① 감정의 차원을 과감하게 활용하고 ②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기법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브라운에 따르면, 좌파와 페미니스트들이 우파에 패배하는 이유는, 감정, 열정, 그리고 카리스마를 정치에서 활용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많은 좌파와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요소가 전제주의와 통제 불가능한 권력을 정당화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여, 이를 회피하려 한다. 그러나 브라운은 "우리의 과제는 카리스마를 활용하는 것이다. 카리스마는 시작하고, 흥분시키고, 영감을 주고, 동원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파가 증오와 공포를 통해 대중을 동원하는 것처럼, 좌파와 페미니스트들은 어떤 감정을 활용할 수 있을까?
웬디 브라운은 좌파가 우파와 달리 파괴적인 감정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돌봄의 감정을 민주적 정치 목적을 위해 동원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감정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a) 인간과 비인간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는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안락한 삶에 대한 욕구 b) 모든 취약한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무고한 생명에 대한 돌봄 c) 종속, 굴욕, 배제의 힘에 저항하기 위한 존중과 소속감에 대한 욕구 d)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학습하려는 교육적 열망 등. 브라운에 따르면, 이러한 감정들은 대규모 국가 및 경제 기구를 활용하며 전쟁까지 부추기는 무책임한 선동가들의 대중 동원 전략에 맞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이고 인도주의적인 감정의 강도가, 우파의 대중 정치 동원 전략에서 사용되는 강렬한 인종주의적, 민족주의적, 성차별적 증오의 잔혹한 감정을 저지하기에 충분할까? 혹은 윌리엄 코놀리가 ‘열망하는 파시즘’이라 부른 세력들에 맞설 수 있을까?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따라, 전쟁 시기 증오, 살해 욕망, 그리고 죽음에 대한 충동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감정적 힘이 바로 ‘마니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버틀러에 따르면, 마니아는 생명체가 자신의 파괴 또는 자기파괴에 저항하는 본능적 반응으로 이해될 수 있다. 프로이트는 ‘광적인 삶의 욕구’를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암호로 해석하며, 이는 특정한 정치 체제의 틀 안에서는 근거를 찾을 수 없지만, 존재하고 지속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표출하는 힘이라고 보았다.
물론 버틀러도 마니아가 현실 정치로 전환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마니아는 폭력적인 체제를 해체하려는 연대의 형식 안에서 ‘다른 현실’에 대한 강한 요구를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현대 페미니즘이 이런 특정한 방식(‘마니아적 방식’)으로 사람들을 교육할 방법을 찾는다면, 여성들은 전쟁과 폭력에 대한 ‘광적인 혐오감’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버틀러는 주장한다.
버틀러가 해석하는 마니아적 감정이란, ‘반(反)파시즘적 열정‘이다. 이는 우파가 인종주의·민족주의·성차별적 증오를 통해 특정 집단을 배제하거나 말살하려는 ‘파시즘적 열정’과 맞서는 감정적 동력이다. 버틀러(Butler)에 따르면, 파시즘적 열정은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으며, 그중 하나는 사람들의 권리를 박탈하려는 욕망이다. 즉, 시민권, 특정 국가에 속할 권리, 자기결정권을 빼앗고자 하는 충동이다. 또한, 파시즘적 열정에는 특정한 왜곡된 열정이 포함되는데, 그것이 바로 반(反)지성주의에 대한 열광이다. 이는 우파 및 신(新)파시스트들이 지적 활동과 비판적 이론에 대한 증오에 집착하는 방식을 의미하며,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정부와 학계 차원에서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제도화되고 있다. 따라서, 반(反)파시즘적 열정에 의해 움직이는 좌파와 페미니스트들은 우파에 맞서, 정치적 지성주의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을 기억하고 이를 새롭게 강화해야 한다. 정치적 지성주의는 항상 좌파와 페미니스트들에게 중요한 무기였으며, 오늘날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파는 ‘트럼프의 재림’을 찬양하며, 단순히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어리석음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오늘날, 트럼프가 매일 충격적이고 파괴적인 행정명령과 공개 발언을 쏟아내는 상황에서, 우리를 사로잡고 반복적으로 휘감는 감정은 분노와 격분이다. 그의 재등장을 기뻐하는 자들의 뻔뻔한 사디즘을 향한 정당하고도 정당화된 규탄이 우리를 감싼다. 그러나 우리의 도덕과 정치가 단순히 ‘규탄’ 행위로만 제한된다면 어떻게 될까? 주디스 버틀러는 이렇게 묻는다. 버틀러는 단순한 규탄에만 머무르는 것은 우리의 정치적 사고를 크게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첫째, 우리가 반대하는 폭력이 어떻게 조직되고 작동하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둘째, 규탄만으로는 전쟁과 폭력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적 사회 형태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잃게 된다. 셋째, 우리의 윤리적 입장이 단순히 ‘우리가 옳다’는 감정과, 상대에 대한 도덕적 우월감에 갇히게 된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말을 기억하자. 그는 진정한 반(反)파시즘적 윤리란 ‘타자의 거대한 역사적 파시즘’을 비판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의 파시즘’에 대한 비판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푸코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의 안티 오이디푸스(Anti-Oedipus)를 이러한 반파시즘적 윤리의 모범으로 보았다. 그는 “우리 모두의 머릿속과 일상적 행동 속에 자리 잡은 파시즘, 우리가 권력을 사랑하도록 만들고, 우리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바로 그 대상을 욕망하게 만드는 파시즘”을 비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파시즘에 대한 비판은 훨씬 더 높은 지적 노력을 요구한다.
따라서, 현대 페미니스트 및 좌파 이론가들이 우파 포퓰리즘과 파시즘적 열정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것에서, 우크라이나의 좌파와 페미니스트들은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첫째, 우파의 공세와 현재의 정치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좌파와 페미니스트들은 보다 포괄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투쟁을 계속해야 하며, 회복과 권한 강화를 위한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둘째, 우크라이나에서 우파와 민족주의 세력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 좌파와 페미니스트들은 단순한 규탄과 분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실천에서 지적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즉, 우크라이나의 좌파와 페미니스트들은 지적으로 경험적 연구와 지식에만 머무르지 말고, 철학과 정신분석을 포함한 비판이론을 과감히 이론적 도구로 포함해야 한다. (참고로 샹탈 무페(Chantal Mouffe)는 정신분석을 거부하는 것이 많은 좌파들이 저지른 큰 실수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우크라이나의 좌파와 페미니스트들은 우파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설 새로운 방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파는 철학, 문학, 젠더 연구 등의 학문을 ‘지적 담론’으로 가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이를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축소시킨다. 그렇지 않다면, 우크라이나의 좌파와 페미니스트들은 절망과 무력감에 빠지거나, 혹은 깊은 나락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이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는 일부 우크라이나 좌파들이 예견한 바와 같다. 그들은 민주적 정치적 상상력의 가능성과 좌파 및 페미니스트 정치적 열정의 힘을 과소평가한 채, 오직 객관적 경제 이해관계만을 신뢰한다면, 결국 좌파는 실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출처] Debates , Can War Be Feminist?
[번역] 이꽃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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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나 즈레브키나(Irina Zherebkina)는 우크라이나 국립과학원 하르키우 인문교육센터 철학 교수이며, 하르키우 젠더 연구 센터 소장(1994년~현재)이다. 그리고 ⟪젠더 연구 저널⟫(Gender Studies Journal)의 편집장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