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위에 의한 현장권력의 침식(侵蝕)

[박영자의 북쪽이야기](8) - 북한 노동자조직 연구(下)

지난 글에서 필자는 북한의 노동자조직인 직업총동맹(이하 직맹)의 형성과 국가건설 과정에서 ‘국가에 대한 노동자 권리’ 주장이 비판되었던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번 글에는 한국전쟁 과정에서 조선로동당(이하 노동당)의 ‘생산 통제’와 당적 지도’가 확대되면서 직맹이 전시증산운동을 주도하고, 전후 산업화 과정에서 직맹의 위상과 역할이 급격히 변화하여, 직맹이 노동당의 외곽단체이며 국가기관화되는 역사적 과정과 성격을 밝히려 한다.


1. 한국전쟁 시기 직맹

전쟁이라는 위기상황에서 노동당은 생산단위 직접 통제력을 강화했으며, 총동원체제에서 직맹은 생산증대운동(이하 증산운동)에 노동자를 조직-동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노동자조직인 직맹은 증산운동을 ‘노동자들의 자발성’에 의한 사업으로 조직했다. 직맹 주도로 진행된 증산운동은 북한정권의 전시 증산정책과 노동당의 생산지도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이 시기부터 직맹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노동당의 생산 및 노동 정책을 관철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북한당국은 전시증산과 노동규율 확립을 위해 1950년 7월 6일 선포된 군사위원회 결정 제6호 <전시로동에 관하여>가 직맹의 제의로 이루어진 것으로 노동자들의 자발적 의지를 당국이 받아 안은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 결정으로 노동자들의 시간외 노동과 휴가보류 등이 직장책임자 권한 내에 이루어졌으며, 자의적인 직장 및 작업 이탈이나 결근 등에 대해 형사 책임을 지울 수 있게 되었고, 노동규율 위반에 대해서는 직장책임자까지 연대책임을 지며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되었다.1)

전쟁 초기부터 대규모 공장과 기업소들은 공장 내 노동당 조직인 ‘공장당위원회’의 지도 하에 생산과 수리복구 사업을 하였다. 예를 들어 황해제철소는 공장당위원회의 지도 하에 기대와 설비를 수호하기 위해 공장설비방위위원회를 조직하고, 각 직장과 작업반은 기대와 설비를 지켜내기 위한 헌신적 활동을 하였다. 노동자들은 전쟁 개시 첫날부터 인민군으로 출전한 노동자들의 생산과제를 분담했으며, 노동시간을 연장하고 3교대제를 2교대제로 개편하였고 쉬는 날에도 생산을 하였다.2) 또한 다양한 방식의 원료․자재 절약과 노력혁신, 그리고 경쟁운동이 조직되었다. 이 과정에서 직맹은 공장당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연장과 증산운동을 주도했다.

노동당의 역할은 정책과 지침을 제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으며, 직접 행정적인 경제사업을 지도 및 총괄하기 시작했다. 당의 행정대행 현상이 심화되어 공장의 당세포회의가 행정기술협의회처럼 되었다. 실 예로 락원기계제작소 주철직장에서는 당원들이 당세포회의에서 선철과 콕스를 비롯한 연료와 자재를 해결해 달라는 식으로 토론이 진행되었다고 한다.3)

직맹 주도의 전시증산운동은 1950년 12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와 1951년 김일성 신년사에서 군수생산 증대로 전선수요를 보장해야 한다는 지침이 하달됨에 따라 증산경쟁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지침이 하달된 이후 “전시생산 및 복구준비 속도를 높이자!”라는 광산 직맹 산하 노동자들의 결의를 시작으로 광업, 군수생산, 임업, 교통운수, 전기, 체신 및 지방산업부문에서 증산경쟁운동이 광범위하게 벌어졌다고 한다.4) 공장에서는 매일 아침 조회 시간에 전시 상황과 속보, 증산경쟁의 모범사례 등을 노동자들에게 선전하여 노동자들이 생산결의를 높이고 증산에 힘쓰도록 하였다.5)

증산경쟁운동은 1951년 이후 더욱 확대되었으며 ‘집단적 혁신운동’과 결합되었다. 당시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현훈은 생산원료와 자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창의성 및 생산혁신을 강조하며 증산경쟁운동에 ‘집단적 혁신운동’을 결합한다.6) 창의고안과 생산혁신운동은 폐물활용과 노동강도 강화로 나타났다.7)

한편 전시 노동규율 강화정책을 실시했던 당국의 요구만큼 현장에서 노동규율이 빠르게 잡히지는 않았다. 특히 출근율 문제는 생산의 걸림돌이었다. 북한정권은 출근율이 급속히 제고되지 않는 이유는 전쟁으로 인한 변동사항을 직장에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에 따른 교양사업을 못하기 때문이며, 간부들이 노동규율 문제를 생산과 분리하여 사고하여 노동력 부족만 제기하고 규율강화 사업을 제대로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북한당국은 내각결정 제27호로 ‘<로동내부질서표준규정> 준수’를 지시하며, 그 목적을 “규율을 높이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일정한 체계와 절차가 규정되며 행동의 규범이 있어야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각 직장 당단체들은 정치교양사업과 군중정치 선동선전사업을 꾸준히 전개하여 로동규률을 강화”할 것과 당원이 모범이 될 것을 강조한다.8)

그리고 전체 노동자에게 모델이 될 수 있는 모범노동자를 창출하여 그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모범 따라 배우기 운동’을 전개한다. 일 예로 1953년 2월 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직포공 고영숙의 사례를 살펴보자. 소작농 자녀 출신인 그녀는 노력영웅 당운실의 모범을 따라 선진작업방법을 꾸준히 연구하여 노동생산능률을 현저히 제고하였으며, 생산계획량을 기일 전에 초과달성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1952년 3월 평양에서 개최된 산업운수부문 전체열성자대회에 참가하여 김일성을 만나고 국가훈장 1급을 받았다. 그녀는 영광과 감격으로 대회 석상에서 생산공정 개선과 새 작업방법 적용으로 새 기술기준량을 창조하여 연간 기본생산 책임량을 115%로 초과달성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 후 그녀는 공장당과 직맹의 지도와 도움으로 소련의 혁신노동자 스타하노프들의 생산수준에 도달하고, 그들의 선진작업방법을 작업에 적용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여 성공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작업방법은 ‘표준조작법’이 되었고 빠르게 일반화되어 노동력과 시간을 절약하였고 공장 전체계획량을 초과달성하도록 하였다고 한다.9) 이렇듯 모범노동자를 창출하고 그를 따라 배우도록 하는 사업이 노동당의 지시와 직맹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직맹은 노동당의 지시를 이행하는 역할을 하였다.

노동자들의 권익증대를 위한 직맹의 단체계약권은 이미 전쟁 전인 1950년 3월 15일 내각결정 56호 <단체계약체결에 관한 결정> 시행으로 그 권한이 제한되었다. 이 결정으로 단체계약은 생산계획의 실행과 초과생산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었고, 생산량과 노동생산 증가율 및 원가저하율과 설치이용증가율 등 국가생산계획 과제가 단체계약의 내용이 되었다.10) 이 결정은 전시 증산경쟁과 생산혁신 운동, 노동규율 확립 정책이 본격화됨에 따라, 직맹의 주요 권한인 단체계약의 성격이 변화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노동자들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하여 노동자 권익 증대에 기여해야 하는 단체계약권이 노동당의 정책과 국가경제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세부 내용을 책정하는 것으로 변화된 것이다.

2. 전후 권력관계 변화와 노동규율 강화 과정에서 직맹

전쟁 과정에서 가장 약화된 북한의 사회단체는 직업동맹이었다. 이것은 앞서 설명한 전시 노동입법과 단체계약의 성격변화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직맹은 전후 권력관계 재편과정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전쟁말기 휴전논의가 본격화되면서 북한에서는 전쟁책임론이 제기된다. 대표적으로 1953년 2월부터 시작된 박헌영과 리승엽 주도의 남로당계에 대한 숙청 과정에서 직맹은 직접적인 타격을 입었다. 1951년 1월 북한정권이 남쪽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를 북쪽의 직맹과 통합하였는데, 남로당계 숙청 과정에서 이들 남측의 전평 출신자들이 직접적으로 연루되었다. 그 결과 과거 전평 활동을 했던 직맹위원장 현훈은 1953년 5월 생산협동조합중앙위원장으로 좌천되었고, 이후 연안계의 서휘가 직맹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직맹위원장은 1955년까지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 남로당계 숙청 과정에서 과거 전평 출신자들이 상당수 포진되어 있던 직맹 내 주요 인사들이 좌천되거나 권한이 약해지곤 하였다.11)

한편 1953년 휴전과 함께 전후복구를 계획하면서 북한당국은 중공업 중심 경제발전 정책을 실시한다. 금속, 기계제작, 화학, 건재, 조선, 전력, 채취공업이 핵심산업이 되었으며, 이 분야에 자재와 자금, 그리고 노동력이 집중 투자된다.12) 핵심산업 육성은 국방력 강화와 전후 산업화를 위한 정책이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노동당은 공업생산에 대한 당적지도 강화를 제기하며, 생산과 노동자에 대한 관리와 지도를 핵심과제로 설정했다.13) 전후 산업화를 주도할 주체로서 노동당 권력을 더욱 강화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제기하는 생산 현장권력의 형성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쟁 전부터 규정되었던 노동규율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북한당국은 전쟁 전인 1950년 1월 31일 내각결정 제27호로 무단결근, 지각 및 조퇴, 근무태만 등에 대한 주의, 경고, 엄중경고, 3개월 감금, 강직, 철직 등 벌칙조항을 신설했었다. 그리고 전쟁 과정에서 형법 제18장의 노동관계 위법행위에 대한 벌칙조항이나 <전시로동에 관하여>, <기업소 및 기관의 로동자, 사무원이 임의로 직장을 이탈하는 행위를 금지할 데에 관하여> 등 노동규율 확립을 위한 제반 규제조치가 실행되었다. 나아가 북한당국은 1954년 3월 21일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의 김일성 연설에 따라 3월 30일 내각결정 제55호로 <로동내부질서표준규정>을 새롭게 제정하였다. 이 결정은 1950년부터 진행되었던 노동규율 확립을 위한 제반 규제조치들을 강화하면서, 직장 내 노동규율 위반자에 대한 ‘동지적 군중재판’을 시행하도록 한 것이다.14)

생산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군중재판은 노동규율 위반이나 파괴행위에 대한 노동자들의 상호감시와 견제를 목표로 한 것이다. 재판은 직장총회나 협의회로부터 선출된 재판원에 의해 진행되도록 하였다. 구체적으로 “국가재산에 대한 계속적으로 불성실한 태도, 로동규률을 위반할 때, 규정된 기준을 위반하고 불합격품을 생산한 때, 언사상 또는 서면 및 행동적으로 남에게 모욕적 불량행위를 감행한 때, 기업소 및 기관 재산의 약탈행위, 기타 국가 사회적 요구에 전혀 응하지 않는 행위 등에 대하여 군중적 동지적 비판을 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행위에 대해서는 경고, 공개, 제재, 물질적 변상 등을 하게하고 해직을 제의하거나 직맹에 일정 기간의 출맹을 제의할 수 있게 하였다.15)

전 방위적인 노동규율 강화사업을 공장 내 노동당 조직이 직접 지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직맹의 위상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전쟁 전 공장관리 측과 직맹 사이에서 이루어지던 단체계약이 전시증산운동 과정에서 관리 측의 전시생산 목표를 실행하기 위한 내용으로 그 성격이 변화되더니, 전쟁 이후 평시 상황이 조성되었음에도 1957년까지 그 기능이 정지되었다.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의 생산의무만이 서약되고 관리 측의 책임은 논의되거나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 나아가 직맹이 주도하던 증산경쟁운동에 대한 지도와 관리 사업권도 1954년 이후에는 각 단위 당노동부의 지시를 시행하는 공장당위원회가 주도적으로 행사하였다. 또한 생산현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직장 및 작업공정별 생산협의회 등 기존의 대중적 회의에도 당이 주도적으로 관여하였다.16)

한편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소련에서 스탈린의 개인숭배와 인민생활향상과 배치되는 중공업중심 노선을 비판하는 ‘탈스탈린’ 흐름이 전개되면서, 북한 권력층 내부에도 전쟁을 경과하며 더욱 강화된 ‘김일성 개인숭배’ 경향에 대한 비판과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경제발전의 속도조절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한다. 이 흐름을 주도했던 세력은 소련계와 중국 연안계 출신들이었다. 직맹과 관련하여 반김일성 흐름을 주도했던 이는 직맹부위원장을 역임하다, 1956년 직맹위원장으로 취임한 연안계 소속 서휘였다.

서휘는 전후복구사업의 성과로 경제활동이 정상화됨에 따라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제기하였다. 그는 1956년 6월 21일자 『로동신문』에 기간 증산경쟁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노동권 보호 방향을 제시하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에서 그는 생산조건에 대한 협의 없이 경쟁의무를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에게 강요하는 증산경쟁운동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행정관리 측에서의 생산조건의 보장과 생산자 측의 로동생산능률 제고를 위한 목표를 호상 합의, 계약하여 그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단체계약을 체결한 후 증산경쟁을 추진해야 한다고 하였다.17) 전쟁으로 왜곡되었던 중앙집권적이고 일방적이었던 노동관계를 상호 논의와 합의가 보장되는 평시 상태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8월 종파사건’이라 불려지는 북한권력층 내 지각변동으로 서휘가 제기한 단체계약 정상화를 통한 평시 노동관계 회복 제기는 좌절된다. 1956년 8월 당전원회의에서 소련계와 연안계에 의해 주도된 김일성 개인숭배 비판과 속도조절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서휘, 윤공흠 등 이 사건을 주도한 핵심 성원들은 생존을 위해 중국으로 도피하거나 소련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서휘가 주도하던 직맹의 위상과 역할 조정 문제는 더 이상 제기될 수 없었다.

8월 종파사건 이후 수 개월간 노동당 주도로 직맹 내에서 서휘 비판이 전개되었고 그 측근들에 대한 숙청이 진행되었다. 당시 직맹중앙위원회의 내부 숙청과정에서 비판된 서휘의 언행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휘가 직맹에 부임하자마자 입에 담은 말은 “시집살이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그가 “로동계급의 총괄적인 자치적 조직체”인 직맹에는 “모든 부문의 당원들과 정무원들이 망라되어 있다”고 강조한 결과 직맹 지도부에는 “당과 직맹의 동격론”, “직맹, 당, 행정의 삼각동맹설” 등 “서휘식 직업동맹설”이 나타났다. 서휘가 말하는 “자치적 조직체”의 본질은 직맹이 “그 어떠한 외부로부터의 일체의 지도와 통제를 받지 않는 궁극 당의 지도를 거부한다”는 데 있다. 그는 당뿐 아니라 행정에 대해서도 노골적으로 도전하였다. 그는 “직맹은 성, 국을 틀어쥐어야 한다”, “초급단체에서도 행정과 투쟁하라”며 노동자가 정권에 대립하도록 선동하였다. 서휘는 “조건없이는 증산경쟁을 하지 말라”, “다기대운동도 좋으나 우선 충분히 먹어야 한다”고 하며 생산의 성장과 분리하여 생활의 개선을 운운하였다.18)

그리고 1957년 5월 30일 당중앙상무위원회 결정 <반혁명분자와의 투쟁을 전군중적 운동으로 전개할 데 대하여>가 채택되어 ‘중앙당 집중지도’ 사업이 북한 전역에서 실시되었다. 이 집중지도가 철저하게 시행된 기관이 직맹중앙위원회였으며, 6월 14일 당중앙상무위원회에서 직맹사업에 대한 결정이 별도로 내려졌다. 이 회의에서 서휘를 중심으로 한 직맹 내 ‘반당반종파분자’에 대한 중간비판이 총괄되면서 신임 직맹위원장으로 당조직지도부장 한상두가 당사업과 겸임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후 직맹 내에서는 당중앙위의 직접 지도로 “서휘가 뿌려 놓은 반당적 사상여독”을 청산하기 위한 전 조직적인 간부 검열사업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사업은 확대되어 공장과 기업소 차원에서까지 진행되었다.19)

3. 직업동맹의 국가기관화

전후 추진된 농업협동화를 비롯해 ‘전 산업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완료된 1958년, 북한당국은 직맹 내 사상검열 사업을 일단락 지으면서 단체계약 체결을 결정한다. 또한 서휘 숙청과 함께 중지되었던 국가사회보험과 노동보호 관련 사업도 노동성으로부터 직맹으로 이관하는 조치도 시행한다.

그러나 단체계약은 ‘북한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이라 칭해지는 천리마운동이 1958년부터 대대적으로 전개되면서 생산량과 생산의무를 지정하는 것으로 그 성격이 고착화되었으며, 사회보험 및 노동보호 관련 권한의 직맹으로의 이관도 직맹의 고유한 역할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표하고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당 및 국가정책을 집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노동자들에게 당과 국가정책을 해설하고 교육하는 역할이 강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조직의 국가기관화’가 제도화 된다.

그리고 1959년 11월 2-6일 동안 조선직업총동맹 제3차 대회가 제2차 대회(1947) 이후 12년 만에 개최되었다. 이 대회를 통해 1950년 이래 변화된 직맹의 위상과 역할이 공식화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북한체제에서 노동자조직은 어떠한 목표와 위상을 가지고, 어떠한 역할을 해야 했는지 『조선직업총동맹 제3차 대회 문헌집』의 주요 내용을 통해 살펴보자.20)

1) 총칙에 나타난 직맹의 위상과 목표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박상홍은 “직업동맹은 당적 사상 체계가 확고히 수립되여야 하며 동맹의 일체 활동이 당 정책 관철에 전적으로 복종되여야 하며 당의 령도와 당 정책에 대한 일체 불성실한 태도들은 동맹 내에서 추호도 용납되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하며 제1장 총칙에서 “조선직업동맹은 조선 로동당의 믿음직한 옹호자이며 당과 로동계급의 련계를 보전하는 인전대로서 당의 령도하에 자기의 모든 활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직업동맹은 “생산관리에 노동자를 적극적으로 인입하며, 사회주의적 경쟁운동을 조직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강화하며, 공산주의 교양과 기술문화 수준제고를 위한 사업을 강화함으로써 그들을 당과 혁명에 무한히 충실한 붉은 혁명 투사로,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자로 교양 훈련 하여야 한다”고 규약 개정을 발표하였다.

또한 “조선직업동맹은 로력의 합리적인 조직과 리용, 선진적인 로력 기준량의 도입, 로동의 질과 량에 따른 사회주의적 분배 원칙에 의한 로동임금의 정확한 적용을 보장하며 로동보호 및 기술안전 상태를 부단히 개선하기 위하여 로동자, 기술자, 사무원들의 창발성과 적극성을 적극 동원하며 이와 관련한 국가적 대책의 실행 정형을 지도 검열”하고 “로력임금, 로동정량, 로동보호, 사회보험 등에 대한 국가적 관리의 기능이 직업동맹에 이관됨과 관련하여 새 규약에는 이 부분 사업에서 동맹단체들이 수행하여야 할 과업들이 중요하게 첨가”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직맹이 노동당의 외곽단체이며 국가의 노동정책을 실행하는 국가기관화된 것이다.

2) 직업동맹원의 의무와 권리
새롭게 변화된 규약에서 직맹원의 의무는 첫째, “당의 로선과 정책을 헌신적으로 실천하여 사회주의 제도를 공고화하며 생산력을 발전시켜 북반부의 혁명적 민주기지를 일층 강화”하고, 둘째, “동맹 내에서 종파주의와 지방주의, 가족주의적 경향들과의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로동계급의 통일과 단결을 수호하며 김일성 동지를 수반으로 한 우리 당중앙위원회를 정치사상적으로 철옹성같이 보위하는 것”이며, 셋째, “맡은 사업과 기술에 정통하며 선진기술과 작업방법을 체득하기 위해 노력해야”하고, 넷째, “로동규률을 준수”해야 하는 것으로 제시되었다.

권리로는 첫째, 비판과 자기비판의 권리, 둘째, 자기의 의견과 주장을 동맹기관에 제기할 수 있는 권리, 셋째, 노동법령과 단체계약 또는 사회보험규정 및 당과 정부의 결정, 지시들에 나온 근로자들의 물질문화적 복리증진을 위한 제 시책들이 개별적 기관 또는 해당 일군들의 사업상 결함으로 인하여 정확히 실현되지 않을 때에도 자기들의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여 줄 데 대한 의견을 동맹기관들에게 제기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의무의 절대성과 방대함에 비해 권리는 의무를 보조하기 위한 형식논리의 성격이 강했다. 더욱이 1958년 이후 전개된 천리마운동이 생산현장에 구체화된 천리마 작업반운동과 1962년부터 전개된 ‘경제-국방 병진노선’에 따른 전시증산경쟁운동의 지속 과정에서 노동권 보호와는 거리가 먼 ‘권리의 제1조항’ 인 ‘비판과 자기비판의 권리’만이 실현되었다. 비판과 자기비판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였다.

3) 직업동맹의 조직 원칙
기본적으로 “산업별 조직원칙과 지역별 지도체계를 강화하여 도 직맹 평의회를 도 위원회로 개편하였으며, 전반적인 시(구역), 군에 직맹위원회를 조직하는 것으로”, 이것은 “해당 지역 내에서의 직맹단체들의 활동에 대한 통일적 지도를 강화하며 사업경험들의 보급을 쉽게 하며 특히 당정책과 상급동맹의 결정, 지시들을 더욱 신속하게 관철시킬 수 있게”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직업동맹 지방조직>이라는 장을 따로 설정하여 도, 시(구역), 군 위원회의 역할을 제고하며 권한을 확대하는 방향에서 그의 직능들을 규정”하였다. 그 이유는 “당중앙위원회의 정확한 경제정책과 현명한 지도에 의하여 지방공업이 대대적으로 발전함으로 지방공업 체계가 확립되는 조건에서 그에 적응한 조치”였다고 한다.

직맹을 국가기관화한 북한당국이 당적 지도의 효율적 관철을 위해 직맹의 조직체계를 당의 조직체계에 조응하도록 재편한 것이다.

4) 직업동맹 초급단체
직업동맹 초급단체는 직맹의 가장 하부조직으로 노동자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단위이다. 이 대회에서 북한은 가장 밀접하게 노동자를 통제하고 생산을 장악할 수 있는 기제로 직맹 초급단체 역할을 강화하였다. 초급단체는 5-20명 사이로 구성하여 동맹원들의 조직생활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그 임무로 다음과 같은 규정을 제시하였다. 첫째, 직맹 초급단체들은 당단체들의 지도 하에 근로대중 속에서 당과 정부의 정책과 결정, 지시들을 해설 침투시키며, 둘째, 당의 혁명전통교양과 공산주의적 사상교양 사업을 조직 진행하며, 셋째, 근로대중을 사회주의 건설과 공장, 기업소의 기업관리에 적극적으로 인입시키며 그들의 정치적 열성을 제고하여 사회주의 경쟁을 광범히 조직하고 노동생산능률을 부단히 제고하여 인민경제계획의 완수 및 초과완수를 보장하며, 넷째, 대중을 생산관리에 참가시키는 생산협의회를 운영하여 단체계약의 실행을 보장하고, 다섯째, 노동자, 기술자, 사무원들 속에서 발명 및 합리화 운동을 광범히 전개할 것이며, 여섯째, 노임의 정확한 지불, 노동보호 및 생활조건의 개선을 위하여 일상적으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고 하였다.

5) 단체계약 내용과 직맹의 역할
규약개정 이후 직업동맹의 단체계약은 생산력 증대를 위한 ‘노동정량’ 지정과 노동자 기술수준 관리, 그리고 이를 실현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으로 제도화 되었다. 구체적으로 “동맹단체들은 로동기준량 제정 사업을 개선하고 로동기준량을 제정함에 있어 언제나 근로자 대중의 적극성을 발동하여 새로운 기준량을 부단히 창조하며 그것을 보급하도록 전 군중적 운동을 조직 전개하며 이와 함께 기능 사정과 임금등급 사정 사업을 정상적으로 진행”해야 했던 것이다.

또한 “동맹단체들은 근로자들을 동원하여 로동생산능률의 제고에 관심을 집중하며 로력의 랑비현상을 퇴치하기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해야 하며 이를 위해 공작기계새끼치기 운동을 더욱 확대 발전”시키고, “동맹단체들은 경쟁의무의 정확한 수립과 채택한 의무의 실행을 위하여 로동자들을 조직동원하며 기업소 관리측과 협력하여 모든 조건들을 충분히 보장하며 경쟁의무 실행정형을 정상적으로 총화하고 앞선 자들과 뒤떨어진 자들 간의 동지적 방조를 조직함으로써 생산에서 전반적인 앙양을 달성케 하여 천리마 작업반운동을 지지 방조하고, 창의고안, 발명 및 합리화 운동을 확대 발전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단체계약은 생산계획의 완수와 근로자들이 로동 및 생활 조건의 개선을 위하여 기업소와 직업동맹이 지닌 호상의무를 실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명시하였으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직업동맹의 책임성을 높이며 생산관리에 로동자, 기술자, 사무원들의 적극성을 발양”하도록 하였다. 이를 위하여 “직맹은 각 공장, 기업소들에서 1만 2천 여 개의 보고해설반을 조직하여 근로대중 속에 당정책을 부단히 해설 침투시키고 그들의 기술문화 수준제고를 위하여 근로자 학교들과 구락부, 민주선전실 등의 사업을 일상적으로 지도”하게 하였다.

결론적으로 단체계약이 노동자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통로가 아니라, 당-국가의 노동정책과 생산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통로로 제도화된 것이다.

북한 노동자조직의 국가기관화를 초래했던 가장 중요한 내적 원인은 정치적 전위부대라고 하는 조선노동당의 생산현장에 대한 직접적 통제권 확장이었다. 앞서 밝힌 직맹의 위상과 역할, 그리고 성격변화와 관련된 북한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정치적 전위부대에 의한 노동자 권력과 현장권력의 침식’을 확인할 수 있다.

소위 ‘당적 지도’가 전방위적으로 관철되고 생산현장에서 국가행정 역할을 대리하는 북한 노동자조직의 위상과 역할은 21세기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2002년 현재 북한 전화번호책의 내용을 근거로 한 아래의 <그림 1> ‘북한 직업총동맹 기구도’를 살펴보자.

  <그림 1> 북한 직업총동맹 기구도(2002년 현재)

<그림1>을 살펴보면 직맹위원장과 부위원장을 연결하는 위치에 당비서와 당부비서가 매개하고 있다. 대개 직맹위원장은 대외적 역할에 치중하고 5인으로 구성되어있는 직맹부위원장들이 실질적으로 직맹사업을 주도한다. 부위원장은 조직담당, 사상담당, 경제담당, 국제담당, 수도건설담당으로 나뉘어져 있는 데, 부위원장 상부에 위치하여 이 둘 5개 분야 직맹사업을 총괄 관리 및 지도하는 것이 바로 조선노동당에서 파견된 직맹담당 당비서와 당부비서인 것이다.



주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조몽우, 『우리나라 법의 발전』(평양: 국립출판사, 1960), 136-137쪽.위로
2) 허종호,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사1』(평양: 사회과학 출판사, 1983), 248-250쪽.위로
3) 김일성,「락원기계제작소 주철직장당세포 당원들과 한 담화(1952.6.21)」『김일성저작집 7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0), 262-263쪽.위로
4) 강석희,『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사 2』(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83), 282-284쪽.위로
5) 「비행기 녀성호는 우리의 지성으로」,「농업증산을 녀성들의 힘으로 보장하자」『조선녀성』1950년 8월호.위로
6) 현훈,「로력위훈자들의 창의 창발을 일반화하자」『로동신문』1951년 7월 27일자.위로
7) 「그들은 이렇게하여 난관을 타개극복하였다」『로동신문』1951년 8월 30일자.위로
8) 당시 출근율에 대한 전체적인 통계는 없다. 다만 로동신문 사설에 인용된 한 기업소 채광부문에서의 1951년 8월의 출근율은 82.6%였다고 한다. 사설에 의하면, 만약 동 직장 간부들이 노동규율 강화 대책을 제대로 세우고 사업했다면 출근율은 92%까지 제고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설「전시하 로동규율의 강화를 위하여」『로동신문』1951년 11월 17일자.위로
9) 「로력 녀성의 구감, 직포공 로력 영웅 고영숙」『로동신문』1953년 3월 15일자.위로
10) 조몽우, 『우리나라 법의 발전』(평양: 국립출판사, 1960), 133-134쪽.위로
11)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 성립사』(선인, 2005), 453-454쪽.위로
12) 김일성,「전후경제복구건설방향에 대하여(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에서 한 결론, 1953.6.5)」『김일성저작집 7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0), 506-510쪽.위로
13) 김일성,「당을 질적으로 공고히 하며 공업 생산에 대한 당적지도를 개선할데 대하여(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에서 한 결론 1953.6.4)」『김일성저작집 7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0), 504쪽. 위로
14) 서동만, 앞의 책, 630-631쪽.위로
15) 정교섭, 「로동내부질서표준규정의 정확한 실시를 위한 몇 가지 문제」『인민』1954년 7월호, 107-108쪽.위로
16) 서동만, 앞의 책, 631, 633, 651쪽.위로
17) 서휘, 「제3차 당대회 결정 실행을 위한 직업동맹단체의 과업」『로동신문』1956년 6월 21일자.위로
18) 「당성을 옹호하며 당적 원칙으로부터의 리탈을 반대하여-직총 중앙위원회 사업에서」『로동신문』1957년 2월 25일자(서동만, 앞의 책, 654쪽에서 재인용).위로
19) 서동만, 앞의 책, 655-657쪽.위로
20) 『조선직업 총동맹 제3차 전국대회 문헌집』(평양: 직업동맹 출판사, 1959). 다음에 내용은 본 문헌집에 수록된 주요 내용을 인용하거나 다룬 것이다.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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