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용산참사 현장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파견미술팀은 부평 GM대우자동차 비정규지회 노조설립 2주년 투쟁문화제에 참석하게 됐다. 인천에서 활동하던 김재석 작가의 연락을 받은 전미영의 제안으로 시작된 파견이다.
김재석 작가는 기륭노동자투쟁, E마트 투쟁현장 등을 찾아다니며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그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용산 참사현장에서 끝나지 않는 전시의 한 공간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어느 날 기륭투쟁 현장에 연대를 갔다가 GM대우자동차 비정규지회 홍동수를 만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부평GM대우자동차 천막농성 현장과 인연이 생겼다. 처음 찾아간 천막농성장은 삭막하고 외로워 보였다. 환경개선이 필요하다고 느낀 김재석은 틈틈이 들려 다양한 문화 활동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매년 인천에서 열리던 인천노동문화제가 다시 시작됐고, 김재석은 그 중 <노동미술굿>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노동미술굿은 미술작가들의 참여와 전시로 만들어져 갤러리와 같은 일정한 전시공간에서 운영됐다. 하지만 김재석은 고민에 빠졌다. ‘노동미술굿에 노동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름에 걸맞는 공간으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노동자와 함께 하는 것이 진정한 노동미술굿이 아닐까.’ 마침 연대하던 부평GM대우자동차 비정규지회 천막농성장의 삭막함과 활기 없는 모습이 떠올랐던 그는 여러 가지 고민 끝에 인천노동문화제 조직위에 제안하기로 마음먹었다. 인천노동문화제 조직위는 많은 논쟁과 고민 끝에 사전프로그램 2009 노동미술굿을 현장에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마침 GM대우자동차 비정규지회의 노조설립 2주기가 되는 날이 머지않은 때였다. 제목을 정했다. 2009 노동미술굿의 제목도 정했다. <비정규 차이다?> 무슨 뜻일까? 중의적 표현으로 비정규직이 만든 자동차라는 뜻과 비정규직이 현장에서 사측에 발로 차인다는 뜻이다.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엽서 띄우기, 천막 꾸미기, 천막전시장 만들기, 예술치료, 판화찍기 등 노동자와 예술가가 어우러질 수 있는 나름 참신한 기획이었다. 지금은 많이 익숙한 프로그램이지만 말이다. 전진경을 포함한 파견미술팀은 농성천막 꾸미기와 전시 공간 만들기를 제안받았다.
회사의 인원감축이 불러온 고용불안에 위축되던 GM대우 부평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07년 9월 2일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노조가 설립되자 사측의 탄압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외주화 등을 이유로 비정규직 조합원을 해고했고, 노조를 탈퇴하면 신규업체에 고용승계를 해주겠다며 회유하기도 하고, 비정규직 노조와의 단체 교섭은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했다. 비정규직 노동조합 간부는 공장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는가 하면, 노동조합 선전전이나 집회에 원하청 노무팀을 동원해 폭력을 행사하는 등 노동자들에게 온갖 고통을 주었다. 사측의 용역폭력에 시달리던 비정규직 조합원들은 2007년 10월 30일 GM대우 부평공장 서문 맞은편 도로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GM대우 비정규직지회는 ‘총고용 보장쟁취,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670일이 넘는 천막농성, 135일의 고공농성, 마포대교, 한강대교 시위 등 다양한 방식의 투쟁을 이어왔다.
2년이 지난 2009년 9월 2일 이들의 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여전히 투쟁하고 있는 기륭노동자, 콜트콜텍 노동자, 쌍용자동차 노동자 등 전국에서 투쟁하는 많은 노동자들이 연대를 위해 달려왔다. 파견미술팀은 늘 그렇듯 연대의 판을 만들기 위해 미리 모이고 논의하고 아이디어를 모은다. 그리고 노조 조합원과 의견을 나누고 함께 작업할 수 있는 것들은 역할을 나눈다. 그러다 보면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힘들었던 이야기, 가족이야기, 생활이야기들이 스스럼없이 나온다. 파견미술가들도 미술가들만의 고충이 있다. 이런 고충들은 저녁 식사자리에서 주로 오간다. 이날 파견노동과 하청노동 등 노동의 형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이야기 도중 노동자의 임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귓속말을 했다. ‘우리보다 낫네…’
미술가, 예술가의 삶도 그리 녹록치 않다. 그림을 팔아서, 노래를 불러서, 사진을 찍어서 먹고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1년에 70만원을 번다는 예술가가 있는가 하면, 아르바이트를 병행하지 않으면 먹고살기 힘든 지경의 예술가들이 평균 70%가 넘는다고 한다. 예술가 특히나 젊은 예술가의 생활고는 자살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특정인의 문제가 아닌 예술가 전반의 문제이다. 물론 어디에나 빈부격차는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예술가를 부러움의 시선으로 본다. 때로는 즐기며 사는 사람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예술가들이야말로 투쟁의 주체로 스스로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 아마도 노동현장의 투쟁이 예술가들의 삶과 무관하지 않기에 연대의 끈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러저러한 이유에서 파견미술팀은 열악한 자신들의 처지를 알게 되었고 스스로 파견미술팀이란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2009년 9월 2일이 파견미술팀의 생일인 것이다.
2010년 해를 넘겨 시간은 흐르고 농성은 기약 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겨울 어느 날 파견미술팀에게 연락이 왔다. 농성장 천막이 많이 낡고 허름해졌다며 보수가 가능한지 조심스럽게 연락을 해온 것이다. 농성천막을 처음 꾸미고 만들었을 때 사실 조합원들이 모두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차피 보수공사를 할 것이면 아예 새롭게 디자인해보자고 의견을 모으고 부평 GM대우농성장으로 갔다. 농성을 하고 있던 조합원들은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주었고 현재 농성진행 경과 등 투쟁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곧 고공농성을 하게 되리라는 것과 이번 농성으로 끝을 볼 예정이라는 이야기였다. 농성장이 좋은 결과로 없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2010년 12월 1일 오전 GM대우자동차비정규직지회 조합원 2명이 9미터 높이의 GM대우자동차 부평공장 정문 앞 조형물 위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파견미술팀은 농성천막 보수공사보다 차라리 농성자들이 힘 받을 수 있는 응원의 행동을 해보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박스로 큰 탈 인형을 만들고 응원의 문구를 적어 높은 곳에 걸어보자고 이야기한 뒤, 파견미술팀은 안성에 있는 이윤엽의 집에 모였다.
큰 탈 모양을 만들고 색을 칠하며 저녁 시간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이윤엽은 부스스 일어난 사람들에게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작업 아이디어를 말하기 시작했다. 고공 농성자들을 지키는 사람들이 길바닥에서 비닐을 덮고 잠을 자는 모습을 보며 떠올랐다며 이들에게 꽃 이불을 덮어주자는 것이었다. 멋진 의견이었다. 밤새 마무리 못 한 작업을 하고 꽃 이불을 만들 천막 천을 사 들고 부평으로 갔다. 2010년 12월 7일. 농성장을 지키는 사람들이 공장 벽을 바람막이 삼아 비닐을 덮고 누워 있었고 우리는 그 위에 천막 천을 덮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꽃 이불 덮고 따뜻하고 행복한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시는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려 투쟁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GM대우자동차 부평공장 정문 앞 고공농성은 30일, 60일이 지나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당시 지부장이던 신현창이 단식농성 중이었다. 단식농성 45일, 고공농성 64일이 되던 날 사측과 합의가 이뤄져 투쟁하던 노동자 전원복직으로 농성이 정리됐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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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문화연대가 발행하는 이야기 창고 <문화빵>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