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자여 내게로 오라, 새 세상이 열릴지니

[1.26세계행동의날] 교육, 강력한 평가국가의 등장

세계 사회운동 진영의 전략적 소통 공간으로 성장한 세계사회포럼(WSF). 2009년 아마존 대회을 앞두고 2008년에는 1월 26일 '세계행동의 날'을 기점으로 각국에서 분산 개최될 예정이다.

'민중언론 참세상'은 2008년 세계사회포럼, 1.26세계행동의 날 행사와 관련한 국내외 소식과 기고 글들을 집중이슈로 묶었다. 지난 8일 한국에서도 '2008년 세계사회포럼(WSF) 1.26 세계행동의 날'을 준비할 (한국) 조직위원회가 공식 출범했고, 22일 부터 26일 간 진행 될 행사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민중언론 참세상'은 1.26 조직위원회와 공동 기획을 통해 세계행동의 날을 함께 준비한다.
-[편집자 주]

근대 시민혁명 이후 인류사회는 기존의 세습적인 신분에 기초한 구래의 특권과 위계질서를 타파하고 보편적인 인권을 법적 권리로 확립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사회경제적 성취는 개인의 귀속적 배경(성, 인종, 혈통, 계급 등)에 상관없이 개인의 능력과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는 능력주의 이념이 보편화된다. 국가는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모든 국민은 누구나 의무적으로 일정 기간 동안 교육을 받도록 하는 공교육제도를 확립한다.

그러나 100년 이라는 짧지 않은 공교육제도의 역사 속에서 애초 근대 사회가 약속했던 능력주의는 실현되지 않았다. 교육기회, 과정, 결과에 있어서 계층간, 인종간, 성(性)간 차별과 불평등은 근절되지 않았고, 교육적 성취를 결정짓는 것은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개인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좌우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지배권력은 이제 형식적인 기회의 평등조차 무너뜨림으로써 자신들의 이념적 토대였던 자유주의(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스스로 허물고 있다. 그나마 형식적인 평등정책을 유지해오던 국가의 기능마저 없애고 이를 시장원리에 맡겨 오로지 개인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교육기회를 부여할 요량이다. 전근대적인 신분제 사회가 다시 도래할지도 모를 형국이다.

교육권의 재개념화, 소비자 주권

시장논리에 따르면 이제 교육권은 국민의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소비자(학생, 학부모)의 권리로 재개념화된다. 공급자는 물론 학교와 교원이며, 이들이 교육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도록 함으로써 소비자는 질 좋은 교육상품을 획득할 수 있다는 논리다. 즉 소비자들의 합리적인 선택 행위가 공급자들 간의 경쟁을 낳고, 이 경쟁이 상품(교육)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단순한 논리다.

그런데 교육분야에서 이러한 시장논리가 그럴 듯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바로 ‘관료주의의 폐해’를 개혁의 이유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즉 국가의 불필요한 간섭과 통제(3불 정책, 고교평준화 등)가 비효율, 경직, 무경쟁을 낳고 이것이 교육의 총체적 실패로 귀결되었다는 오도된 이미지 전략이 먹혀들어간 결과다. 이명박이 교육개혁의 우선 과제로 ‘교육부 해체’를 내세우지 않았던가!

고교다양화 정책(기숙형 공립고, 자율형 사립고 신설)은 이러한 시장원리의 결정체다. 현행 고교평준화제도는 학력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소비자의 선택권을 앗아가기 때문에 다양한 학교들을 만들어 소비자의 선택을 받게 하면 학교와 교원은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즉 성적 높이기 경쟁을 하게 되고 이는 자연스레 학력상승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비자의 선택을 위해선 ‘명문대 진학률’로 대표되는 학교에 대한 세부정보가 필수적이며 이 정보는 <벼룩시장>의 광고처럼 소비자들에게 공개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전국의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전국단위의 학업성취도 평가가 시행되고 그 결과가 소비자들에게 공개되며, 소비자들은 이를 근거로 학교를 선택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숱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정부의 개입이 없는 치열한 시장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소비자를 많이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학교는 오로지 학업성적을 높이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게 된다. 일찍이 영국과 미국에서도 비슷한 부작용이 나타났던 바, 학교운영에 있어서 ‘비용이 많이 드는 학생’(장애학생, 이주민 자녀, 저소득층 자녀)이나 ‘성적이 낮은 학생’(출신성분이 낮은 계층)들은 쫓겨나거나 입학조차 거부되기도 한다. 이렇게 쫓겨난 학생들은 학생수가 모자라 폐교위기에 처한 학교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이게 되어 또다시 악순환이 발생한다.

또한 직접적으로 성적에 대한 책임은 교사에게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압력과 닦달에 시달리며, 학생들의 성적에 따라 자신의 신분이 좌우되는 일상적인 평가체제에 편입된다. 학생은 또 어떠한가. 성적 향상에 대한 압력은 지금보다 훨씬 강력할 것이며, 학교나 행정당국이 정한 학력기준에 미달되는 학생들은 낙오자로 낙인찍히는 수모를 겪어야 한다.

그리고 실패한 학교로 낙인찍히게 되면 그나마 경제력이 있거나 학습동기가 있는 학생들이 다른 학교로 빠져나가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된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학업성취도 평가가 교육목표와 과정을 점검하고 판단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교육의 목표가 되어버리는 전도현상이 발생한다.

이렇게 선택권이 확장되면 구성원 모두에게 보편적인 교육을 제공한다는 공교육의 이상(理想)은 퇴색되고, 소비자의 선호도에 따라 학교의 서열이 매겨지며 자연스럽게 ‘고교등급제’가 부활한다. 기본권으로서의 교육권은 소비자 선택권으로 재개념화되는 동시에 강력한 평가시스템이 지배하게 되고 계급간 차별적인 교육이 제공된다. 입시경쟁 심화, 학교서열화, 사교육비 증가는 이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다.

권한 이양과 강력한 평가국가의 등장

한편 정부의 권한 축소와 강력한 시장주의는 서로 모순될 수밖에 없는데, 방임적 시장주의는 필연적으로 부작용과 갈등을 낳을 수밖에 없고, 이는 거꾸로 국가의 개입과 조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교육부를 ‘해체’하고 초중등교육 업무를 지방교육청과 단위학교에 이관한다는 것은 말그대로 중앙정부의 기능을 없앤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가기능, 평가에 근거한 재정분배기능 등 강력한 제어권한을 갖고 시장화 정책을 진두지휘하겠다는 뜻이다. 즉 국가는 직접적으로 개별 학교정책에 간여하지 않고서도 막후조종을 하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의 계책을 휘두른다.

권한 이양은 또 다른 거대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원노조의 무력화이다. 영국은 일찍이 중앙정부의 말을 안 듣는 지역교육청과 교원노조를 짓밟기 위해 시장주의자들로 구성된 학교운영위원회로 하여금 교사 임면, 예산관리 등 막강한 권한을 주어 노조를 분열시키고 단체협약을 무력화시켰다.

이명박 정부도 이와 비슷하게 이제는 교사들이 국가가 아니라 지역교육청이나 단위학교 경영자와 개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만들어 현재와 같은 전국단위의 교원노조의 틀을 무력화시키려 한다. 즉 임금이나 노동조건, 예산과 같은 민감한 사안들에 대한 결정권한을 지역교육청와 단위학교에 넘김으로써 노조의 단결력을 약화시켜 이득을 얻으려는 속셈이다.

학교다양화 정책과 결합된 권한 이양은 개별 지역 차원의 심각한 문제를 낳을 것이다. 학교신설·지정권한을 지역교육청에 이관함으로써 특목고다 기숙형 학교다 지자체 간에 서로 경쟁하듯 남설하게 되어 기존의 공립학교는 지원이 감소되거나 소외되기 마련이다. 경제력이 있는 계층은 ‘특별한’ 학교로 빠져나가고 기존의 공립학교는 그렇지 못한 계층의 아이들이 남게 된다.

경제력의 차이는 곧 학력의 차이로 이어져 기존 공립학교는 ‘실패한’ 학교가 되어 폐교 위기까지 몰릴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새 정부의 감세정책은 필연적으로 공공지출을 감소시켜 일차적으로 교육이나 복지예산이 감축대상이 된다. 교육예산의 삭감, 선택권의 확대는 경제력에 따라 학교를 차별화 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신분제 사회, 다시 부활하나

왕자는 왕자로 태어나고 거지는 거지로 태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타고났기 때문이라는 불온한 사실을 '왕자와 거지'는 이미 19세기에 풍자하고 있다. 만일 그들이 장난삼아 서로 역할을 뒤바꾸지 않았던들 그 불온한 상상은 세상의 빛을 보기 어려웠으리라. 그러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는지 현대판 왕자와 거지가 부활하고 있다. 가진 자들은 정부의 배려와 타고난 능력 덕에 특별한 코스를 밟아 왕자가 되고, 못 가진 자들은 세심한 배려는커녕 주위의 멸시와 냉대 속에서 거지가 된다.

기존의 교육정책 실패에 따른 대중들의 원한을 더욱 강력한 시장주의 정책의 동력으로 삼으려는 새 정부의 교육개혁의 모순은 여기서 발생한다. 정부가 시장논리에 따라 교육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할수록 갈등과 문제점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능력에 따른 기회의 평등'이란 교과서적인 문구를 이제 더 이상 믿고 따르지 않는다.

지배 이데올로기의 위기 속에서 대중들은 더욱 격한 경쟁에 뛰어드는 개인적 해법을 찾게 될지 아니면 분노의 화살을 정부와 시장에 돌리는 집단적 저항에 나서게 될지, 교육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진영은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우리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덧붙이는 말

배태섭 님은 범국민교육연대 사무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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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세계사회포럼 , 시장주의 , WSF , 1.26 , 세계공동행동 , 평가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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