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여성행진 ‘인류를 위한 세계 여성 헌장’ 중
오는 7월 3일, 한 장의 퀼트와 ‘인류를 위한 세계 여성 헌장’이란 명칭이 붙은 한 문서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온다. 그리고는 필리핀으로 넘어갈 예정이다. 실제로는 너덜너덜한 천조각들과 문서 한 장에 불과하지만 이 퀼트와 헌장은 현재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여성들의 릴레이 행진을 이어나가기 위한 매개이자 전세계 여성들의 서로 다르면서도 공통된 목소리 그 자체이기도 하다. 지난 오랜 역사 동안의 여성들의 피와 땀과 애환을 상징하고 있으며, 자본과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국제연대를 몸소 실천하겠다는 여성들의 의지와 새로운 세상에 향한 열망을 담아내고 있다.
중남미 여성들, 여성들의 절대적 빈곤, 일상적 폭력, 전쟁, 자유무역 반대
2005년 여성행진은 역사적인 3월 8일,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시작했다. 브라질에 3만 여명이 모여 행진을 발족하였으며,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페루, 에콰도르, 콜롬비아, 아이티, 쿠바 등 남미 전역을 가로질렀다. 중남미 상당 부분의 경우, 빈민층 다수가 원주민이자 농민이고, 또 그 중 가장 빈곤하고 각종 폭력에 노출된 집단이 여성이다. 농촌이 붕괴하고 남성들이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나서자 많은 농민 또는 농업노동자 여성들은 남아서 이중 삼중의 노동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다.
멕시코를 비롯해 이제 중남미 여러 지역으로 확산된 수출자유지대 여성과 소녀들에 대한 온갖 탄압, 비인간적 착취와 폭력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초국적기업의 토마토 생산은 “여성의 손에서 여성의 손으로” 이어지며, 신자유주의 하에서 중남미(사실은 전세계)의 성별 노동분업 체계를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즉, 원주민 여성 농업노동자가 초국적 기업 농장에서 토마토를 수확하고, 메스티사(원주민과 백인 혼혈 여성) 여성노동자가 공장에서 이를 포장하고, 페스트푸드점에서 이주 여성노동자가 토마토를 판매한다. 물론, 남미 여성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남성의 68%에 불과하다. 또한 멕시코에서는 가정폭력으로 하루에 14명의 여성이 죽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기에 여성행진은 중남미를 거치면서 최저임금 보장 및 노동기본권, 안전한 낙태에의 권리, 토지개혁과 원주민 여성들을 위한 기본권을 요구하였으며, 폭력, 전쟁과 인종차별의 종식을 요구하였다. 아울러, ‘자유무역’이란 미명 하에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불평등을 더욱 악화시키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목소리도 높였다. 최근 미주대륙 전반에서 대중적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미주자유무역지대(FTAA)와 중미자유무역협정(CAFTA)에 대한 명확한 반대를 표명했다.
4월 말, 퀼트와 헌장은 미국을 거쳐 5월 초 캐나다에 ‘입성’했다. 조직으로서 세계여성행진이 탄생한 퀘백에서 15,000명이 집회에 참석하여, 빈곤 및 육아지원에 대한 예산 책정 등을 주요 의제로 제기하였다.
‘전통’이란 미명 하에 가해지는 여성유폐, 명예살인, 인권유린을 드러낸 터키
5월 9일, 퀼트와 헌장은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건너갔다. 가장 먼저 300여명이 모인 가운데 터키 여성들에게 전해졌다. 터키는 유럽과 근접하기도 하고, 기타 종교근본주의 중동지역 국가보다 터키여성들은 상대적으로 보다 많은 시민권을 누려왔다. 그럼에도 ‘전통’과 이슬람의 영향이 남아 있어 터키 여성들은 여전히 많은 억압을 감수하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유럽연합 가입신청 시 터키의 엄격한 여성 관련 법률들이 문제시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터키에서의 여성행진은 터키의 전설과 전통 이면에 숨겨져 있는 여성에 대한 착취와 폭력을 고발하였다.
터키에 '1000년 전 한 왕이 딸을 뱀에 물리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바다 한 가운데 있는 탐 꼭대기에 가두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런 전설이 상징하는 ‘여성유폐’가 오늘날 계속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해상 퍼포먼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또한 여전히 광범위하게 자행되고 있는 ‘명예살인’이나 ‘처녀성 실험’ 등 인권유린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도 높았다. 그 뿐 아니라, 2002년이 되어서야 비로써 남편의 동의 없이 일자리를 구할 수 있게 된 여성노동자들은 3,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집회를 갖고 경제, 정치, 사회 제 영역에서의 여성배제와 이를 재생산하는 현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를 진행했다. 그리고 터키 여성들의 염원을 담은 새로운 조각이 더해진 퀼트는 5월 11일 그리스로 넘어갔다.
유럽으로 건너온 여성행진, 낙태 금지 해제 등 요구
그리스에서는 실업과 가정폭력, 인근 사이프러스에서는 분쟁 종식이 여성행진의 주요 의제였으며, 전통적인 카톨릭 윤리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이탈리아에서는 ‘의료 지원을 받는 출산’을 범죄화하는 국민투표에 대항하는 집회가 개최되었다. 5월 15일 22개 조각의 퀼트는 포르투갈로 넘겨져 이를 중심으로 집회와 토론회 등 각종 행사가 진행되었으며, 700여명의 국회의원, 지식인, 일반 시민 등이 서명한 ‘인류를 위한 권리헌장’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포르투갈에서는 낙태금지정책이 많은 공격을 받았으며, 동성애자 인권도 제기되었다. 6월 1일, 12,000명이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도착한 퀼트를 맞이했다. 다른 유럽지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는 최근 대중적 저항에 봉착한 유럽연합 헌법과 각종 정책을 주된 대상으로 삼았으며, 유럽 대륙 여성들 간 연대를 강조했다. 퀼트는 프랑스에서 네덜란드를 거쳐 덴마크로 갔으며, 다시 불가리아를 거쳐 스위스로 넘어갔다.
스위스 여성들은 6월 10일부터 ‘횡단’을 시작하여 여러 도시를 거치면서 선전전과 토론회 등을 진행했으며, 20여개 도시 30여 번의 집회 및 선전전을 거쳐 6월 14일 스위스 여성파업의 날에 맞춘 집회로 ‘횡단’을 마무리하였다. 스위스 여성들은 횡단을 하면서 ‘인터내셔널가’를 여성에 맞게 개사하여 즐겨 불렀다고 전해진다.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넘어오는 퀼트, 한국 여성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럽 대륙을 거쳐 퀼트와 헌장이 아시아로 넘어오고, 여성들의 릴레이도 아시아대륙을 횡단하게 될 것이다. 물론, 퀼트는 상징일 뿐이고, 헌장의 구체적인 내용이 국제기구를 대상으로 다소 제도적 대응에 맞춰져 있기도 하다. 그리고 현재 진행되는 행진 또한 세상을 바꾸기에는 힘이 미약하기 그지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국제적 연대체로서의 세계여성행진, 또는 운동 방식으로서의 세계여성행진에 주목할 만한 이유는 문화와 국가에 따라 매우 다양하고 상이하면서도 전세계적으로 공통적일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요구를 그야말로 국제적 수준에서 모아내고 있기 때문이며, 국경과 문화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국제연대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 때문이다. '상층 중심' 내지는 '국제회의 중심'의 국제연대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연대와 투쟁을 지향하고 실천한다는 면에서 우리나라의 반세계화 운동, 여성운동에 새로운 자극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